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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l 01. 2020

허무에 대한 농담

인생이란 왜 허무한가?

 리처드 도킨슨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주장하는 바를 한 번은 들어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도킨슨의 주장은 개체로서의 인간이 유전자의 숙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주인은 통상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도 왕왕 사용되는 '나 자신'이라는 표현이 아닌, 즉 '유전자'이다. 그는 이 저서를 통해 이기적인 존재가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다. 실상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라는 규정은 자본주의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가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때 경제적 합리성이 최대에 도달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더욱 널리 이해되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우리는 정치적이거나 또는 경제적인 이슈에서 범법 행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자들을 보면서, 우리의 이기심을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써 공적 영역에 대한 규정이 불분명해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이기적 성향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는 얼마나 이타적일 수 있는가? 인간이 이타적인 존재라는 규정은 이기심에 관한 규정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런데 도킨슨이 저서에서 밝힌 그 까닭이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서 이타적이라고 한다. 생각컨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딱히 이유가 없다. 그냥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다수가 알고 있으며 여기에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은 극히 드문 편이다. 하지만 진화생물학에서는 이것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내리사랑이 자신의 유전자를 보전한다는 이기적인 목적 아래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사안이라는 것이 저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인간은 역시나 이기적인 존재이다.


 이 과학적 공상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무엇을 믿느냐는 항상 중요한 문제다. 실제로 지인과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경우엔 엄청난 지식을 머리에 쌓아 놓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직관적으로 도킨슨의 말이 옳다고 나에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에 어리둥절한 속내를 감추고 말았지만, 사실 이 믿음이 흥미로운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다. 책의 서문에도 적혀 있는데 직언하자면, 도킨슨의 주장으로 인해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유전자가 나의 주인이며 나는 숙주에 불과하다는 사실로 인해 인생은 덧없고 허무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점은 인간은 허무함을 꽤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이 허무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학문이 철학이라면 철학은 무용한 학문인가? 만약 허무란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인 것에 불과하며, 이것을 체현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면 철학은 도외시되어 마땅한 학문으로 치부될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에서 말하고자 하는 '허무'란 진리란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외부의 진리'란 당신은 태어나면서 언어를 배움에 따라 상징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동시에 욕망하는 방법을 배운다. 당신은 주체적으로 욕망하고 있다고 절실하게 믿고 있을 진 모르겠으나, 그것은 살아가면서 배워온 욕망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외부적으로 소요되는 현상에 대해 주지하며 그 학습된 것들을 재현해내는 '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를 참조점으로 삼아 도킨슨의 주장과 비견한다면, 마찬가지로 당신은 결코 스스로를 주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진실되게 욕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모른 채 살아간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즐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욕망의 아래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는 그것들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요구한다. 이 정식에서 욕망이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의심의 지점에서만이 어떤 대상에게 '이것은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었다'라고 의미를 선언한다. 그러나 이 연역의 과정에서 자연스레 겪게 되는 극심한 고통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이 곧 '허무'이다. 인간이 항상 주체의 수준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의식하고자 하되, 이 사유에서는 일부러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으려는 일종의 공회전이 발생한다. 그러나 욕망하는 방법을 배운 자들에게 있어 욕망이란 비-본래적일테지만, 그것이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결코 그것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것이 '허무'이다. 회의에 관한 방법적 사유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원하지 않기를 시작하자마자 느끼는 고통을 피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이 감정을 피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방법은 있다.


 앞서 도킨슨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해서 얻게 된 허무와 철학사에서 왕왕 등장하는 데카르트라는 거장을 통해 종용되는 허무가 같은 것인 지는 모르겠다. '허무'라는 동일한 표현을 사용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고 있긴 하되, 각기 다른 분야에서 쓰이는 이 표현으로 인해 중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언어를 의심할 순 없으나 언어가 가진 의미 내지 의도 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사실 이 논의를 더 진척시키기 어려운 이유는 나 스스로 딱히 유전자가 나의 주인이라는 것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무엇이 진실인 지를 따지는 것도 무의미하다. 이미 이 담론은 인간의 인식 수준을 벗어나 있는 아무런 진전도 내어 놓지 못하는 물음이다. 과학적 탐구 방법이 관찰 가능한 영역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이미 유전자가 '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는 의인화된 전제부터가 실수이지 않은가. 이것이 단순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라 손 치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엄밀하지 못하다. -의식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여기서 명확한 것은 2가지이다. 하나는 인간은 어떤 무언가를 믿으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왜 무엇을 믿고자 하는가? 무언가를 믿는다는 건 허무감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반작용적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나 자신 또는 어떤 대상을 의심하고 있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믿기 위한 새로운 근거를 마련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었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회의를 거둘 수 없으며 또한 나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계속 반복하는 그 '열정'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머지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생을 살아내는 인간에게 있어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꽤 괴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해괴하고도 외설적인 논의를 해보자. 우리가 자식을 놓기 위해서-생물학적으로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반드시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행위가 있다. 그것은 '섹스'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해야만이 자식을 낳을 수 있다. 남녀 간에 몸을 뒤섞은 후 정자가 난자에 도달하고, 난자가 자궁 안에 착상한 후에 10개월이라는 시간을 품어야만이 유전자를 계승할 수 있다. 그런데 성관계의 목적이 자식을 낳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자식을 낳으려는 유전자의 위대한 목적을 수행하기보단 오히려 단순하게 쾌락에 빠져들기를 원해서 이성을 만나고자 한다. 여기서의 목적은 오롯이 쾌락 뿐이다. 호르몬이 폭발하는 그 생생한 느낌에 전도되기 위해 우리는 섹스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비틀어서 생각컨데, 만약 섹스를 할 때에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원할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야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것을 멀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인류를 비롯한 모든 종이 사라져 버릴 위기에 처할 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유전자가 인간의 몸을 숙주로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 합당할 수도 있다. 실재적 억압으로서의 '쾌락'이란 유전자가 숙주를 통제하기 위해 고안해 낸 황홀한 체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원치 않음에도 자식을 낳게 되는 경우도 있다. 쾌락의 효과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다.


 실재로서의 '쾌락'에 대해 말하는 학문은 역시나 또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즉 성적인 욕망은 사람들이 쾌락이라는 것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충동이 현현하는지에 대해 말한다면, 요즘 들어서는 호르몬 결핍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인간은 지적인 인격체이며 항상 사유하는 존재인 법인데, 그 사유에 힘입어 인간은 항상 고통스러움을 체험한다. 그러나 충동의 자리로 환원되는 것은 인간이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이다. 우리가 화를 낸다거나 우울해 마지않을 때조차 그것을 인지하긴 하되, 결코 그만둘 수 없다. 그만두기는커녕 마치 이것에 항상 조종당하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으며 그에 따라 우발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허무라는 부정성 또한 이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으나 결코 의식적으로 통제하지는 못한다. 이런 무의식적인 성향에 있어 순간적으로 호르몬이 폭발하는 체험을 한다는 건 꽤 의미가 깊다. 생리적 화학적 메커니즘이 그것을 원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허무한 삶의 자극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체험하고자 하는 충동은 우리 몸에 도파민이 결여되어 있다는 징후 정도이다. 요컨대, 인간은 절대적으로 이 메커니즘에 종속돼 있지만 이 충동이 무의식적으로 소여되는 이유는 그들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실제로 도파민의 결여로 인해 발생하는 증상은 무기력증이다.


 대게 성적인 충동에 쉽게 빠지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그들이 사변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종종 갖는다. 언제나 성에 관련된 이야기나 외설적인 것들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너무나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대체로 그것에 그치고 말며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그런 사람들에겐 어떤 추상적인 대화를 요구하기란 어렵다. 즉 정신적으로 유희하질 못한다. 몸속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은 학습과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반대로 이것이 분비되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을 하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 없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어떤가? 이것을 뒤집으면, 사변적이고 정신적이고 창의적인 사고 활동이 도파민을 분비시킨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또한 각성을 돕는 도파민은 인간이 창작 활동을 할 때에 느낄 수 있는 유희적 감정을 대변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 활동을 그만둘 수 없게끔 만든다. 니체가 '창조적 유희'라고 칭했던 이상적 인간상에서 '유희'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도파민이라면 '창조'를 담당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건 사실이 아닌 나의 희망사항이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수면을 요구한다. 우리는 하루에 최소 5시간은 자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피로감의 축적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휴식을 반드시 취해주어야만 하는 존재로서, 어느 누구나 자족감에서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과 허무한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가령, 자기 입으로 '나는 만족해!'라고 말하면서도 공허에 관한 징후가 관찰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컨데, 인간이 만약에 정신적으로 충분히 유희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허무할 리가 없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슨은 즐거웠을 것이다. 그의 주장의 시비를 따지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가 절망에 빠져 있지도 않은 자신을 절망으로 이끄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 이유는 그 자신이 충분히 공상적이고 추상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진화론을 비롯한 과학적 사고의 중요성을 자신의 저서에 피력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터부시 되고 마는 개념들을 해괴한 것으로 치부하진 않았다. 이를 통해 니체는 '주인에의 의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는가? -목표를 가지세요!- 모든 부정성을 통과한 자들만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진언을 정초 삼으면, 허무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이란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발견하기 위한 도야의 과정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판단할 만한 이정표로서의 역할로 기능한 것이 허무에 대한 인지이다. 참고로 지젝은 이 사유를 혁명적 움직임을 위한 전초로 삼을 정도로 권장하고 있으니, 허무에 관한 논의는 생각보다도 더 심오한 문제이다.


 허무에 대해서만 농담 삼아 이야기를 해보려다 갑자기 쾌락에 대해 그리고 정신적 유희에 대해 의도하지 않게 말하게 되었는데, 참 어쩔 수 없는 놈인가 싶다. 글이 전개되는 양상이 의아할 진 모르겠으나 의식의 흐름대로 쓰다 보니 이렇게 써졌다. 항상 마음 속에 품고 사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스피노자의 명언으로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이다. 사과 나무나 심도록 합시다! 참고로 항상 어떤 주장이나 가치를 담기 보다는 사실 관계에 대한 진술에 집중하고자 한다.


 ps.  도킨슨이 이 저서를 쓴 때와 리투아니아 출신의 철학자 레비나스가 살았던 시대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에세이식 저서 <전체성과 무한>을 통해 관철한 주장이 나름 독창적인 사유라고 인정받은 철학자이다. 그의 생각을 간단히 축약하면, '존재의 이전'이다. 그는 철학자니 '유전자'가 아닌 '존재, 정신 (내지 기억)'이 계승된다는 것을 피력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마음 숙에 품고 기념하는 존재이다- 역시나 유전자니 아니면 정신이니 하는 기원에 대한 시비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영원성' 내지 '지속성'일 것이다. 이는 곧 어떤 개념이 얼마나 유효한 지에 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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