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떠올려 보자. 굳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라 할 필요가 없을 순 있겠으나 그가 언어에 대해 고찰한 위대한 인물이니 만큼 그의 이름을 빌려와도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의 생각은 언어가 이 세계의 거울상이라는 것이다. 실로 그러하다. 언어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 언어에 의해 우리는 어떤 대상을 파악하고 더 주도면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고로 더 많은 어휘를 사유하고 입으로 뱉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보는 세계가 훨씬 넓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적으로 이 관점을 끊임없이 고수하게 되면서 생긴 버릇이란, 그것이 물질적이지 않으며 비-가시화된 대상마저도 언어로 포착해내려는 시도를 반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고질적이면서도 불가해한 집착이다. 집착이란 것을 정신에 있어서 만큼은 꽤 해로운 무언가로 이해하긴 하되, 이를 '불가해한'이라는 수식을 덧씌우면서까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 속에 활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를 바탕으로 추구하게 된 바는 언어가 지시하는 것이 물질에 국한되지 않는 어떤 비-가시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지시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시각으로 포착해내기 어려운 불명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나도 순전히 환영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일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령 '귀신'이라던가 '사후세계'와 같은 통상적인 사고 범주를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들이 충분히 존재 가능하다 할지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야 믿거나 말거나이지 않는가. 그런데 이 언어의 기능적 관점을 '자아'라던가 '무의식'과도 같은 개념에 끌고 들어오면 이 논의는 굉장히 어색해질 따름이다. 언어가 무언가를 반드시 지시하고 있다고 한다면, '무의식'이라는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무의식"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이를 잠시 논외로 치면 추궁하는 일을 삼가고, '부수현상설', 즉 생각이란 것이 신경 간의 전기 신호에 의해 발생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결정 내리는 것은 꽤 간단한 방편이 될 터이다. 그로써 완성되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은 인생을 편하게 사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전기 신호란 것은 분명 관찰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것은 합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기 신호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죽고 만다는 사실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을 참으로 애석하게 여길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무의식"이란 것이 충분히 관찰 가능하다는 점을 주지시킨다면 이에 동조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 것인가? 조금 더 덧붙인다면, 정말로 생각이란 것이 '전기 신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류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개념인 '영혼'이라는 것이 실로 존재하여 이것에 의해 우리가 생각이란 것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의 확실성을 밝히려고 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무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아직까지도 잘 모른다. 그 와중에 하나 건져 올린 것을 참조점으로 삼아 이해한 것을 적어 보겠다.
라캉의 '무의식이 열릴 땐 그곳에 항상 타자가 있다'는 말에 의해 인생이 즐거워지면서 쓴 고배를 마시기 시작했다. 실제로 무의식은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의식이 열리는 순간 그곳에는 항상 타자가 존재한다. 무의식의 장에서 확실성의 주체가 앞에 놓인 타자에게 원하는 것은 대화를 나눈다거나 함께 동행하는 등의 아주 일상적이여 보이는 사건들이다. 분명 언젠가 기억하진 못할 순 있어도 경험했었던 일을 재구성하고 있다. 그때의 타자란 비-실체적이면서도 확실히 표상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체에게 있어 그 타자란 너무나도 머나먼 타자일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그때의 타자란 주체가 욕망하는 수준에서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서의 타자는 주체의 상상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일치할 확률은 있겠으나 그렇지 않을 확률보다 현격히 낮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라캉의 사상은 윤리적이다. 그가 저서에서 적은 바 그대로 그의 정신분석은 현상학을 공격하는 것이다. 라캉은 진정스럽게 추구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자리를 오히려 전복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법론적으로 확실성의 주체를 따르며 동시에 주체를 타자화시킨다. 마치 자신이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듯한 확실성의 주체에게 있어 진정함이란 관찰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뿐이다. 물론 모종의 암시적 개입도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 이미지를 인식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무의식이 열릴 때 주체가 욕망하는 수준에서만 타자를 표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라캉의 용법에서 대상화된 주체는 '타자의 욕망'이다. 무의식의 주체는 '타자가 원하는 데로' 말하고 행동한다. 이에 따라 현실에서의 타자에게 있어서도 주체가 표상하는 방식대로 타자가 말하고 행동할 확률이 더 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성공적일 경우, 주체와 타자의 심적 유대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타자가 원하는 데로'라는 주체에게 부여되는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모종의 불가해한 개입을 따르게 된다. 즉 다시 확실성의 주체가 욕망하는 수준을 상기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 구도가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방금 적힌 글이 '무의식'이라는 언어 표현이 지칭하는 "무의식"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게 사용되는 의미대로 결코 억지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며 자동적으로 소여되는 것이다. 니체의 말마따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기도 하면서 그렇지 않기도 한 것이며, 우리는 생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이란 것을 한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무의식이란 개념이 허구적 자아일 뿐이며, 과학적 사고관 내에선 '데카르트의 무대'란 없다는 말로 꽤 유식하게 표현하거나, '자유의지'를 극구 부인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를 부정하고자 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은 미신적 사고를 거두어 내고 인류가 이성적으로 사고함에 따라 얻게 될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것들이 뇌를 아무리 헤집어 놓아도 관찰되지 않는다는 얼토당토 않는 언급만 일삼는 것이 불만스럽기만 하다. 사실 이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 논리는 필요 없다. 이는 오히려 너무나도 직관적이 개념이며, 매일 밤 어김없이 찾아와 단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을 방해하며, 적지 않은 삶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끝없이 펼쳐졌던 이미지들이며,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 의해 발현되는 무기력증과 초조함, 그리고 이 초조함이 성장의 발판이며 인격의 도야와 역량의 고양을 이룩한다는 점, 또한 사적으로는 '타인'에 대해 항상 끊임없이 고민하고 만드는 망측하고 순진한 욕구의 원인이 이것 자체에서 연원한다. 그리고 삶이라는 서사 속에 그 부분은 단편적이여 보이지만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면서도 그 위상은 환희적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은 애도적이기만 하다. (이미 이해하기를 바라고 쓴 글이 아니게 되어 버렸지만, '3인칭적 주체'라고 표현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현재 약물치료나 행동주의로 심리에 대한 연구가 방향 잡히는 이유는 '무의식'이란 개념을 단순히 신체적 욕구 불만이나 생리적 불순 정도로만 이해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방향을 견지하고 있는 분야의 학문들은 아마 철학보다야 훨씬 더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그 발전에 힘 입어 유발 하라리의 저서인 <호모데우스>는 제목 그대로 인간은 점점 신에 견줄만한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일 수도 있다. 과학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낙관론을 펼친다면 죽음마저도 극복하고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즉 불사의 생을 구현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염원에 관한 생각 속에서 발견되는 점은 방법이 바뀌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욕망은 원시의 조상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신'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현재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고 있는 듯한데, 원시 시대의 욕망은 불의의 사고나 아니면 자연재해와 같은 공교롭게 발생하는 사건에 의한 공포에서 안락을 얻고자 한 것이다. 이를 현재의 생명 과학이 죽음 자체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는 점과 비교하면 여전히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모종의 공포를 떠 앉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진화론적 논조로, 에리히 프롬이 '정신적 고독을 피해야 할 의무'라 지칭한 분석의 대상인 심리는 사회적인 개체가 동류 내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라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간단해 보이는 논의로 이어지게 됐는데, 그럴듯하면서도 내 머리가 그리 좋지 못한 탓인지 참으로 이상하게만 들린다. 물론, 진화론은 옳다. 그러나 그 시비의 경중을 가리는 논의를 벗어나면, 여기에서도 어떤 사실이란 것이 존재한다. 그 사실은 주체가 원하는 것은 '타자'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생각'이란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큼 명료할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에 비추어봄직한 감정이 인간의 외로움이다. 그에 따라 고독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자 한 실천적인 사상가인 니체의 신념은 어느 정도는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의 외로움을 견딜 줄 알아야 하며 그 속에서 어떤 일을 자율적으로 행할 줄 아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한 올바른 지침이다. 그리고 그가 애매한 것을 조금 명확하게 해 주기도 하는데, 외로울 때 무의식이란 것이 더 활발히 표출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직까지 확증적이라 할 순 없지만, 니체의 글귀들은 분명 그 지평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이중적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의 텍스트 속의 타자란 보잘것없는 대상일 때도 있으며 계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시선들은 분명 자기 자신이 더 나은 존재라는 확실한 자기 이해 속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타인에 대한 값싼 이해 방식일 터이다. 그리고 그 이해의 내밀한 점은 은밀한 방식으로서 타자를 욕망하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가 의존성을 거부하려고 주력한 사실이 무색해질 따름이다. 타자에 관한 나름대로의 지침을 세우면서 본인의 신념을 보충하긴 했으나,니체는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정신분석 저서에 종종 나오는 '우울증자들의 윤리 의식'은 니체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도, 그의 문제란-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가장 개성화된 상태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의식으로써 퇴행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려는 역동성 자체라는 점이다. 퇴행을 거부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마음이 추가 전진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퇴행은 불가피해지며 이에 적응하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된다.
막상 생각나는 글을 막 펼쳐 놓다 보니, 평소 하던 얄팍한 생각들도 함께 풀어놓게 되었다. 라캉의 글은 더 읽어볼 생각이긴 하다. 원래 두 가지 계획이 있었다. 라캉의 책 가격이 너무 비싸서 이 값을 제대로 치르고 싶다는 마음에 각 장마다 내용을 정리하여 글을 쓰는 것이고, 나머지는 니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글을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일이 생겼다면,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모두 무의식을 보고 있노라고 믿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다.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망설이는 것만큼 사치스러운 것은 없지만 서도 생산성의 권태를 포기함에 따라 찾아온 권태에 짓눌려 삶의 본분을 망각하며 사는 중이라 일단은 뒷전으로 삼겠다. 그리고 한 가지 정확히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나는 경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불문율을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소박한 지식이 명분을 갖추는 이유이다.
ps. 제곱을 하면 음수가 되는 수인 '허수'를 고안해 냈기에 상대성이론 그리고 양자역학의 공식이 완성될 수 있었다는 글을 보았다. 16세기에 허수라는 상상적인 수를 창안한 카르다노의 저서를 보고 수학적 사고를 중요시한 데카르트 마저 그것을 의미 없는 짓이라고 칭했다. 헛짓인 게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