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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15. 2020

우울한 만족, 철학적 정언 이해하기 3.

자유에 대한 해묵은 오해와 침묵

 세상이 어려워질수록 철학적 사고가 부흥한다는 말이 있다. 그럴듯한 말이다. 세상의 어려움들이란 문화의 담지자인 인간에게 수많은 고민거리들이라 할 수 있으며 철학적 사고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줄 텍스트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철학만이 '고민거리'를 고민하는 유일한 학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꽤 애석하게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어느 때부터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나서고 '행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말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고민들 중에 흔한 류의 사고는 이런 식인데, 만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행복을 주는 일인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분명 옛날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더 이상 그 일을 할 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그 고민을 덜어줄 수 있다. 행복한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것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의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인가? 다시 말해 우리가 행복에 빠져 있다면 행복한 가를 따지고 있을 겨를이 있겠는가?


 어떤 긍정적 감정 작용들은 사소하게만 찾아오는 듯하다. 여전히 이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이것을 느낄 수 있으며 느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추억에 잠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이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끊임없이 부추기며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해괴한 질문을 던져 보자. 앞선 문단에서 마지막에 지적했듯이 어떤 행복한 감정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 자신이 행복한 지에 관한 의문을 떠올릴 것인가? 어떤 긍정성에 매몰되어 있을 때, 가령 이런 식으로, '나는 지금 행복한 건가?'라거나 '만족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둥의 질문들을 던질 것인가? 그럴 수 없다. 당장에 찾아온 그 황홀경을 부여잡으려 애쓰기도 힘이 부칠 것인데, 이런 우울한 질문들을 던질 시간이 없다. (우울함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철학자 말곤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감정들에 대해 알고 있다. 살면서 이런 긍정적이라 부를 법한 감정들을 떠올리는 건 그것을 겪고 난 이후이다. 즉 어느 정도의-얼마나 지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시간이 지나서야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가끔 과거로 돌아가 추억이라는 허구적 달콤함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긍정적인 신호들은 추억이 되어서야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에겐 비통한 일일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한 철학자에게 행복에 대해 알 수 있는 순간이 지난 후에 왜곡되었을지도 모를 기억을 부여잡고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니 말이다. 철학자의 진부한 태도는 집어치우고, 그래서 이런 감성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매몰'이라고 불리는 언어 표현을 정신의 특질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감정 상태에 푹 빠져 있을 때, 그때의 감정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그 감정이 끝이 났을 때 우리는 다시 의식적일 수 있다. (의심이 시작되는 지점)


 이런 특질 앞에 굳이 긍정과 부정을 나눌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당장 느끼고 있는 감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분노하는 자는 분노를 삭이기 전까지 그 분노함을 멈출 수 없으며, 슬퍼하는 자는 그 슬픔이 끝나기 전까지 눈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기뻐하는 자는 그 기쁨이 사라지기 전까지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을 것이며, 즐거워하는 자는 그 즐거움 앞에 날뛰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누리다가 어느새 부지불식 간에 감정은 사라진다. 그다음에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체험한 사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든 감정에 대한 의문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이 사라진 이후 기억에 의존해야만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긍정과 부정이 나뉘는 척도는 '욕망하기'일 것이다. 어떤 긍정적인 것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반면 어떤 부정적인 것들을 끝나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대한 이유는 선택이란 것이 이 기억이란 것을 토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는 만큼만, 아는 만큼만 답을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2편에서 적은 '우울'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 우울한 자는 자신이 우울에 빠져 있는 이유란 것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 적은 내용을 토대로 '우울의 내용물'이란 결국 우울이 멈춘 후에서야 비로소 확인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우울에 빠져 있는 사람을 관찰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들의 진정한 문제란 너무나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어 정신이 견딜 수 없는 부담감을 지고 있을 수도 있다. 프로이트가 '과도한 리비도의 축적'이라고 부르는 표현이 바로 '우울'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의 '어려움'이란 불가능 자체가 아니다. 불가능이 아니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어떤 활로를 찾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서 불가능이라 규정내린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가능성'이라는 건 새삼스러운 발언이다- 만약 이런 문제들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에 대해 '하지 않으려는 자'로 판명할 수 있는가? 병리학적 관점에서 우울을 파악하려면 '하지 못하는 자'라는 진단이 그들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일 수 있을 것이며, '무의식' 개념의 역사적 발원점에서도 일맥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의심은 인간이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한다는 점을 착안한 것이다.


 더 먼 과거에서는 우울한 사람들의 무기력증을 보고 나태와 태만이라는 죄악과 동일시하면서 '악마적인 태도'라고 일찌감치 낙인찍었었다. 현재에 이르러 악마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신학자들은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중세의 암흑기 이후의 비합리성이 충분히 치료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과 지식의 축적에 따라 병리학적 영역으로 들어서면서 이것에 대해 혐오하기보다는 동정을 갖게 되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얼마나 관대해질 수 있는가?- 최근에 우울증에 대한 치료법은 피로감을 예방하는 차원에서의 영양 섭취나 행동 방침들 아니면 약물 치료 등을 병행하여 치료하고 있다. 실제로도 꽤 효과가 있는 치료들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이 문제는 라캉이 주지한 '반복 충동'을 강제할 수밖에 없는 미봉책에 불과할지도 모를 그런 치료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생각들을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이 철학의 목표가 아닌가? 여기서 융의 주장을 살펴 보면 신경증에 걸린 사람에게 필요한 조치는 그들이 할 일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그들의 주된 관심거리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란 '관심'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거리가 우리의 진정한 관심거리가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관심 가지는 것이 비본래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본질적인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인 암시 정도로 부여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문은 다시 잠재력이나 허구적일지도 모를 인간의 내면성을 부여잡아야 하는 작업들로 이어진다.


 우리가 은밀히 욕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과연 그 일에만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까? 그러니까 혹여나 내가 진정성 있게 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니는 어떤 일이 있는데, 그 일이 돈을 얼마나 벌어 들이는지 아니면 대중에게 얼마나 관심을 받는 지의 유무를 더 깊이 있게 따지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부수적이라 칭한 것들을 완전히 터부시 할 순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 가는데 돈과 어느 정도의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여기서 묻고 있는 건, 이 두 가지가 역전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이다. -'열정'의 의미란 무엇인가? 열정은 노력과 별로 관련이 없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아폴론 신전의 문구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자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스스로 멍청한 인간이라고 칭할 정도의 겸손과 신중함을 기하라는 의미까지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을 겨냥한 정언인 이유는 자기 자신을 기만할수록 행복은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다'라거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니체가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게조차 미심쩍기만 하다. 진정성을 촉구하는 물음에 결코 제대로 된 답을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하게 집어낼 수 있는 점이 있다. 관찰 결과를 통해서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척도가 인간의 여러 가학적 양태를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체성이란 것을 갖길 원한다. 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실한 이정표를 필요로 한다. 이 성향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여러 기준들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엄밀히는 정당화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정당화에 의해 비본래적 자아로 행위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과도하게 계상되며 과시의 수단으로 사용되기에 이르는데, '비본래적'일 때의 가학성이란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의 위치를 섭렵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고 가장하기를 좋아한다. (묻지도 않았는데도 갑자기 '만족한다'는 말을 뱉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대게 남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골몰하며 부러움과 배앓이 그리고 존경조차도 그런 증상에 속할 수 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처럼 보여도 남의 약점을 잡아 내거나 잘못을 물고 늘어지기만을 더 좋아하며 타인을 존중하거나 칭찬하는 것에 인색하면서도 타인이 자신을 칭찬하거나 인정하는 것에 한없이 즐거워한다. -니체가 가련한 사람들로 본 유형- 여기서의 가학적 징후는 우월하고자 하는 경향이다. 즉 남들보다 잘 사는 것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앞서 '매몰'에 대한 논의를 다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즐거울 때 주변을 신경이나 쓰는가? 만족스러울 때 우리는 무엇에만 신경을 쓰는가? (니체를 여전히 부여잡는 이유는 그의 텍스트에 본래성과 비본래성이 동시에 존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래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주체의 입장에서 하려면, 즉 본래성을 찾는 시도로 이해되는 건 '죽음'을 표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결국 의지라는 것이 생 자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다시금 회부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일 진 모르겠지만, 죽음은 우리의 성격이나 취향을 이해하는 것에 앞서서 필요한 결연한 의지를 이해하게끔 도와주는 사태이다. 우리는 종종 그런 말들을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다. '내일 만약 죽는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여유를 주면서, '한 달 후에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조언들 말이다. 물론, 우리가 내일 죽을 거라는 가정도 없으며 내일 살아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확신을 더 따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이 한 단어를 떠올리기를 극구 거부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이 문단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명구가 있다.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의 저 말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말이다. 저 말은 우스갯소리로 소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 말을 듣고서 웃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진짜 '사과나무'를 연상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실제로 지구가 내일 멸망하는데 누군가 사과나무를 심고 있다면 웃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말의 의미-사과나무의 의미-를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결코 웃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만큼 인간 삶을 적절히 요약한 말이 있을까? 하지만 만약 무기력함에 빠진 사람에게 가서 '삶은 원래 우울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수긍하기보단 자신의 내적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것에 가혹함을 느끼며 도리어 화를 낼 것이다. 그렇다고 왜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순차적 이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령, '사과나무를 심기 때문에 지구가 멸망한다'라거나 '사과나무를 심는 이유는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ps. '본래성'이라 함은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아가라는 철학적 정언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일종의 '구원' 쯤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가끔 본래적 자아로 행위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대중들은 그들을 보고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따라 모든 것들이 '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을 진정성 있게 믿는다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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