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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18. 2020

'사랑'에 관한 불편한 진실

사랑하는 자들에게 건네는 모욕적 서한

 '무언가 열렬히 아끼며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정의 내린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여러 형태를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세간에 화제가 되는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이나 구구절절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가수들, 자식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대중의 인정과 지지를 받고자 하는 스크린 속의 명예스럽고자 하는 자들,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세심하고 여린 마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도덕률까지, 이 모든 것들이 사랑의 형태일 것이다. 고로 사랑은 어디에나 넘쳐 난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은 일종의 광기이지만 그 안에는 약간의 이성이 섞여 들어가 있다'라는 말을 참조점으로 삼는다면 이 말에 수긍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마 사랑에 상처 입고 후회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느새 사랑이 깨지고 나서야 우리는 무언가에 홀려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보통으로 돌아온 일상에서의 사랑은 술자리 무용담으로만 소비되거나 또는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회상된다. 사랑이 미치도록 황홀한 감정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간을 미치게도 만든다. 푸코가 '광기의 본질이 은밀한 이성'이라는 점이라 말한 것에 착안한다면 어느 정도의 이성이 개입되어 있다는 표현은 새삼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굳이 사랑에 대해 이런 텍스트를 갖고 오지 않더라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사랑이 주된 관심사라는 가장 확실한 지표가 있다. 어느 누구를 만나도 꼭 물어보는 게 '여자 친구'는 어디 있냐고 묻는다. 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안부 인사처럼 느껴질 정도의 단순 명료한 질문은 나에게 이 세계는 그리 혼잡하지 않다고 말을 건네며 이것이 전부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철학서에 적힌 문구가 세상을 너무 복잡하게 바라보도록 세뇌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망상이 들 정도이다.-(사랑에 관련된 재화만큼 잘 팔리는 재화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자본주의에서 돈벌이가 된다. 누군가의 사랑이 자본가들의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사실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굳이 하나 정하자면 당연 남녀 간의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흔해 빠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니 모두의 관심사가 된다는 말은 합당할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가장 위대하며 칭송받아 마땅한 그런 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한 근거가 될 것이지만, 다시 강조컨데 어느 누구나 이 사랑의 형태를 열정적으로 추구하면서도 그 결과가 모든 세상 사람들이지 않는가? 사랑은 이것만큼 적절한 보상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어떤 황홀한 쾌락을 맛볼 수 있다. 이성의 육체만을 탐닉하는 자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 결과는 이미 당신의 존재이다. 당신의 존재는 '쾌락의 효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효과는 언제나 유효하다. 우리는 사랑에서 벗어난 적은 단언컨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세상엔 '사랑'이라는 것이 전부인가? -오직 이것만이 인간을 살아있도록 하는가?- 이런 관점을 충족하는 건 프로이트가 제시한 '리비도' 개념이다. 프로이트에겐 근간이 되는 모든 에너지는 성적인 욕망이었으며 이것이 모든 질서의 중축이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주장은 모든 것들을 성적인 것에 끼워 맞추려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으며 그에 따른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아주 적절하게 요청하는 바는 그가 최초로 성에 대해 말한 철학자이면서, 또한 -또다시 강조컨데- 이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그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게끔 만든다. 특히, 모든 인간의 행위가 이성에게 호감을 사기 위함이라는 논의가 진화론에서 등장하게 되기까지 그의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생의 목적은 번식이 아닌가? 물론, 나는 이 말에 여전히 동의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것을 연인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해코자 한다면, 이것을 단순히 육체적인 성으로 이해되는 것을 넘어서 사랑이 상응하는 정신적 방식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미 존속해 있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그 무언가란 '욕망하기'이다. 모든 관계가 욕망의 변증법에 연루되어 있으니 연인 간의 관계에서도 이미 욕망의 질서가 자리 잡혀 있다고 말하는 건 뒤늦은 발언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특이하게 보아야 할 점은 이 관계가 생물학적으로 다른 신체 구조와 각각 XX와 XY라는 상이한 염색체를 가진 두 생물 사이에서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분명 인간은 생물학적 합일에 있어서 만큼은 서로에 대해 호의적이며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을 지닌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서로의 육체를 합쳐보려고 시도하려 한들, 결국 독존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느낌만을 간직할 뿐이다. 그 순간의 쾌락은 오로지 나의 느낌이며 아무리 몸을 뒤섞어도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절대로 알 수 없다. 이 명확한 한계지점은 육체적인 것만으로는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히려 정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정신은 어떤 통일성의 원리가 작용하기도 하지만 양자 간의 불일치가 현전하는 곳이다. 물론 이것 또한 생물학적으로 염색체가 다르다는 특이하다고 할만한 상이성에 의해 서로 다른 것을 욕망하기에 이른다는 추측을 감행해야 하긴 한다만-남녀가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계속 말해 무엇하겠냐만은- 여기 적힐 글은 다른 점에 대해 적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하 고찰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욕망한다고 했을 때, 욕망은 상승하고 하락하는 궤적을 그린다고 본다면 누군가를 만남에 따라 욕망이란 것은 시간을 축으로 변곡점을 갖게 된다. 그 곡선이 변화하는 부분은 욕망이 좌절되는 순간과 충족되는 순간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다. 즉 욕망이 그리는 궤적이 순수 쾌락의 증가 또는 감소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따라 서로에 대해 가장 강렬한 느낌, 즉 쾌락의 총량이 가장 높을 때는 언제일까? 당연히 첫 만남이다. 이때 서로에 대한 호감이 최대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주체와 타자의 구도에서 정립되는 주체의 입장은 응시에만 머물러 있다. 여기서 관계를 정초 짓는 것은 '기대감'이다. 어느 누구를 만나던지 타자로 향하는 응시, 즉 상상계적 특질은 그 사람이 나의 성향에 맞는 사람일 것이라거나 아니면 내가 진실하게 원하는 것을 충족해 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지한 주체에게 타자란 주체가 욕망하는 수준에서의 타자이다. 일상적으로 '타자'를 통상적으로 '이상형'이라는 표현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의 응시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맞물리는 순간이 첫 만남의 설렘의 강렬함이다. 그러나 문제는 서로가 서로의 상상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타자에게 주관적인 입장만을 갖고 있으며 특별한 합의점이 없는 채로 놓여 있다. (사람이 셋 이상이 모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둘만 있을 때 싸우면 중재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 간의 상이함은 필연적으로 합의점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합의점은 욕망이 좌절하며 그 궤적이 추락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무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이해를 요구하는 순간은 응시에만 머물러 있었던 연인들의 욕망이 좌절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표로 할애된다. 즉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연인이 나의 이상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지함에 따라 그 사람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둘 사이의 간극을 면치 못한다. 그리고 이 간극이 인지되는 분열 지점은 관계가 끝날 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현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끝이 날 것이라고 암시하는 전조 따위가 아니다. 이 분열의 시작은 단절되어 가고 있는 중이 아니라 이미 단절되어 있다는 것을 엄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합의점을 도출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의무적인 이해'라고 칭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것 자체로도 문제이다. 이는 욕망의 좌절이라는 고통과는 다르게, '이해하기'는 다른 의미로서의 고통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 조장되면서 그것이 결착되기 전까지, 어떤 척도가 마련되지 않는 이상 관계는 끝이 나고 만다. 모든 연인들 간의 이별에서 관계를 지속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건, 서로에 대한 이해관계를 적절히 공시하여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과정 자체이다. -어느 관계에서라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고통만 지속되다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한쪽이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즉 한쪽의 이해심이 너무나 지나치기 때문에 관계가 지속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여기선 이해의 당사자가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텐데, 그만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심이 넘치는 사람이 언제나 이해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란 시간문제이며, 그것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확실한 징후를 이해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고통스러운 어떤 것이라 인식하는 순간 그것을 관둘 심산이 크다. 아무런 보상도 없는 고통은 무의미하다. 결과적으로 가장 최선이라 할만한 관계는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앞에서 '필연적인 합의점'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어색하게 되었는데,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어떤 사소한 요소가 인식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굳이 이해하며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정녕 가능한 지를 묻는 것이 더 의심스럽기는 하다만.


 그래서 어찌하다가 헤어지고 나서 우리는 슬퍼한다. 어떤 것을 잃는다는 것이 슬픈 일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슬픔의 이유는 언제나 그랬듯이 당연히 '상실'이다. 이것은 연인이었던 대상이 내 눈 앞에서 사라진다는 시선에서의 상실에 그치지 않는다. 이별은 추억이라고 부르는 과거의 기억 파편들이 모조리 무상해짐을 의미하며, 약속과 맹세라고 불리는 현재와 미래의 시간대를 속삭였던 순간들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상실감에 슬퍼하는 이유는 관념적 체계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우리는 이 기억이란 것에 의존하여 관계를 맺는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관계가 없는 것과 다름없다. 이것을 다시 주체의 응시로 본다면, 인간은 시선에 머무르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그 대상을 상기할 수 있도록 돕는 매개인 '기억'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그러나 다시 의문을 조금 비튼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상실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건 상실이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진정으로 잃게 되는가? 욕망의 좌절은 그 실패 지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주체가 조망하는 타자에게 존속한 응시란 주체의 수준에서 욕망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주체의 관점이다. 연인이 헤어짐에 따라 잃는 것이 옛 연인으로 남게 되는 그 대상에 대한 기억들이라 앞서 말했듯이, 주체의 관점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체는 불능의 상태가 되고 만다. 욕망하기를 관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로 인해서 '사랑하기'를 멈추게 된다고 보아도 될까?


 기억과 사랑을 이해하는 데 가장 적절한 내용은 '나르시시즘'에 관한 신화적 일화이다. 앞서 우리가 대상이 아닌 대상에 관한 '기억'을 사랑하다는 사실이 충족되는 일화이기도 하다.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청년은 어느 여인도 사랑할 수 없었다. -간단히 말해 눈이 높다는 것이다- 수많은 여인들의 구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인들은 복수의 여신인 네메시스에게 부탁해 그가 사랑의 고통에 빠져 허우적대기를 부탁했다. 저주에 의해 청년은 무심코 물가를 지나치다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물가에 비친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물가의 자기 자신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다. 마치 우리의 기억이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지는 것처럼 손을 뻗으면 사라졌다가 손을 거두면 다시 나타났다. 청년이 물가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빠져 낙담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며 결국엔 굶어 죽어버렸다. 어린 시절 만화로 읽은 책에서는 여인들의 매질에 죽었다고 나왔었고, 어릴 적 본 애니메이션에서는 그 청년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물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만나게 된다고 연출했다. 아이들이 보는 만화의 경우 분노의 매질에 의해 죽었다는 현실을 고증하는 설정보다는 환상적 국면을 제시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으나, 결국 죽은 것은 매 한 가지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성향을 문제 삼는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던 젊은이의 강렬한 자기애가 그 청년을 황홀경으로 이끈 것이긴 하되, 그 표상이 청년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황홀경이 허구라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 물가에 비친 모습은 분명 가짜이다. 그러나 이것이 욕망의 본질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사랑에 빠진 젊은이의 초상을 보면서, 사랑에 빠진 그가 기억력을 매개로 자기 자신과의 대화만 하고 있었다는 것은 탁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신화는 과도한 자기애가 불러온 참사 정도로 갈무리될 수도 있겠으나, 정신분석적으로는 주체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주체성의 난항을 폭로하면서 욕망의 불가능성을 견지하게끔 한다. 즉 주체의 응시가 실패함에 따라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굶어 죽던, 매질에 죽던, 물에 빠져 죽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 물가에 비친 젊은이의 표상이 주체의 응시이자 욕망이다. 그리고 종말, 즉 젊은이가 죽고 말았다는 사실을 상징적 은유로 본다면 이것을 자살이라고 볼 수 없다. 죽음을 자초한 것은 맞지만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젊은이는 자기애가 선사하는 쾌감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이 젊은이의 죽음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젊은이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해야만이 살 수 있다. 라캉의 말마따나 무의식이 열리는 곳에는 언제나 타자가 함께 있다. 물가에 젊은이의 표상에서는 타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일화는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현상학적 욕망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에서 더 나아가 '어떤 것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가?'라는 질문과 동시에 주체가 타자의 자리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젊은이의 욕망처럼, 라캉은 내가 나 자신을 억압하는 죄스러운 분투를 고발하면서, 지젝을 말을 빌리면,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 문제에 있어 유일한 탈출구로 모색된 것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아닌 타자의 장에서 호명된 주체이다. 자신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타자에게 출현할 무언가로 돌아가는 순환 과정이 주체가 겪어내야 할 진실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해 고민하면서 연인과의 이별에서의 중점인 어떤 '상실'을 고찰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이미 어떤 '상실'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이다. 아리스토파네스 신화에서 사랑은 주체에게 있어 영원히 상실된 부분을 요청하는 것이다. 주체가 욕망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건 어떤 결핍이나 부족분 따위에 의해서이다. 라캉이 타자의 장에 열어 밝히는 작업들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가장 진실되며 유일무이한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소외된 주체를 구원하는 것이다. 주체의 자리는 타자의 장에 관련된 만큼만 열어 밝혀질 수 있다. 그 결과는 아주 단순하다. 외롭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실패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소외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지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외로움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지를 느낄 수 있는 방법도 너무나도 간단하다. 대략 7일 정도만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니체가 그가 그토록 거부하려고 애쓰던 병약적 증세에 어떻게 굴복당했는 지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으며, 그가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교도소 독방이 가혹한 징벌인 이유- 그리고 타자의 장에 속할 수 없는 주체에게 발생하는 외로움은 나르시시즘적 욕구를 더 강렬하게 부추기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이 감정이 현재에 이르러 더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타인의 장에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못하는 주체에게 발생하는 외로움에 기인한 나르시시즘적 욕구의 자기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적 충동은 그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랑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화에서 젊은이의 죽음은 상징적 은유로서 '자아의 종말'을 의미한다. 자신이 사랑받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면서 외로움이 과도화된 고독한 자아는 자기 자신의 자아를 말소시키면서 어떤 무리나 집단적 정체성에 소속되려는 욕구가 강해진다. 이런 피학적 성향은 현재에 가장 흔한 형태로 존속하며 또한 우리가 이념의 환상에 강하게 집착하도록 묶어 놓는 힘이기도 하다. 이것은 '근본적 나약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바는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자기기만'으로 보면서 인간에게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만을 기만의 가장 흔한 양태라 할 수 있는 '인정하지 않는 태도-합리화-'로 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진실한 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경험적으로 생겨난 나약함이든 아니면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외로움에 너무나도 취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다시 이 '욕망'에서 주체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욕망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결핍 자체에 연원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무언가 앞에서 우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나약하다.


 자기 자신에게 모욕스러운 것은 자신의 욕망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젊은이는 물가의 자기 자신에게 닿을 수 없었음에도 죽음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사랑을 갈구했다. 주체는 이 불가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무지함이 더욱 강렬하게 자기애적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작인이 된다. 젊은이는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연인 간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애적 욕구에 의해 연인과의 사랑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지라도 사랑하는 것을 관두지 못한다. 오히려 상대방의 사랑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면 연인을 더 열렬히 사랑하고자 하는데 그와 동시에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들과는 더 멀어지게 된다. 이런 때에 상대방을 절실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연인이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에서 도착적인 믿음이 발견된다.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 기도를 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 (기도를 하면 없던 믿음이 생기기라도 하는가?) 마찬가지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그들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기이한 믿음으로 인해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사랑은 보상적으로만 주어지는 사랑만을 갈구하는 능동적이지 못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 믿음 아래에서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판명되는 순간에는 믿음이 종식됨과 동시에 사랑도 끝이 난다. 이런 측면에서는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이 강박적이고 불온한 관념이 사랑하는 자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이 욕망이 기능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에 사랑이란 사랑받고자 하는 충동이며, 그 욕망의 좌절이 의미하는 바는 사랑이 좌초됨을 의미한다. 감히 말하기를,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한 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이별을 하고 과거의 연인에게 화가 나는 이유를 말할 수 있으며, 사랑을 '광기'라 칭하는 이유이다. 사랑은 억척스러운 고집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실패하고 나면 상대를  파괴시키고자 하는 복수의 열망까지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는 집착이나 질투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것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것이 병적인 이유는 연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망상적 상실감에 의한 불안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질투하는 자에게서 '열등의식'이 흔하게 발견된다.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부족한 면을 들추어내는 것만큼 모욕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자신이 감내해야 할 수치심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모욕을 준 대상을 혐오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모욕조차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은 오래전부터 신적인 권능 아래에서 무한하고 자비로우며 관대한 것만이 진실된 사랑이라고 주창되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편견이고 가장 흔한 오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곧 신에 대한 크나큰 오해이다. 신은 오히려 정의 하나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하면서도 인간을 가련하게 만드는 폭군의 기질을 갖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스스로의 외로움이나 불안 등을 타인에게 투사하지 않을 정도의 내적인 강인함을 갖고 있어야만이 가능할 것이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 가능할까?- 가장 자유로운 자가 가장 절실한 사랑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행복이나 평범과는 가장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는 혹독한 것 중 하나이다. -영감이란 것을 얻기 위해선 얼마나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그리고 이 혹독함은 항상 어떤 이해 방식이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사랑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이런저런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중이다.


 글을 적으면서 예전에 떠올렸던 두 가지 확실한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주권적인 믿음으로 존재하는 '존엄성'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 때 떠오른 생각인데, 어느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예외란 없다. 그리고 하나 더 확실한 것은 이런 글을 적는 이유는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떠오르는데, 아마 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으로 저주에서 풀려나면서 화가 났을 것이다. 숙면을 취하고 있었는데 멍청한 왕자가 자신의 속도 모르고 깨워버린 것이다. 그런데 왕자가 꽤 잘 생긴 편이라 공주는 화를 잘 참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저주는 너무나도 달콤한 것이었다'라고 친구들에게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공주에게 너무나도 달콤한 것을 빼앗아 간 왕자는 공주를 책임져야 했다. 이 또한 사랑이다.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도통 알 수가 없다.


 ps. 사실 친구의 연애 상담을 대략 50시간 정도 해주다가 들었던 생각을 적은 것이다. 거의 3달에 걸쳐 이루어진 장대한 여정이 막을 내리면서 나의 상담도 끝이 났지만, 상담을 해주면서 나는 답을 준 것이 아니다. 내가 한 일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그 친구가 진정하게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뒤에 항상 덧붙이는 말은 '무얼 선택할 건데?'라는 의문문이었다. 고민을 함께 고민해 주었지만 선택하는 것은 항상 본인의 몫 아니겠는가! 이 긴 헛소리를 끝까지 읽는 사람은 드물 테니 조심스레 적는 것이긴 한데, 너무 짜증나는 점은 나는 짝사랑에 실패한 전력만 수두록한 '찐따 of 찐따'인데도 친구들은 항상 연애 고민을 주야장천 늘어놓는다. 그럴 때마다 괜히 흑역사들이 떠올라 슬퍼지기만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서 그런 것인가? 그러나 친구의 상담을 들어주면서도 속으로는 그들이 왜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거라면 왜 굳이 이 사랑이란 것을 고집하는가? 멍청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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