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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12. 2020

연민과 죄책감에 대한 고찰

순수한 선의에 대해서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를 방해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철학 덕분에 인간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고 “너는 죽고 싶으면 죽어라, 나는 안전하다”라고 몰래 중얼거린다. 철학자의 단잠을 깨워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걸친 위험들밖에 없다.


 저 구절은 장 자크 루소가 자신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발췌했다. 그가 남몰래 자신의 평온을 원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당대의 뜻을 함께 했던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이해해주지 않아 갖게 된 반목의 정서가 아닌가 싶다. 이 추론적 의심에 깔린 전제는 혐오라는 감정이 자신의 주관을 충족시켜주지 않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상호 주관성 내에서만 존재함을 느낀다. 여기에서 '다름을 인정하라'는 교의적인 말이 요청되며 서로 간에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아주 순진하게 이야기하고 싶긴 하다만, 개인적으로는 다름보다는 옳음을 따지는 것이 더 옳다. 틀린 것은 분명 존재한다. 틀린 것을 주장하는 것을 다른 것을 인정하라고는 할 수 없다.


 루소는 철학자라는 족속을 자신의 앞마당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려고 하며, 항시 이성의 호사를 누리며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만이 원대한 목적인 사람들로 본 것 같다. 그런데 루소가 철학자들에게 건넨 이 비판의 말이 과연 철학자들의 태도에 국한된 문제라 할 수 있을까? 항상 그렇듯이,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다'라는 정도의 주석을 만인에게 달며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도 있겠으나, 냉소적 태도란 이런 것이 아닌가? 분명 이 세계 어디에선가 불미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작고 네모난 스크린 화면을 통해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그런 사건들을 접하노라면 우리는 아주 잠시나마 양심이 불편해짐을 느끼며 하던 일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우리는 곧장 '내가 사는 곳은 너무나도 평화롭구나!'라고 어렵지 않게 되뇔 수 있다. 루소가 말한 바와 차이가 있다면 굳이 안도감을 느끼는 것에 대해 솔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 정도이다. (세계시민이요?)


 범세계적인 문제들 중에서 '바다 위의 플라스틱'을 떠올려 보자. 이것이 왜 기억에 남아 있는 진 모르겠으나, 초등학생 때 세계지도 위에 플라스틱 섬이 손톱만한 크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세계 지도 위에 그려진 자그마한 섬을 보며 저기에 모래를 부어 섬을 만들면 땅이 늘어나 좋겠다는 해괴한 상상을 했었다. 10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이런 이슈에 눈을 돌렸을 때 그 섬의 크기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커져 있었다. 우리가 쏟아내고 있는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을 보면 아마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는 정말 간척사업으로 새로운 대륙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헛소리는 관두고, 그곳에는 나와 여러분들의 지분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계속 방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플라스틱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풍화와 침식 작용을 거친 미세 플라스틱이 드디어 우리 식탁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여전히 과학의 힘을 믿으며 순수한 낙관론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실제로 과학이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바꾸었는 지를 가늠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법학자이거나 정치학자라면 규제를 통해 플라스틱 배출량을 줄이는 방법을 검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환경단체에 가입한 사람이라면 기업들이 반인륜적인 행태를 저지른다고 낙인을 찍고서 꽁무니를 좇으며 시위를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것을 진정 해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실제로 미국의 10대 소년이 해류의 방향을 이용하여 플라스틱을 수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 냈으며, 기존의 방식보다도 더 효과적이고 하물며 경제적으로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축했다. 이 기획을 창안한 소년이 만든 기업에 엄청난 투자금이 유치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천재들에게 이끌려 온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영웅 신화는 낭만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낭만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 어떤 범지구적이고 범사회적인 문제를 방관하는 태도가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방관하는 것도 죄라고 단순히 규정짓기엔, 우리는 생각보다도 더 방관자의 위치에 서 있다. 이 사실을 쉽사리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컨대, 학창 시절에 반에 꼭 한 명씩 있었던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를 떠올려 보자. 그 친구를 괴롭히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이 죄가 될까? 따돌림을 주도하는 소위 '일진'이라 불리는 무리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집단적 움직임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내가 알기로는 벌어지기는커녕 염두된 적 조차 없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중학생 시절에 아주 힘이 세고 또래에 비해 덩치도 컸으며 정의감이 가득 찬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악한 강자에 맞서 약한 친구들을 항상 보호해주는 선한 강자로 군림했다. 그 친구는 영웅이지 않는가? 그러나 나중에 불만을 품은 일진 여럿에게 보복을 당했고 눈 한쪽이 실명됐다. 영웅 신화의 낭만엔 금이 가기가 너무나도 쉽다.


 방관하는 것이 죄라면 우리는 왜 '죄인'으로 남고자 하는가? 우리는 양심이 불편해진다면 금세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읊조릴 수 있는 존재이다. 아마 이런 식일 것이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의 본질적인 문제는 자신이 아무런 문제를 겪고 있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행을 기피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더 문제적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방관하는 자들의 성향이란 자신에게 무언가를 바꿀만한 힘이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또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분노를 할 수 있을지언정, 그렇다고 한들 뾰족한 수를 내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일시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야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세계 도처에 널려 있는 여러 갈등 상황과 분쟁, 핍박받는 소박한 개인들, 여전히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 부패한 정권, 그리고 범지구적인 환경문제까지 일일이 생각하기엔 한 개인은 너무나도 무기력한 존재이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 가슴이 벅차오르며, '내가 무언가 해야만 해!'라는 불온한 외침이 마음 한 켠에서 솟아오른다면,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불행을 짊어질 수 있는 자이며 동시에 행복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행이란 평생토록 고뇌와 양심의 번민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역설적이게도 행복이란 삶이 무의미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이런 성향의 인물들은 전형적으로 영웅이 될 기질을 갖춘 자들이었다. 그들은 남들보다도 더 많은 문제들에 대한 회의를 품었으며 최악이란 것을 염두하는 인간이다. 즉 니체에게 긍정성이란 최악의 상황을 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중에서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순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적으로는 이런 성격이 반-시대적인 영웅의 심리라 할지라도 이 자체로 이미 모순을 겪고 있는 즉, 정신병자가 될 수 있는 심리와도 일치한다. 우리는 쉬이 정신적 질환을 갖고 있는 자를 보고 정신력이 약하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자기-의식 내부에서 끊임없이 불쾌함을 재현해내고 있는 자들을 보고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한 주장일 것이다. 라캉이 자신의 저서 <에크리>에 적은 바를 참조하자면, 오히려 강인한 육체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


 영웅의 심리와는 반대로 방관자들이 애써 찾으려고 하는 안락의 정서는 양심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이 행동은 '외면'이다. 양심의 거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책이라 할만한 것을 내어 놓을 수 없다는 무지에 기인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불행을 견딜 수 없는 정신적 무기력이다. 그런데 죄의식이나 연민을 갖는 것도 두 가지 양태로서 존속한다. 하나는 상상적으로만 성립되는 반면 나머지는 실제적인 경험을 토대로만 형성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연민이나 죄책감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은 생각만으로 타자가 겪고 있는 실존적 불행에 자기 자신을 가져다 놓는다. 그를 통해 외재적인 것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내사한다. 그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불행에도 노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이 마치 자기 자신의 일인 것처럼 경험한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그냥 일어난다. -주체의 자리바꿈이 왜 일어나는가?- 그런 사람은 항상 불쾌함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이런 감정들을 마음속으로 절실히 느낀다면 그 사람은 과도한 회의로 인한 체념에 순식간에 사로잡혀 버릴지도 모를 운명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채로 신념이라는 것을 갖는데, '그것이 옳으니 그냥 행한다' 정도의 아주 간결한 믿음으로 행동한다. 이는 심지어 허무와 가까운 정서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딱히 보상이라고 할만한 것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욕망하지를 않는다. 어떤 영화의 문구가 이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머리에 난 커다란 구멍에서 뇌수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믿으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것을 상상한다. 그래서 루소에게 행복하고 정의로운 사회란 불행들을 최대한 근절한 세상이다. 상상만으로도 불행해질 수 있는 사람에겐 그것은 신념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순수' 또는 '진정성'인 연민이라고 칭한다.


 반면 이 연민이나 죄책감이란 감정을 품게 되는 다른 요인은 외상이다. 우리가 친절한 사람을 마주할 때, 그 친절함이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인지 아니면 오롯이 타자를 위한 일인 지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 친절을 행하는 경우가 외상의 현전으로, 나르시시즘적 욕구로 전개되는 심적 양상을 감추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사회적 지위인 '명예로움'과 관련된 한에서 타인을 돕는 즉슨, 주체는 선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타자의 인정을 향유한다. 이 경우에 그런 감정들은 경험론적인 차원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주체의 역사성에 의해 유발되는 의존적인 성향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불행을 타자가 겪을 시에만 반응하게 된다. 타인을 위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자기 연민'이다. 이는 은유적 방식으로 주관적인 감정을 대상으로 이입하는 투사 작용으로, 여기서 긍정적이라 할만한 예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불편한 몸을 갖고 있다거나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을 때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희망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그러나 그런 긍정성과의 마주침은 존재론적인 것과는 무관한 인식론적인 토대를 마련할 뿐이다. 주체는 계속해서 무기력하다.

 

 "인간이 죄의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 왔다는 것에 있어서만 그렇다"는 라캉의 유명한 통찰에 의거한다면, '욕망의 포기'란 죄의식을 거부하려는 상태와도 연관이 깊다. 욕망을 관둔다는 건 우리가 수치심을 가짐으로 해서 통제적인 열망을 고취하려는 것인즉, 우리는 스스로 심기가 불편해지는 짓을 자의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간단하게 '자유'를 정의하자면 그것은 욕망의 충족된 상태이다. 인간이 '자유를 열망하는 존재'라는 지칭에 빗대면, 죄책감을 갖는다는 건 자유를 배반하는 행동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죄의식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말하고 있는 거울 이미지로서의 자아인 '타자화된 주체'의 지위에서는 이것조차도 자유의 억제가 아닌 자유로의 이행이 된다. 즉 그 자리에서만 진심으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현재의 모든 포퓰리즘적인 정치적 의제들의 경우 대개 외상의 징후로 포착된다. 아주 순수하게 선의를 외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지만, '순수한'이라는 수식어는 여전히 어색할 따름이다. 아마 이것을 구분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하나 싶으며 더군다나 정신분석에서 급진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삶 전체가 트라우마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어른이 되면 될수록 세상살이에 더 겁을 먹게 된다는 말이 있던데,  경험이 풍부해짐은 트라우마라는 것도 늘어날 가능성이 농후하니 어느 정도 합당한 말일 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말이 정당하다면 진정한 '선의'를 기대하기란 꽤 어려운 일일 것이다. 참고로 이런 논의들은 내가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을 관찰한 내용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쯤 되니 드는 생각은 폭력적인 모든 일을 행하는 자들이 이 내사적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고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것이 충분히 머리에서 일어난다면 죄의식을 가질만한 일을 결코 할 수 없다. '지금 당신이 욕을 퍼붓고 있는 사람이 곧 당신이다'라는 사랑에의 호소는 '삶은 소중한 것이니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 정도의 교설과 같은 성급한 주장이 아니다. 특히 폭력적인 성향이 아주 어린 시절에 더욱 표출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까지 말해준다. 물론, 여기서 갖은 폭력들도 각각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남겨 두어야하는데, 인간은 히스테리적인 것이나 구조적인 억압에 의해 충분히 폭력적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내적인 무언가의 결함에 대해서 말할 수 있으며, 그 결함이 없이 충만하다면 자기파괴적 성향은 오롯이 자기 자신에게만 향할 것이다. '자살'은 그 사람이 선한 자일 수도 있다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도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얼마나 미안해 할 수 있는가? 지금 지구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바이러스 때문에 안 그래도 안녕하지 못한 상황과 더불어 최근에 터진 몇몇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보며 다시 인간성에 대한 추문이 떠올라 글을 적게 되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의 원인이 된 주인공들은 왜 사과를 하지 않을까? 사회적으로 사과를 하는 순간이란 자신의 죄목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법이란 법을 어길 시에 받게 될 처벌에 대한 주관적인 동의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만 강조되고 책임 개념은 흐릿해지는 시대라서 그런지 몇몇 문제적인 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방해할만한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로써 방종과 자유의 경계는 불분명해졌다. 아주 오래전에 든 생각인데, '책임'이란 개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사례는 일본 전국 시대의 사무라이의 '할복자살'이라 생각한다. 사무라이들은 자신의 소명과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시에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 해서 명예를 지켰고 죗값을 치렀다. 목숨보다도 이름값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였을 수도 있겠으나, 그들에 대한 개략적인 진실이란 누구보다도 '책임'에 대해 절실히 이해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그런 문화가 미개하다는 평도 다수지만, 그들에게 '책임을 진다'라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인류사의 근저에 깔려 있는 가치 개념과도 연관이 된다. 즉 여기서 책임이란 '가치 있게' 여겨지는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희생정신'과도 닮아 있지 않는가?


 여담으로 니체에 대해 말하자면, 니체는 예수를 비판하며 그를 타인에게 사랑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애정-결핍증 환자 정도로 보고 있었다. 애정 결핍은 분명 외상적이다. 그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보면 니체 또한 예수가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사후 세계'라는 영원히 불가해한 관념을 끌어오지 않았을 뿐이지, 결국 사랑에의 호소나 연민이 존재한다는 믿음으로 그리고 동정의 시선으로 타자의 이질성을 해소하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세계 최고의 지성이라는 수식어를 얻은 캐나다의 한 학자는 니체의 명구를 전파하는 강연가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도 니체처럼 연단 위에서 인간애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해 호소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사랑이니 인류애니 하는 것들은 그 연단 위에서만 잠시 드러났다가 금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추상적 개념을 믿는 건 좋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사람들을 싫어하지만, 인류애는 믿는다' 그는 어딘가 모르게 아인슈타인이 한 저 말과 닮아 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칼 융과 니체를 동시에 피력할 수 있는 지를 모르겠다. 또 하나 덧붙이기를, 마이클 서스펜스는 자신의 저서 <도덕의 궤적>에서 상상력이 풍부한 자들이 더 도덕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데, 세상이 '상상력'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학문을 도외시한다는 건 참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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