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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21. 2020

침대 위의 항쟁자 - 프로쿠로스테스적 유희

돼지의 눈에 돼지만 보이는 이유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난다. 사자성어 중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는 말마따나 인간은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바로 옆의 사람에게 물들기 마련이다. 그것이 곧 존재적 발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주관이 어느 정도 성립된 이래로는 항시 이 주관을 충족시켜줄 만한 타자를 원한다. 간단히 말해, 편안하고 익숙한 사람들을 계속 찾게 되는 경향성이 그것이다. 물론, 너무나도 익숙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즉 주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모든 사회적 갈등의 중핵이라는 점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 본 적이 있는가? 초등학생 시절 만화로 읽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행했었다.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책은 화려한 그림체로 어린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지만, 너무 선정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림 작가를 바꾸었고 그 선택으로 인해 한 순간에 몰락의 길을 걸었던 전설적인(?) 책이다. 거기서 테세우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테세우스 총 12번의 여정을 감행했으며 그 중에서 마지막 여정에서 죽인 '프로쿠르스테스'라는 강도는 앞서 언급한 '주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을 이해시켜주는 일화이다. 간단히 요약하건대, 그 강도는 철제 침대에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다 눕히고서 그 침대보다 키가 크면 잘라서 죽이고 작으면 늘려서 죽이는 악질적인 인간이다.


 이 강도가 한 짓, 즉 신화적 일화가 함축하는 것이 인간 정신에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관계를 정초 짓고 있다. 세상 모든 이들의 이 성향은 너무나도 주관적이라는 문제를 떠맡고 있으며, 이것이 문제가 될 때 감정적으로는 '화'가 발생하고 행동으로는 '폭력, 전적으로 '가학성'이라고 부르는 심리적이고 행동적인 역동으로 이어지며, 현시대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반사회성의 전형으로 현현한다. 거기에 더해 인종차별과 더불어 국가적으로 행해지는 민족적 탄압까지 그리고 여기서 가장 문제인 것은 이 주관으로서의 미덕인 자기주장의 관철이나 피력 또한 과도하게 계상된 강압적 요청, 필요에의 요구, 과도하게는 전체주의로의 이행 등이 실재의 한 항으로써 유희적이라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이 주관이라는 것이 '타자'를 포섭하려 한다는 것을 '강도'라는 직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유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타자를 욕망할까?- 답은 간단하면서도 그렇지 못하다. 그 까닭은 인간 존재가 소외되어 있고 외롭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외로움'에 대해 정의하라 한다면 물음표를 머릿속에 가득 채우기만 할 뿐, 결코 -아직까지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외로움이 실존한다는 걸 우리는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발원하는 '인생무상'이 세계에 운명 지어진 인간에게 가장 극단적인 양상 중 하나이며, 영원히 불가해할 것이며 또한 이 불가항력적인 사태에 대해 애써 긍정을 종용해야 한다는 의지가 가장 '사실적'이며 '필수적'이라 부를만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난 뒤로, 모든 신경질적인 질문이 이것에서 발원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를 보면, 쇼펜하우어 이후의 니체는 하나의 필연이었다. 심지어 이에 따라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규정을 내포해야만 하는 의미로 이행해야만 한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나 자신에게조차 말하기를- 이는 비약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하길, 모든 사회적 문제는 소외된 자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리고 라캉은 '타자화된 주체', 즉 타자의 장에서 호명된 주체로 돌아가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래서 또다시 반사회적 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이 성향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유구한 전통을 가진 물음이라 할 수 있는 '주체의 운명이란 무엇인가?'라는 해괴한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왜냐하면 주체에게 주관적으로 주어진 표상이 주체의 응시에서 이해-불가능하고 무의미할수록 결국 좇게 되는 보상성이란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캉의 말마따나 무의식이 곧 타자이다. 철학적 주체인 '나'는 텅 빈 주체로써 주관적인 표상을 얻게 되지만 그것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나 자신에게서 항상 소외되어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는 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열렬히 추궁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이상화된 자기 자신을 열렬히 추구하게 된다. 모든 도취감은 현시대에 자신감이라는 표현으로 환원되어 있지만, 이것은 존재를 교착상태로 몰고 갈 뿐이다. 여기서 자족성이라는 것이 성립해야만 한다는 문제를 지니지만, 아마 그 자족성은 상징적 환상이라는 불명예에 기초해 있을 것이다. 반사회적 성향의 개인에게서는 이것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익숙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만족이란 절대적이지 않다. 인간은 항상 행복하지 못하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표현을 통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그래서 등장하는 원흉이 인간이 '완벽'이라는 관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주체란 항상 결여되어 있다.-


 의대에서 여전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듯이, 교육학에서 정언처럼 내려오는 '모든 이들에겐 잠재성이 있다'는 말을 충족시키는 것이 자족성을 구할 수 있으며, 존재를 '진정한 소외'로부터 구원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하게는 이를 통해 모든 문제적 사안들을 근절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에 이르게 됐지만, 인간사에서는 이 실패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외상적 징후는 언제나 타자를 욕망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문은 주변 지인들의 말들을 경험함으로써 더 견고해진다. 나의 친구들은 종종 말하길, 자신이 성공하면 강단에 서서 자신의 성공을 말하고자 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넘어서서 왜 하필 '강단'이라는 장소를 삶에서의 목표로 정해둔 것일까? 그들의 발화는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노라'라고 이 세상에 공표하며 존재적 선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것이 인간에게 유희로 이해되는 것은 공허함에 할당돼 있으며, 본연의 문제점이다. -끊임없이 독자적이고 고립된 노선을 선호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에서 급진적인 표현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범죄자이거나 정신병자이다. 더군다나-아직 예비적 단계의 의심에 머무르지만- 이곳에서 '계급'이 출몰한다.


 갑자기 왜 '만족'이나 '유희'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의문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를 보충하기 위해 다시 '프로쿠로스테스'의 일화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강도짓은 충분히 보편적이었으며, 우리가 말이 절상되었을 때 느끼는 모욕감도 이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보편성은 자기애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나 앞서 언급한 데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지만 이 사랑은 항상 불만족스럽다. 이 격정으로 인해 -이 신화의 내용처럼- 그가 '강도'였고 가학적이었으며 항상 자신의 주관을 끊임없이 주지시키려 애쓴다. 결정적으로는 주체가 주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양태와의 연관을 추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소외는 두 가지 사태로 읽힌다.  하나는 너무나도 자명하고 익숙한 진실로서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타자로부터의 소외이며, 나머지 하나는 아주 은밀하게 은폐된 채로 놓여 있지만 모호한 징후만을 드러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이다. 전자는 항시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되는 반면 후자의 경우 시대를 막론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진실이 가장 진실되게 드러나는 것은 숨어있을 때라던가?- 이것을 의뭉스럽기만 한 교조주의적 해석이라 비꼬아도 할 말이 없겠으며, 비판대에 올랐을 때 비판의 당사자에게 상충하는 관념들을 제거시켜달라고 요청할 생각도 더더욱 없다. 그러나 이 말을 수행하는 사람이 극소수일 따름일지라도 확연히 존재한다는 것만큼 명백한 사실은 또 없기에, 즉 니체의 이름을 몰라도 니체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그 의구심은 금세 제거된다.


 사실, 이 글은 조선의 역사에 관련된 영상을 보고 적게 되었다. 엄밀히는 영상에서 '조선'을 부정하는 댓글들을 심심치 않게 본 터라 적게 됐다. '계급 사회'는 이미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계급이 철폐되긴 했다만 문제는 명목적으로만 그것이 제거되었고 실질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계급사회에 살고 있다. 특히 댓글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구호를 연신 외치던데 그들의 심층 구조는 여러 전제를 충족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계급의 이동이 현재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노력의 숭고함을 믿고 따를 것이다. (나도 노력을 찬양하는 바이다!) 아니면 자신이 이미 자본주의 내에서의 수혜자로 군림하고 -그들이 어중간한 입지에 위치해 있다 하더라도- 있어 간사한 의도를 숨길 수 있는 똑똑한 사람이다. (음모론적이지만 이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둘 다 아니라면 무지한 사람일 확률이 높은데, 그들은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자신의 주장을 변론하고자 하기에 '그래서 그들은 무지하다'는 것에 방점이 찍히게 된다. 그들은 순종적이지만 맹목적이며 반-지성적이다.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생각한다. 괜히 힘만 빠지는 일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위에서 스스로 생각해도 굉장히 의아하게만 적어 놓긴 했는데, 나는 단순히 '계급'이란 것이 옛날부터 제도적으로 고착화되어 있어 계승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미친 건가?) 개인적으로 역사적 사료들을 보면 졸린 눈꺼풀을 참을 수 없는 게으른 인간이지만, 아주 간헐적으로나마 접한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서 느낀 건 시대를 막론하고 계급사회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계급의 분열'이 이미 인간의 내면적 차원에서 현전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최초의 분열'의 시발점이며, 최초의 계급화는 이미 예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이 글에서 계속 쓰고 있듯이 '계급'을 규정하는 건 규정하는 자에게 있어서 만큼은 유희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류라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체적이지 못한 자들만이 항상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상대적이고 비교적인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자가 아니라면 특권의식을 가지려고 하며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현자인 사람조차도 특권적이려 한다. -'석가의 눈에는 석가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은 충분히 합당하다-


 그렇다면 다시 이 운명적인 부름인, 자기 자신으로 살라는 애매모호한 정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현재에 이르러서 행복과 관련된 물음으로 변모해 있다. 이 말은 현시대에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고 자신이 하던 일을 잠시나마 멈추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해 준다. 물론, 여기에서도 빠지지 않고 가학성의 한 양태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평범함이 문제가 된 것이다. 언제부터 꿈이 없다는 사실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비참함의 이유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꿈이 없는 자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위에 적어 놓은 사유의 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자신은 다시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판결을 맞이한다. 사실 옹졸한 자들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라, 스스로 옹졸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항상 관계 상의 이율배반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라캉의 말마따나 '네가 공격하는 것은 너 자신이다'라는 사랑에의 해괴한 호소는 나에게 있어서 만큼은 진리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진부함이 천부적인 성향이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난 뒤로는 그냥 신경을 안 쓰기로 마음먹고는 '그런갑다'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가 보다'보다 무심함의 극치를 담아내는 표현이 있을까?- 


 사실 방금 적은 건 거짓말이고, 항상 남들에게 물어보고 싶긴 하다. 나 자신을 '타자화'시키는 지를 말이다. 자기 자신이 왜 그 말을 뱉었고 그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연유를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생경한 느낌에 전도되는 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 묻지 못하는 물음이 주체와 타자를 공존시키는 힘에 대한 의구심을 가중시킨다. 간단히 말해, '타자화된 주체'의 현현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담론을 통해 해결되는 것이 있을 진 여전히 의문이다. 라캉의 저서 <세미나>의 마지막 문장을 빌리면, '나는 관계의 부재야말로 말하는 이로 하여금 실재에 접근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 새로운 담화를 통해 그 관계를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참고로 나는 자유의지를 부정하진 않지만 결정론에 더 힘을 실어 놓았으며 항상 삼위일체의 환영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ps. 멍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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