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공포의 차이 1.
불안한 시대의 '디스토피아' 이해하기
'과거가 현재보다 낫다'는 발상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에서의 '현재'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이 상상한 '디스토피아'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예전보다 현재가 못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의 디스토피아, 즉 지금이 '디스토피아 이전'이라는 말은 여전히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루소가 '자연 상태'라는 개념을 통해 요청했던 새로운 인간성은 시대적 비참함에 맞선 철학자의 고뇌이다. (루소의 글-현재-이 프랑스혁명 70년 전에 적혔으니 '디스토피아'가 70년 후에 종언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텍스트가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그가 독창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은 논외로 치더라도, 시대를 막론하고 유효하게 적용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그에 반해 기술적 발전을 비롯한 '시민 의식'이란 것이 고양됐다는 생각을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루소가 생각했던 머나먼 과거가 아닌 진화론적 도식에 따라 우리의 조상들에 대해 상상해 보자. 루소의 생각과는 반대로 현재가 '최선에 도달한 상태'라 했을 때, 분명 우리의 조상들은 근대화 이후의 사람들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과거의 것들보다 못하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그 속에 약간의 기만이 섞여 들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사고이다. -현인류가 과학이 이룩한 물질적 진보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이견을 달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도 펜이 아닌 타자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문명의 질에 어울리지 않게 현재 범람해 있는 질병과도 같은 감정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부추긴다. 그것은 '불안'이다. 앞으로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우울감, 아니면 국가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거시적 갈등 따위는 개인의 삶에 어떤 불안을 발생시키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감정은 '디스토피아 이전의 현재'라는 표현의 중추에 존속해 있다. 현시점의 문제가 불안을 해소하거나 최소화시키거나 아니면 극복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보면, 어떤 '디스토피아'는 불안과 짝을 이룬다.
반면 불안이 가져다주는 비운과는 반대로 원시의 조상들은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더 불행했다. 정확히는 그들은 '불안'에 대해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직면한 진정한 문제란 공포심을 억누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문제가 되는 사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마른벼락으로 인한 화재나,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로 인한 홍수, 불볕 같은 더위로 인한 가뭄, 그리고 매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밤의 어둠과 굉포한 맹수들의 위협, 그리고 전염병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공포의 계기들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인간 존재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의존해 있는 건 '사피엔스' 수준에 머물러 있는 지성이다. 이것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들이 '불안'을 인식하기가 불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의 불행, 즉 집단적 정서가 공포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원시의 조상을 상상할 것 없이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야생의 동물들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삶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케 된다. 야생에서의 불안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이 감정이 무엇을 조장하는가? 불안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드는데 치중하지 않는가? 그래서 불안에 매몰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안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야생에서 불안에 떠는 개체는 죽음을 표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죽음의 실재적인 영향력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자연에서 먹이 사슬의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또한 우두머리 경쟁에서 밀려 자신의 DNA를 보존할 수 없게 되고, 무리에서도 무쓸모한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불안은 어떤 안정성 내에서만 존속 가능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래전에 야생의 공포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안전한 집을 구축했다. 인류사에서 편리함을 가져다준 여러 사건들은 공포를 배제하는 것에서만 그 사건의 의의를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공포에서 자유로워진 인간 군상은 '불안'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가 있기 때문에 불안한 정서가 형성된 것이다. 불안은 안락과 평온함 같은 외재적 안정성이 없다면 느낄 수 없는 것이며, 현대적 질병이라는 표현도 명확해진다.
불안과 공포의 상관항과 차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이것만큼 좋은 사례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참치 잡이를 할 때 참치를 가두어 둔 수족관에 꼭 한 마리의 상어를 풀어놓는다. 그런데 한 마리의 상어를 풀어놓지 않으면 참치들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모두 죽고 만다. 묘하지 않는가? 공포라는 원시적 감정이 생존에 더 유리하며, 일상에서 흔히 '스트레스'라 부르는 것이 참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효과적인(?) 것이다. 이 두 감정은 어느 정도의 유사성이 있다. 공포와 불안 모두 '생'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척도는 -'죽음'과의 거리감을 따질 수도 있겠지만- 원인이 위치한 곳이 다르다는 것이다. 공포감을 조성하는 어떤 대상(상어)을 마주했을 때, '공포=죽음'이라는 등가적 공식을 성립시킬 수 있다. 반면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죽음을 표상한 것이지 죽음에 곧장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참치는 상어(실제적 죽음)가 없음에도 죽음을 표상함으로써 죽게 되었다. 이런 참치의 정신(?)을 인간에게 대입하면, 불안은 죽지 않고 고통스럽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의뭉스러운 망상이며, 이 망상이 개체를 죽이는 힘이다.
현세대가 누리는 행복감이란 공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서만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공포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공포는 여전히 이해 불가능하며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사피엔스 사피엔스' 수준에 이르게 된 지적 능력을 활용해 우리는 마른벼락이 떨어져도 깜짝 놀라는 것에 그치며,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나거나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드는 현상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댐을 건설했으며,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가로등의 불을 밝히고, 과거에 조상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맹수들은 철장에 갇혀 구경거리로 전락하면서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공포의 계기들이란 지금에 이르러서 별 것 아닌 것이 되었다. 하물며 공포가 유희거리가 되어 영화관을 찾는 소비자들은 이 감정을 느끼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가장 실재적이며 죽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격이었던 감정을 허구에서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바뀌긴 했다. 인간의 상상에 불과한 '괴수'나 '귀신'이 아닌 '사이코 패스'나 '연쇄 살인범'이 허구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런 사람들은 운이 나쁘면 마주칠 수도 있기 때문에, 새롭게 탄생한 색다른 '공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엔 칸트적 의미로서의 '숭고감'을 빗대어도 꽤 괜찮을 것이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이라는 대상의 광활함에 압도당한 초라한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감정의 발생적 조건은 '그 대상이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때'이다. 마찬가지로,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한 계기들이 나에게 직접적인 문제점을 유발하지 않을 때에만 유희거리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원시의 조상들은 어떤 안락하고 평온한 상태를 염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염원들이 무색하게도 현인류는 공포에서 드디어 벗어났음에도 또다시 죽음에 가까이 닿아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게 되었다. 공포가 아닌 병리학적 영역으로 들어서며 불미스러운 부정성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안'이다. 불안한 인간은 이것을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긴 하되, 그렇다고 한 순간에 개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진 않는다. 우리는 이 부정성을 죽음의 극치라 표현하며 '죽고 싶다'는 말이 입에서 세어 나올 정도로 고통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결코 죽으려고 하지 않는 생의 보편성이 동시에 존속하는 모순적인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생의 보편성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항상 개입하는 것일 뿐이다. 오히려 불안의 원인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인 '사유하는 능력', 즉 이 부정성의 원인은 정신의 불가피한 측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현상의 장'에서 벌어지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은 주체적 망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지배적 정서가 '불안'이며, 그리고 '참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도 이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참치가 어떤 낙관적인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참치를 살리는 건 죽음을 가져다주는 '상어', 즉 죽음에 대한 공포였고 반대로 참치를 죽이는 건 극도의 불안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희망할 수 없음'이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처럼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 마음일 터인데, 인간의 착각은 항상 어떤 부정적인 것들에만 메여 있도록 진화한 듯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참치가 어망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원양어선의 어항에 갇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는 것이다.
(계속...)
ps. 불안의 원인이 외재성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유물론적 사고관만큼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