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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21. 2020

현실 원리와 형이상학적 주체

이데올로기적 주체와 이데올로기 이전의 주체

 사회를 간단히 축약하여 표현하자면 '인간의 군집'이다. 모든 개별자들의 합이 사회이다. 그리고 사회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대타자는 비-실재적이며 환영적이지만 이를 통해 개개인들의 합을 보고 '사회'라고 지칭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다. 사회 내부의 여하한 존재들은 역사와 문화와 같은 정신적인 것들의 향유를 계승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있다. 그러니 모든 윤리적인 담론들 마저도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염두한 주장이다. -당신 앞에 서 있는 실존적 타자가 당신의 존재를 규정짓는다- 또한 사회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불안정성과 더불어 그것을 가려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상상 그리고 인간 주체가 정신적은 것을 체현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체계에 복속하고 간섭하며 상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재귀적 성질을 따져볼 수밖에 없다.


 사회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논의는 아주 간단명료하게-누군가에겐 아주 진부한 논의겠지만- 인간이 선한지 아니면 악한지에 대한 단편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을 악한 존재라 단언하며, 선한 존재라는 주장에 대해 회의를 갖고 있는 듯하다. 일단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규정만큼 '척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어떤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선악을 구분 지을 수 없다. 나는 결정론에 힘을 싣고 있는 입장이지만 비유에 불과한 선악을 간단히 이해하면, 선이란 우리에게 쾌 내지 만족, 황홀경과 같은 정념들을 주는 것들이며 필히 이행해야만 하는 것이고 반대로 악이란 우리에게 불쾌하고도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에 필히 근절해야만 하는 것들이다. 선악은 상대적인 개념이고 비유적이다. 아마도 대다수는 살면서 극악무도한 범죄자나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론 매체를 통해 불미스러운 소식을 접하면서 불안해하고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품는다. 그렇다면 묻기를, 이 회의의 정서는 '악'인가? 반대로 도덕적인 신념을 갖고 실천적으로까지 선한 자들도 언론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은 대중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이 존경을 갖는 자들이 오히려 악이라면 악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이 양자의 선하거나 악한 자들 모두 직접적인 만남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회의와 존경 이 둘은 모두 불안이라는 정서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선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


 선악에 대한 논의는 '사회계약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계약론자들인 루소, 홉스, 로크 중에 누가 가장 옳은가? 사실 시비의 경중을 따지는 건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 인간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리바이어던'이라는 추상적 절대자를 상정하여 인간을 강압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홉스의 입장은 지금 이 시대의 법, 그리고 '이념'이 작동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반대로 인간은 연민과 동정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에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도우려는 선한 존재라는 루소의 지침은 간헐적이긴 하다만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환경에 의해 경험적으로 선과 악이 결정된다는 로크의 주장이 최대 다수에게 할당되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예외가 존재한다. 간혹 우리는 영웅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예로 오프라 윈프리 같은 사람들을 보면 그녀는 악인이 되어 마땅했다. 그녀의 삶을 보면 그녀는 악해져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겪은 모든 각박한 환경과 악재적 조건들을 극복하고 자본주의에서 추앙받으면서 신화적인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굉장히 드물다는 점이 로크의 경험론에 힘을 싣기도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환경 결정론을 부정한다. 이 주장들 모두 틀리지 않았다. 각 개별자들의 내재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판단 규정들을 욕망한다는 사실은 하나의 징후로 이해되어야 한다. 모든 것들은 징후적이다. 이 세 가지 모두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결정론적인 존재이다. 나에게 있어 영웅은 태어날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났으며 악인 또한 태어날 때부터 악인이었다.


 이것을 잠시 논외로 제쳐두고 현실로 눈길을 돌리면,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자본주의 내에선 이 '선'과 '악'이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시대에 이르러 모든 것들은 법치라는 기준에 의해 선과 악이 결정된다. 법 또한 최초의 도덕률을 근간으로 역사를 거슬러 피어올라 정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 누군가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누군가는 탐욕을 취하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법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는 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이를 통해 여하한 존재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기꺼이 받들었다.


 이것이 아무리 문제가 많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수정할 순 있겠지만, 이 자체는 마땅히 지켜져야 한다는 의무적 책임을 지고 있다. 이것이 이념이 작동하는 근간이다. 그리고 언제나 이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은 위반적인 행동들이다. 특히 자본주의 시대에 법보다 더 우상시되는 표현으로 '돈이 최고'라던가, '돈으로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됨에 따라 모든 이들은 부자가 되기를 희망하기에 이르렀다. 돈이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순수하고도 순진무구한 정언이 자본주의의 반대급부에 놓여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돈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부인할 수 있게 될 지라도 살아가면서 불가피한 불행을 제거시키고 불편함을 해소해 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다. 이를 지탱하는 개념인 '자유시장'만큼 이 시대를 풍요롭게 만든 개념은 없다는 것이 합리론자의 입장이다. 그러나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의 과도화된 리비도적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는 주관적인 고통을 감내한 정도에 편승해 있는 것이다.


 문제라 지적한 부분에서 '돈'과 관련된 문제들도 막중하긴 하되 근본적인 문제는 '능력'의 차이이다. 자본주의에서 어떤 진보적이거나 급진적인 좌파적 논의가 성립하기 어렵다. 그 까닭은 자본주의의 이념이 현상학적 개인을 찬양하며 극단적이고 무제약적인 자유를 숭상하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중축에서 이를 지탱하는 전제는 노력을 통한 합당한 성취와 마땅한 보상이 바로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충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어떤 신념이라고 하기엔 부족하기만 하다. 이 자유로의 이행 덕에 노력한 만큼 가져간다는 원칙은 언제나 성공한다. 이 원칙은 승자 독식의 과도한 향유를 지탱하면서 우선적으로 작동한다. 왜냐하면 패자조차도 이 원칙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서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이고 재능을 타고난 사람, 더해서 배움에 뜻을 두어 미래에 대한 혜안을 두루 갖출 수 있는 사람, 위험천만한 것들 조차 가볍게 뛰어넘을 기지와 대담한 용기를 가진 사람, 그리고 돈이 많아 위험부담이 적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고로 자본주의의 은밀한 근간은 능력주의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숭고함을 '돈'이라는 실재적인 것에 부여하기보단, 근본적으로 '숭고'의 의미를 부여받은 것은 인간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 연원은 당연지사 '노력'이다. 그리고 결코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가 전인류에 걸쳐 끊임없이 숭상돼 왔으며, 인간 역사에 있어 모든 지성인들과 위대한 자들 그리고 희생한 자들을 값지고 숭고하게 만들어주는 전적인 전제들이다.


 그래서 노력이란 무엇인가? 시간을 세분하게 절분하여 한 치의 오차적 낭비도 없이 최선을 다하며 남들이 자는 시간에도 눈을 뜨고 있어야만 하는 근면성실함인가? 자신의 욕망을 끝없는 염려로 유예시키기보단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대담함인가? 어떤 고난과 역경이 나를 덮쳐와도 꿋꿋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버텨낼 수 있는 내적인 근력인가? 스스로도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이상을 향해 정진하는 고고한 발걸음인가? 방금 노력에 대해 주절거린 말들은 자기계발서에 나올법한 내용 정도가 될 터이다. 그러나 이를 뒤로하고 더 간단하고 본질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정의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노력한다'는 '고통을 감내한다'와 동의어이다. 노력할 수 있는 자들은 고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육체와 정신을 타고난 것이다.


 어릴 때 지독하게 책을 읽지 않다가 20살이 넘어서 자기계발서를 처음 읽었었다. 철학 서적을 읽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하도 자기계발서에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대서 호기심이 생겨서였다. 그렇게 책을 읽고 살다가 20대 중반이 되니 '니체'의 이름이 시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니체가 요구되는 시대에 니체가 대중들을 떠받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고통을 감내하는 태도가 사람들에게 필요해졌음을 의미한다. 현시대에 의지적 표현을 중축으로 삼아 희망을 예찬하고 미래를 개진하는 기투적 행위를 통해 니체의 소비자들은 도취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사회 내에서 욕망의 진취성은 모든 것들은 충분히 가능하며 또 그래야 한다는 당위적인 믿음을 형성하지만, 이것은 도착적이다. 희소성을 따르는 시장의 냉담한 논리는 우월하지 않거나 쓸모없는 것들의 자리를 배정해 놓지 않았다. 이 축소된 자리를 넓히고자 하는 경제적 정책들은 무능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인간에게 있어 우월함에 대한 동경은 비-의지적이지만 대중들을 열광하게 만드는 유희거리로 탁월하게 기능한다. 또한 소비자에게 있어 효용을 주지 못하는 쓸 모 없는 것들은 자연스레 시장에서 퇴출된다. 이런 취지에서 시장 논리는 언제나 발전과 혁신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하는 주체의 모든 상상적인 것들은 단죄를 면치 못한다. 여기서 죄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던 모든 분투로 인해 자기 자신이 언제나 부족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나가가게끔 이끌며, 그 자리와 미분화된 주체에겐 어떤 죄책감도 결코 용납되어선 안 된다. 라캉의 위대한 통찰로 "사람들이 죄책감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욕망과 관련해 그것을 포기해 왔다는 것"이다. -요즘은 사과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반면 다행히도(?) 상상적인 폐기를 담담하게 받아들인 자들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이상에 대한 동경을 갖는다. 영화 <기생충>에서 지하 방공호에 살던 '근세'는 피가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등 스위치를 켜기 위해 이마를 찍으면서 '박사장 respect!'을 연신 외친다. 키에르케고르의 말마따나 '동경은 행복한 포기다' -반면에 기택이 박사장을 어떻게 했더라?-


 대한민국에 사는 20대들과 지금 이 순간에도 학업에 전념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있어 만큼, 이런 태도는 꽤 익숙할 것이다. 굳이 나잇대를 한정하지 않아도 이 부정성은 인생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니체에겐 이 부정성을 감내하는 것이 '생애의 의지'였으며, 그의 사상은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고통이요'라는 저 말에서 출발했다. '노력'에 의해 발생하는 모든 정신적 차원에서의 문제를 축약해서 느낄만한 예시를 들어보자.


 학창 시절에 내가 자는 시간에 내 앞에 있는 친구가 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한다면 당연히 나의 등수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모님은 나의 등수를 보고 실망하실지도 모른다. 더해서 나는 나의 친구보다 뒤처짐에 따라 나의 자존을 비롯한 미래에 내가 혹여나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를 성취를 보증할 수 없게 된다. 이 모종의 불안감은 나를 더더욱 책상 앞에 앉히고 졸린 눈을 감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친구가 아니꼽게 여겨졌다. 괜히 친구가 집중하여 책을 읽고 있을 때 장난 삼아 샤프심을 친구의 머리로 던진다. 샤프심은 정확하게 친구의 머리카락 사이에 박혔지만 얼마나 집중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글자를 따라 눈알을 굴린다. 그러자 갑자기 비겁한 상상이 떠오른다. 친구가 열심히 필기해 놓은 노트를 몰래 숨기거나 버리는 치졸한 행위를 하고 싶어 졌다. 그러면 친구는 공부를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나는 노력에 비해 더 괜찮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비열한 생각들이 샘솟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게 된다. 나의 비열함을 멈추게 만든 것은 그건 결코 긍정될 수 없을 것이라는 양심의 발로였다. 이 행위는 반드시 불공정하다는 판결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과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들키기라도 하면 나는 친구들에게 몰매를 맞을 것이 뻔했다. 나는 나를 책망했다. 그리고 다시 노력하기 시작했다. -실패의 꾸러미-


 이 판결은 무엇을 정당하게 만드는가? 앞서 계속 말하고 있는 '노력'한 자가 합당한 보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지란 내가 실패할 것이라는 염려에 대한 보충물이다. 이 의지가 나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만큼 나는 불만족함에 시달린다. 내가 노력하고 있는 무언가들은 모든 회의의 근간과 어우러져 과거의 잔여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인간의 의지는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죄의식을 갖게 만드는 잔해들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책임은 나의 문제다. 모든 것들은 개인의 자책감은 사회 전반에 깊숙이 파고든 회의적 태도와 영합한다. -세상이요? 사회요? 절대 안 바뀌죠!- 사실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금세 파악 가능한 것은 세상은 언제나 바뀌어 왔다는 것과 진실된 것은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관철되는 징후들이다. 그것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 생각조차도 징후적이다. 요컨대, 변화무쌍한 세상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 확신에 찬 어조의 배후에 놓인 심적 태도는 자책이다. 이런 측면에서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욕망의 좌절을 맞이했다고 규정한 자들은 언제나 억압되어 있다. 그들은 다시 억압에 맞서기 위해 다시 의지를 치켜세운다. 현재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의지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니체적 공상을 적극적으로 수긍하며 자기 자신을 바꾸고자 한다. 이 낙관적인 태도는 합당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에겐 의지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암울한 철학자의 말이 진실이라면 의지와 관련된 모든 교의적인 말은 상투적이고 참견적인 폭력으로 전락한다. 여담으로 쇼펜하우어가 명성을 얻지 못했더라면 그가 이 논의를 진전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연유로 인해 우리는 결코 '정치적'이게 될 수 없다. 능력주의 사회 내에서 모든 것들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의 탓으로 돌려진다. 여기서는 라캉적 행위, 즉 상징을 다시 세우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이 작은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억압을 사회라는 거대한 장으로 확장시켜 바라본다고 한들, 별다른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간혹 벌어지거나 아니면 때때로 또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식으로 '정도'의 차이를 반영한다는 것은 각자가 간직하고 있다는 주관적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것과는 무관하게 모든 상징적 존재의 주관적인 느낌은 언제나 '노력하라'는 정언에 맞추어 살게 된다. 어떤 목표를 세우든 계획을 갖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해당된다. 그러나 이를 충족하지 못하게 될 때엔 어떻게 되는가? 다시 말해 '고통을 감내하라'는 정언을 따르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도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주체는 소외된다. 이 소외는 합당하다. 반복컨대, 왜냐하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합당해지며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자의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욕망의 기로에서 거세된 흔적인 후회는 주체의 통시적 관점 내부에서 임계치를 넘기게 되고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적개심으로 환원된다. 타인에 대한 적개심은 공공연한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적개심은 합리화되어 있기 때문에 광인이 된 자들에게는 반성적 사고를 기대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충동적이고 과격한 행위를 그만둘 수 없다. 적개심은 자신을 파괴시키거나 타인을 파멸로 이끌 뿐이다. 대중들은 이것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낙오자들을 보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당신도 얼마든지 악해질 수 있다.


 모든 문제들은 복합적이다. 잠시 제쳐두었던 사회계약론자들인 루소, 로크, 홉스가 주장한 박 각기 다르긴 하되 시비를 따지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는 현실 자체가 복합적인 것들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각기 달라 보이는 주장이 동시적으로 이해되는 곳이 현실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 미묘한 마찰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재귀적 주체의 선호도와 존재론적 토대를 밝혀주는 징후가 된다. 그래서 이 이해가 왜 필요한가?


 각각의 사회계약론자들은 사회란 것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에 대한 그' 최초'를 말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어떤 지에 대해 규정하고 난 뒤에 구성 방식을 주장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을 양분 삼아 모든 사회의 문제는 인간 본성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규정하고 난 뒤에 비로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특히, '노력', 즉 '고통을 감내하는' 태도의 숭고함으로 인해 진리의 실재적 차원이 드러난다고 말해주는 학문이 정신분석이다. '노력'하는 일이 언제나 중요했지만 지금만큼이나 노력이 강조되고 또 강요되는 시대는 없었을 거라 조심스레 확언하는 바이다. 특히 자본주의 내에서의 모든 주체들은 소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나 앞서 '노력'의 정의가 '고통'이라는 것은 정신분석에서의 모든 이들은 잠재적으로 정신병자이거나 잠재적으로 범죄자이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폭도가 될 수 있다는 급진적 표현을 방증한다. 그나마 다행인 경우가 불행하게도 자살이다. -왜 편하게 책상 앞에서 공부만 하던 학생이 자살을 하죠?-


 승패와 우열이 결정되는 공적 영역 내부의 비일관성이 발생하는 연유는 '승패와 우열'이라는 표현 자체를 함양하는 '상대적 차이' 때문이다. 나보다 더 뛰어난 자가 있다면 자연스레 우열이 결정될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현실에서 비일비재하다. 특히 모두가 노력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능력, 재능, 자질 또는 노력의 부족으로 인해 자연스레 소외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승자가 된 자들은 어떤가? 노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가? 그들조차도 당연히 구조적으로 억압되어 있다. 노력에 등가적인 고통 그리고 이 고통에 등가적인 보상성이라는 심리적 개념은 시장 경제 내에서 소비를 통한 '만족'이라는 정서와 욕망의 충족을 통한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내포한다. 그들은 구조적 억압 속에서 인정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스스로 자신이 가치가 충만한 존재라고 여긴다. 구조 내에서 그들은 권리를 취득했다. 거기에다가 그 정당한 권리에 따라 노력하지 않는 자들을 가학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함양하며 그들을 발판 삼아 한 번 더 자신의 가치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들도 광인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이고 합리화된 징후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이 오만의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는 사실인즉, 증오와 혐오의 발언이 소외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더 문제적인 것은 스스로 억압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을 텐데, 그 까닭은 그것이 자기의 충만한 가치감에 모욕을 더하는 자기부정적 양태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결코 내려놓을 생각도 역시나 갖지 못한다. 고통이란 항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주관에 편승해 있다. 우리는 성취한 사람이 얼마만큼의 고통을 감내했는 지를 결코 알 방법이 없지만, 그들의 성취가 외상의 잔해들을 극복해 낸 결과인 만큼 그 억압은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결국, 여기서 소외된 자들의 부정성과 연대하라는 지젝의 요청이 실현되지 못한다. 부정성과의 연대는 양심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런 사람들만큼 무지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순수한 주관을 갖지 못해 항상 상대적이며, 열등감에 가득 찬 자들은 없다. 그들이 입에 올리는 비판은 이데올로기의 담지자로서 그것을 단순히 모방적으로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누구나 착취자가 되려고 한다. 마르크스가 역사를 억압자와 피억압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무한한 투쟁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은 합당하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방식인 성적으로 서열을 매기고 노력의 차이 여하에 따라 자신의 등급이 결정되는 시스템에 의해 야기되는 사안은 이미 인간은 '상대적 차이' 내에 존속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여기서 말하는 '차이' 개념은 초월론적 관점에서의 주체를 의미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주체가 자기 자신을 거듭하고자 하는 의지가 공동체 내에서 상대적 차이로 자연스럽게 이행하긴 한다만, 엄밀한 의미의 주체성을 구현하지는 못한다. 또한 이미 이해하고 있듯이 경쟁 자체는 비교를 전제로 삼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주체를 자연스레 교착 상태로 빠뜨린다. 반복되는 충동의 현현은 상징적 질서가 내재적으로 비일관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비일관성은 주체 내부의 정념의 구조화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작업물을 통해 홉스마냥 추상적인 절대자의 힘을 강화시키거나, 루소마냥 순진하게 인간의 선한 마음이 보편적이라는 주장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집중하는 건 계속 주지해 왔던 '상대적 차이'란 것이 왜 현현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여기에서의 로크는 지엽적이지만 중요한 부분을 할당받는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과학이 지배적인 위치에 오름에 따라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들을 모색한 것과 연관될 수 있다. 가령, '항상성'이나 '호르몬' 같은 개념들이 언제 등장했는지는 나의 게으름이 아직 알아내진 못했지만, 21세기에 우리는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 육체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더 주도면밀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기계론적 인간관에서 말하는 화학적 메커니즘의 생리적 현상이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보다도 '노동'이 강조되고 있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에 한 번 더 '정신'이란 것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요청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어떤 고통에 대해 상기할 때 신체 부위에 상처를 입어 생채기에서 화끈거리는 통증 따위를 연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노동은 육체와 관련된 가시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노동을 의미한다. 고통이란 '정신적인 것'이다. 지적 생산물의 가치적 생산이 강조되는 시대에 이르러 정신의 명확한 현존과 그로 인한 문제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아마 철학에 대해 조예가 있다면 방금 문단에서 '데카르트'라는 인물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과학이 지식에서의 절대적 우위를 차지함에 따라 가장 획기적이면서도 낡은 개념들이 터부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정신이나 마음 또는 영혼과 같은 개념들에 대한 상충하는 관념들을 자연스레 내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조차도 인간의 선의에 기초해 있으며 영혼의 덕목이다. (대게의 경우, 총칭 사이비를 믿는 광신도들이 사회에서 만들어 낸 분란을 혐오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해괴한 개념들을 입에 달고 다니며 사람들을 현혹한다.) 그리고 아직까지 육체적 정동과 정신적 역동의 사이에서 인간 존재를 이해되지 않은 채 놓여 있다. 또한 '상대적 차이'란 이미 외부적으로 존속해 있는 '실재'이지만 그것은 내부에서 연원하고 있다. 실재로서의 '상대적 차이'는 개별적 존재들의 양적이고 질적인 차이로 인한 불균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철학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며, 그 생각의 결과인 정념의 공명을 갖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천적으로 이행되어 현전하는 지를 알고자 함이다. 이 체계에 대해 논하는 것만큼 객관적인 것은 없을 것이며, 더군다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묻혀버린 담론이다. 데카르트의 망령을 통해 정신과 육체가 '상호작용'한다는 개념에 착안한 사유이지만, '정신'이라는 실체가 있어 육체와 교섭한다는 주장을 하면 해괴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직관적인 논리적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수긍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다. 가령, 우리는 항상 어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고 그 생각에 의해 화학적 메커니즘이 변하며 또 그 변화에 맞추어 정신적인 문제를 함양하는 식이다. 이 생각은 대략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생물학적으로 사람마다 행복감을 주는 호르몬-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등-이 나오는 한계치가 정해져 있으며 각기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태어날 때부터 행복감을 느끼는 정도가 정해져 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조던 피터슨'이라는 강연으로도 저명한 캐나다인 학자가 자신의 저서에서 세르토닌이 많이 분출되는 가재가 적게 나오는 가재보다 짝짓기 경쟁에서 우위를 보인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이 논의를 토대로 그는 심리학자답게 누구라도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함양하고 자신감 있게 행동하면 호르몬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인격체인 인간에게 있어 이 말은 합당하다. 믿음은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 꽤 중요한 일이다. 믿음의 효과는 존재한다. 그러나 관련 영상에서 그 말을 하는 걸 보면서 나의 망상일지도 모르겠으나 어물쩡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망설이는 듯했고 확신하지 못했을 때만 던지는 시선 처리가 포착됐다. 그의 말에 박력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니체 이상이 되질 못하며 보상성이란 개념에 철두철미하게 종속되어 있다는 편견이 생긴 이후로 그가 부정성과 연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관철되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터 너무 맞는 말만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한 지 2년 후에 결정론에 대해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2년 년동안 내가 자의적으로 만든 망상적 결론을 믿으며 속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 낙담했고 허무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이것이 암울한 판결인 이유는 행복감을 주는 호르몬이 적게 나오기 때문에 '당신은 무능력한 사람입니다'라거나 '당신은 불행을 짊어질 운명입니다'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결론은 모든 가능성들에 비참한 낙인을 찍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인간성과 도덕 그리고 윤리 따위의 공허한 담론에 몰두했다. 또한 자기만족이란 것이 어떻게 하면 가능한 지에 대해서 물었다. 내가 내린 결론이 부정성의 극치에 귀결한다면 그것을 가려 감추는 질서에 대해 생각했다. 지젝의 말대로 윤리란 것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참을 수 없는 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로 유대를 맺을 수 있어야만 한다. 물론, 나에겐 도덕성조차 선천적이다. 더불어 그런 환영적인 것에 불과한 모든 비실재에 치중하지 않을 수 있는 지를 고찰했다. '영적인 인간'이라는 표현이나 '고독을 즐겨라'라는 말이 어떤 개체적 인간을 지칭하고 있는 지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진실이 가혹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지를 알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몇 년 동안 악착같이 고집스럽게 추종하는 이 사고가 편집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진료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에 아무런 조예도 관심도 없었으며 전혀 사변적이지 못했던 시절에 겪은 특이한 경험을 상기하며 사유를 개진하다 도출한 결론이라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평소보다 길게 글을 적은 이유는 후미에 적힌 내용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애매한 부분이 있다면 나의 필력이 부족하거나 의도적인 것이다. 항상 대화에 실패하기만 한 터라 외상을 겪고 있는 중이지만, 더 솔직하게는 가능성을 단죄할 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결론 때문이었다. 모든 이들이 잠재적이기를 희망하지만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될 터이다. 그러나 요즘 생각하기를 이것은 이미 징후이기도 하다. 모든 이들이 충만한 믿음과 풍부한 잠재성을 갖추고 있어 창조적인 유희를 누릴 수 있다면 가학적 성향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가학적 성향은 나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걸까? 자기만족이란 것이 가능하긴 한가? 대부분 적힌 글들은 불가능이 왜 불가능인 지를 이해하려고 하다가 펼쳐진 생각들이다. 당장 어제처럼 느껴지지만 벌써 수백일 전의 결심이다.


 이걸 한다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내 생각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건 나의 나태함이다. 나태함만큼 비참한 것은 없었으며 배우는 것을 게을리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불온함을 가져온다. 이 불온함이란 나의 소명이자 운명이라고 여겼던 현상학적 욕망을 무한히 유보시켜 놓은 것이다. 포기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울 따름이다.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감동시킬 의지적이고 독자적이며 선한 개인의 존재 유무이다. 희생적인 인간이 왜 희생적인 지를 어떻게 희생적일 수 있는 지를 묻는 건 불가해한 것으로 꽤 오랜 시간 동안 여전히 불가해한 채 남아 있다.


 ps. 그냥 써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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