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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08. 2020

'환상 가로지르기'의 두 가지 양상

방법론적 회의에서의 갈림길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선택들이란 앞선 선택들의 쾌락의 반복과 다름 아니다. 이미 주어져 있는 경험적이든 실재적이든 하는 쾌락에 의해 우리는 선택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 선택이 아무리 새롭다고 한들 그 선택은 이미 주어진 '자아 이상'에서의 근본적인 선택이며 변증법적이다. 만약 아주 순수하게 완전히 새로운 선택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뛰어넘었다면, 그 사람은 거만하게 무지하거나 또는 자기의 비본래적 욕망에서 벗어난 것일 뿐이다. 무지는 무반성적인 선택에 의한 근본적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으며, 만약에 자기 자신의 새로움에 도달했다고 한들 그것은 타자의 인식 속에서도 새로운 것이어야만 한다는 규율을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결국 실재적 억압이라는 불가해한 존속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둘은 극명하게 구분되는 사안이다. 그리고 다수가 이 무지에 기인해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제목에서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부르는 것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표현 상으로도 이것을 이토록 애매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의식적 작용'을 이런 식으로 비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이 '환상'이 주체의 입지, 가능성, 그리고 타자에게 보이고 싶은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상에서의 구성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대다수가 자기 자신임에 분명할 것이라고 결연하게 믿고 있는 '존재 이유'마저도 각자가 세계의 무용함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환상만이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 이 세계의 대립적 항으로 이를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이 환상에 의해 인간이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극도로 기피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의 가능함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도 없겠으며, 이 글의 주된 요지는 환상을 가로지름에 따라 도달하게 될 두 양상에 대해 적고자 함이다. 이것은 20세기를 주름잡았던 현상학과 정신분석이라는 두 학문에서 동시적으로 발견되며, 두 철학 사조들은 '데카르트적 주체'인 대상을 의심함에 따라 그 속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방법론적 의심을 따른다.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통해 주체는 본위적인 차원으로 돌아간다. 의심을 의심하는 주체를 중축으로 삼아 사유를 개진하는 것이다.


 주체의 본래성을 말하는 주된 사상가는 19세기 니체, 후설의 현상학 그리고 그 이후로 20세기에는 하이데거라는 거장으로 이어진다. 니체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안티-크라이스트'로서 기독교의 우상을 터부시하고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였던 기독교적 계율을 금지하였으며, 이는 하이데거의 '탈존' 개념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낡은 의문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특히 하이데거 <존재의 시간> 2부에서는 '죽음'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드러나는 건 인간의 근본적 나약함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쉽게 다치고 상처 입고 또 죽어버린다. 너무나도 연약한 생명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각인시키고자 한 것은 허무주의적 용기이다. 어김없이 한 번 즈음 들어봄직한 문구를 꺼내들면 '우리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장이다. 자기개발서에나 찾아볼 수 있는 이 문장이 강조하는 바는 '삶은 소중한 것이다'라는 불문율에 우선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이미 어느 누구나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는 오히려 죽음이 삶의 종착점이며 '절대적 상실'이라는 점을 이해시키고자 한 것이다. 인간은 살아 있음에도 죽음을 상기할 수 있는 존재로써 '무상함'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진정스럽게 자기 자신의 본래성을 깨우치며, 그들은 오래전부터 유지되었었지만 망각을 피할 수 없었던 지침을 되새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다시 문제적으로, 이 방법론에 의해 모든 상징들은 파괴됨에 따라 우리는 광기와 조우하게 되며 적대적인 실재와 맞닥뜨리게 된다.


 모든 상징의 철폐라는 약진을 통해 니체는 혼돈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그 속에서 그 어느 것도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것 같으니, 스스로의 두 다리로 땅을 디디며 그 다리를 지탱할 대지를 만들라는 요청은 언뜻 보기에는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만한 수사이다. 그러나 상징의 폐기에 따라 마주하게 된 불가해한 실재는 그 자체로서 정신병의 원인이다. 니체는 '실재'라고 불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직면함에 따라 광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수행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적대적인 것을 체험하고 자의적으로 비일관성을 체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예전에는 인간은 굉장히 모순적인 존재이며 이 역설을 감당하는 것이 인간 정신에서의 운명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역설만이 인간 개체의 나약함을 드러내며 게슈탈트적 향유를 붕괴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본질적으로는 다시 의존적이라는 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불가해한 것에 종속된 개체인 인간은 다시 그토록 거부하고자 했던 상징으로 회귀한다. 이 재귀적 부정성인 어떤 왜곡된 상의 흔적이 현전한다는 건 다시 상징에로의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허나, 니체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지침으로 세웠는데 그것은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타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나 고독을 견디라는 정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의존 자체를 부정하고자 한 것이지만 그가 타자에게 내건 조건들에 의해 그의 규범은 그 자체로써 모순적이다. 그리고 일상적으로도 외로움에 짓눌려 있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그들은 타인에게 과도한 친절을 건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선한 마음이라면 결단코 그것을 매도해선 안 되겠지만, 그들의 친절은 자기 자신에게 종속을 은밀하게 권유하고 있다는 건 난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자기와의 공통된 무언가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니체의 지침들은 그 자체로 무의식적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타자와의 의존적인 관계를 애써 부여잡으려 했지만, 이것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유효할까?


 타자에게 속해 있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개성으로써 살아가거나, 무엇이 더 부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융은 이 역설 속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징후들에 대해서 어떻게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균형 상태에 도달했다는 조짐을 어디서 이해할 수 있는가? 자기의 개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전체 구조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두 사태의 이율배반을 균형점이라는 오직 개념뿐인 것 같은 지점으로 주체를 위치시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사실 '실재'라 칭해지는 곳이 여전히 아무런 지식도 종용되지 않는 텅 빈 곳이라 더더욱 이 균형이라는 단어는 무용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양분된 선택 중 어느 것을 택하는 가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성향'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노력'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시대적 정언으로 '노력하라', '행동하라'는 말을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윤리적 실천이나 경제적 관점이 아닌,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참고로 광인-적대적으로 출몰할 타자-의 문제는 모두 이 문제와 관련돼 있을 수밖에 없다. 광인에게 있어서 문제점이란 타자를 죽이고 싶은 충동 자체가 아니라 그 충동이 발생하는 이유에서 유래하며, 그것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노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대적 타자'라는 실재의 한 양상은 '환상 가로지르기'라고 표현한 이 방법론에 대한 모종의 회의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반사회성의 전형에서는 대게 주체적 무능력을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의해 현재적인 모든 정치적 움직임이 드러난다는 것은 애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움직임들을 보고 이 방법론을 자의적으로 충실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을 타의적이라 규정하는 것이 애석한 일이긴 하다면, 그런 자들은 오히려 상징을 더욱 부각시키며 지젝의 말마따나 '현재에는 너무 많이 믿으려 하고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사상적 지점에서 드러난 오류로써-그 자신의 명성에 있어서 오점이기도 한- 전체주의적 사상으로의 과격한 도약, 즉 역사적으로 '나치즘'으로의 귀결은 개인의 잠재적 개성을 진작시키고자 한 그의 작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환상을 가로지름에 따라 자기 파괴적 성향이 발현되고 타자를 향해 부정적 파급력으로 번진다는 건 이 자체가 또다시 문제가 되고 만다.


 결국 우리는 환상에서 자의적으로 물러섬에 따라서 그 어떠한 선택이라도 일단은 유보하기에 이르게 되지만,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문제적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의해 상징적인 질서가 구축되며 상상은 상징을 보충함으로써 아주 탁월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이 환상을 포기함에 따라 얻게 될 극단적 무의미함을 체현하고자 하는 이는 얼마나 될 것인가?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이것 또한 실재, 즉 '불가능한 것'으로 보일 뿐이며, 해괴한 말일 지라도 너무나도 특권적인 성향으로 보일 따름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건 우리는 환상을 가로지름에 따라 모두가 자신의 잠재성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에선 자아라는 것이 허구적일 뿐이라는 불신의 발로이다. 우리가 환상을 벗어났다고 믿지만 그런 주체가 다시금 상징을 선택하는 이유란 자신에게서 선택할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사회 그리고 인간의 운명에서의 가장 비참한 점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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