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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Feb 09. 2020

우울함, 부정성의 여과로 2.

우울과 유희 사이, 그 어딘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대략적으로 10절 정도를 할애해 불안과 공포 그리고 염려와 같은 인간의 정서적 상태에 대해 기술해 놓았다. 하이데거에게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 즉 세계를 분할해서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이 두 가지가 아울러 공존하는 것을 넘어서서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이 생각이란 것을 한다는 정신의 작용, 그리고 감성은 그 생각 속에서 피어오르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가 저서에서 명시해 놓았듯이 불안과 공포 이 두 감정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두 감정을 양적인 차이로 환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즉 '불안이 극으로 치달은 상태가 공포이다'라는 명제는 합당치 않다는 의미이다. 오히려 이 둘은 딱히 연관이 없다 할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1편에서 주지하다시피 현재 사회에 널리 퍼진 지배적 정서는 '불안'이다. 불안이란 죽음이 아니다. 불안은 불행하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불안이란 감정을 분석하려면 '불행'이라는 단어보다는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이기 십상이며, 또한 불안은 어떤 가능성을 항상 염두하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대게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불안에 떨지 않는다. 그래서 불안해하는 것을 일종의 '특권' 쯤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불안해 할 수 있는 권리에 의해 시작되는 망상은 잘못된 선택일 수 있다거나 또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즉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래는 원래 불확실한 것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던가 '자신이 하는 선택은 항상 옳다'라는 표현은 두려움 앞에 주저하고 망설이는 시간을 최소화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가능성을 품은 것이다. 불안은 어떤 가능성이 철폐된 상태인 절망을 모방하는 듯하지만 어떤 가능성이 완벽하게 닫혀 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도리어 실제로는 절망하기엔 너무 이른 때라는 다짐을 낙관하고 가능성을 긍정하려는 힘을 부추기고 있다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절망'이 무엇인지만 이해하면 불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모든 것들에서 일말의 가능성조차 찾을 수 없을 때, 즉 재기-불가능성을 판결 내린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을 절망에 빠져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라기보다는 우울에 가깝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안한 자들은 무언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울이란 감정을 발생론적으로 접근하면, 여기서 이 원인이란 것이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절망의 원인이 '내재적'이라는 것은 자의적으로 어떤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서의 절망의 원인은 스스로의 사유일 터이다. (이는 단순히 '무지'일 지도 모른다.) 이것에 의해 내재적 문제에 의해 절망한 자는 극도의 허무함 앞에 도착한다. 그리곤 어디에서도 의미를 찾지 못해 살아지는 데로 살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자유라 착각하며 인생을 '쾌락'이라는 하나의 원칙에만 맞추어서 즐길 수 있는 것들만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의 '쾌락'은 자유라기보다는 방종에 가까우며 이런 류의 즐김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에 회의감에 사로 잡히기 마련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회의감이 찾아오는 시점이다. -모든 문제는 '시간문제'이다.- 그리고 허무가 선서하는 극도의 무상인 우울감, 즉 '비-존재감'을 극복하기 위해 탈출구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런 주체가 선정하는 방식은 또다시 '불안하기'이다. 스스로 불가능이라고 판결 내린 사태로 과감히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금 가능성이란 것에 골몰할 수밖에 없다. 이 숙명적 굴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언제나 다시 불안해야만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이데거적으로 현존재의 본질은 '염려'이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의 우울은 스스로 무언가를 이룩하지 못한다는 자의적 불가능에 연원하긴 하되, 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허나, 절망의 원인이 외재적일 경우, '우울'이 묘사하는 방식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증을 동반하지만, 자의적 불가능성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즉 어떤 불가능의 원인으로 '타자'를 지목했을 때 우울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외적인 문제에 의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앞서 내재성의 차원에서 연원한 절망이 허무감이 방종으로 이어지는 반면, 외재성의 차원에서의 우울이란 분노나 혐오를 현전한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 만연한 어떤 불미스러움이 폭발적인 힘을 과시하게 되는 연유이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지표들은 온갖 정치적 논의들, 시민 의식, 이념적 논쟁, 제도적 미비점, 역사성 등등을 들추어내는 '~ism'들이다. 어떤 '~주의'는 우울한 자들이 맹종하는 환영으로 적격이다. 이런 것들은 우울한 자들의 억눌린 힘을 분출하는 탈출로로 선택되면서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 내는데, 이런 것들을 인간의 무기력함을 가리는 데 탁월한 수단인 '의존성'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받아들이길 극구 부인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구태여 말하길,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현인류는 어떤 위대한 자들에 이끌려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웅 신화'의 탄생이며, 우리가 뛰어난 자질과 역량 그리고 덕성을 겸비한 자들을 칭송하는 이유이다.) -'이념'이라 불리는 것들은 어떻게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물론, 이런 논의들은 무의미하다. 내재성과 외재성이라는 위치적 개념을 통해 '원인의 출발점'을 이해하려는 시도 이기는 하나, 이 양분은 실제로도 극단적 사태들의 충돌로 이어지며 사회적으로 지지부진한 갈등만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책임'에 대한 인류에서 중대한 문제적 개념을 이끌어 내는데, '개인적 책임' 그리고 '집단적 책임' 중 무엇이 더 중대한 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대립되는 입장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이것에 의해 발생하는 건 어떤 마찰들이며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엇을 선택하던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전자의 문제는 반-사회적(또는 반-시대적)인 가학적 개인의 출몰이며, 후자의 문제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자존을 지키려는 피학적 개인의 출몰이다. 이 두 가지 모두 합리화된 무의식적 기제이며 자신의 불만족을 보상하려는 심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에서 우울이 출발하는지에 따라 갖게 되는 감정 양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논의를 토대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성향을 이분할 할 순 있겠지만, 한 가지 정신분석적 사실이 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간에 우울에 빠진 인간은 어떤 탈출로를 반드시 모색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앞서 우울함이 어떤 가능성이 폐기된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는데, 현시점에서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무기력증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꽤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자신이 관심이 있으며 집중할 수 있는 일로 신경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딱히 의미 없게 보여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체로 유희 거리들이다.


 다시 진화론적 상상에 입각해, 우리 조상들이 농업 혁명 이후에 무엇을 했을지 생각해 보자. 의식에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던 공포가 사라지게 되고 먹거리가 예전보다 풍족해지면서 먹을 것을 찾아 나서야 하는 노동을 덜하게 되었다. 그렇다. 시간적으로 여유로워진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심심해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그토록 원했던 풍요로움이 인간을 조금 특이한 의미로서 빈곤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인간은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면서 남는 시간을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놀이의 기원'일 것이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이 '놀이'란 것에 치중하며 삶을 보낸 것이다. 이것이 우울에서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카르페디엠'의 맹종이며 '즐거움' 자체가 지배적인 원칙이었다.


 어떤 연유에서 발생하든 간에 우울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가장 적격인 것은 '쾌락'일 것이다. 종종 이것이 '책임'이라는 개념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채 사용되지만, 어느 누구나 자신이 즐길 수 있을 만한 일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그런 것들이 없는 사람들은 실제로 타인과의 융합을 꾀하기 위해 친절을 베풀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고 하는데, 여기서의 의존적 관계는 불만족을 보상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만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그렇다고 인간 존재에게 '우울', 즉 어떤 부정적인 것들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 그리 합당하지 못한 처사는 아니게 된다. 종종 '현실 도피'라고 칭해지는 어떤 행위들에 대해 우리는 병적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건전함과 불건전함이라는 표현으로 구분 지으려고 하는데, 일단 유희를 찾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있다. 즉 어느 누구나 현실과는 다른 출구를 찾는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에서의 '퇴행 작용'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일어나지 않는다. 퇴행은 살면서 어떤 장애 요소에 부딪혔을 때 인간은 과거를 거슬러 오르게 되는데, 이때 과도화된 욕망은 반드시 분출되어야 할 어떤 힘이다. 그리고 이 분출은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보상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때의 '건전함'이란 타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때 붙을 수 있는 수식어이다. 어떤 건전함을 기준으로 한 쾌락적 보상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림을 그리거나 운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비판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 류의 활동은 생산적인 행위라 할 수 있으며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한 활동들이 많다. 반면 불건전하다고 규정된 활동들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라는 명목적인 이유가 있다.


 '유희를 추구함'은 억압된 기제에 의해 발생할 뿐이다. 가령 '원나잇'을 보상으로 삼은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 사람은 연인과 다툼 이후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 극도의 교육열이 불러온 참사(?)는 게임 업계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OECD 국가 중 업무 시간 최고점을 찍은 직장인들에게 퇴근 후 술 한 잔만큼 달콤한 것은 없을 것이다. 종종 재벌가 자제들이 마약에 빠져 산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 접할 수 있는데 그럴 만하다. 웬만한 즐거움을 너무나 쉽게 누려본 상태에선 모든 것들이 시시해질 만하다. 이런 것들의 소비는 공통된 정신 작용인 '망각' 돕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안에 대한 정의를 '고통을 망각한다'로 읽기보다는 '고통의 변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잠시나마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라캉이 프로이트의 모토 "그것이 있었던 곳에 나는 있어야 한다."를 "무의식적 충동의 자리를 정복해야 한다."로 읽지 않고, "내 진실의 자리에 나는 과감히 접근해야 한다"로 읽은 것처럼, 지금 이런 논의들은 진실의 자리에 접근하기 위한 작업들이다. 참고로 이 글을 통해 유희 자체를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은 인생을 즐기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꼭 즐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분명 놀이는 거부하기 어려운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아무리 유희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일지라도 우울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니까 가장 완성된 상태로서의 우울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완벽한 절망의 양태로 나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기쁨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다.


(계속...)


 ps. 언제나 그렇게 해 왔지만 앞으로 즐거움을 제공하는 업종의 산업 규모는 더 커져만 갈 것이다. 그것이 우울을 치료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법이고 또한 우울은 없어진 적이 없었던 해묵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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