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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26. 2020

'눈'에 대한 사변적 추론

목적론적 사고의 성립 조건

 우리는 항상 감각에 의존해 있다. 오직 감각할 수 있는 대상만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감각할 수 없다면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거나 또는 생각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선천적인 맹인은 사과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보통의 경우 갖고 있는 오감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가? 굳이 하나를 정하면 단연코 '눈'이다. 기억의 덩어리를 구성하는 오감의 영역에서 시각의 우월성에 대해 말해 무엇하겠는가? 몸이 1000냥이라면 눈이 900냥이라는 말처럼, 시각 체계는 어떤 대상을 식별하고 판별하는 데 있어 다른 감각들 보다 우선한다. 또한 우리의 기억도 대체로 시각적인 측면에 종속되어 있다. 이 우월한 체계인 시각은 어느 정도 자의적 통제가 가능하기까지 하다. 눈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을 보면 무작정 어떤 정보들을 수용하기만 하는데, 눈만이 유일하게 열고 닫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우리는 안구건조증을 예방하거나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눈을 수시로 깜빡여야 한다는 수동적인 측면이 있어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눈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은 시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서 시선이란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선에 담긴 무언가를 학습하고 이해하고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말의 역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은 사유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인간의 신체 구조적 한계로 인해 '사유할 수 없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 한계란 두 눈으로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사유할 수 없다.


 스스로가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반론으로, 카메라나 거울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물의 도움이 없어도 물가에 비친 얼굴을 보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허나 반론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진실성'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예컨대, 내 눈으로 어떤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그 어떤 사람의 사진을 보는 것 중 무엇이 더 진실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사진에 담긴 내 모습을 보는 것과 내 눈으로 내 얼굴을 보는 것 중 무엇이 더 진실하다고 할 수 있는가? 당연히 내 눈으로 바라본 것이다. 사진이 더 진실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사진은 실재를 재현하는 파생 실재에 불과하다. 카메라나 거울과 같은 사물을 이용해서 담아낸 모습은 빛의 굴절된 상에 불과하다. 혹여나 그것이 더 진실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실'이 아닌 '미'에 대해 말하고 있을 것이다.


 눈동자는 언제나 진실만을 담아낸다는 엄밀하지 않은 말이 있다. 이 말의 진리치를 따져보는 것에 무리가 있지만 타인의 눈이 얼마나 많은 의사표현을 하고 있는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말과 몸짓뿐만 아니라 눈동자의 초점과 움직임이 타인에 대한 이해 요소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데로, 눈의 기능이 진실함을 마주하는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나 자신의 진실함에 도달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마주하는 진실은 오직 '타자'이다. 타자 또한 하나의 주체로서 타자의 진실성만 마주한다. 즉 주체의 진실성이란 타자에게 국한된 영역이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맞는 꽤 적절한 일화가 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그런데 두 아이 중 한 아이만 얼굴에 검댕 자국이 잔뜩 묻어 있고 다른 한 아이는 청소를 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그런데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도 깨끗할 것이라 믿었다. 반면에 얼굴이 깨끗한 아이는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신의 얼굴이 더러울 것이라며 얼른 세수를 하러 갔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닌가? 이 일화에서의 난감함은 앞서 언급한 인간의 신체 한계에서 비롯된다. 만약 인간의 눈이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일화에서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는 사유 불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모든 불가능은 논리적 불가능이다.- 다시 말해 내가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 거울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 이 한계점을 넘어서기 위해서, 즉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거울'이라는 사물이 발명됐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거울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거울이라는 사물은 오롯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거울을 만든 발명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만들었을까? 물론, 자기 자신의 모습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덧붙여야 할 진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거나'라는 사실이나 또는 '어떻게 보이고 싶다'라는 욕망이 만들어 낸 사물이 거울이다. 즉 거울은 주체의 욕망이 아닌 '타자의 욕망' 자체를 반영하는 사물이다. 실제로도 사방에 나 자신을 비추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이유는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가 주된 이유일 즉인데, 그 이면에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항상 염려하고 있다. 그리고 거울의 모습을 통해 주체는 어떤 기준에 따라 나의 부족한 결점이나 못났다고 여기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최대한 좋게 보이려고 치장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사변은 타인의 사고방식이 주체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굴뚝 청소한 두 아이가 서로를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오해하며 기만하기에 이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눈의 기능적 한계에서도 비롯된 철학적 물음은 '나 자신은 누구인가?'를 묻고 있다. 나 자신을 알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내용들 속에서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적절한 우회로가 있다. 그것은 타인을 척도로 나 자신을 이해하기란 너무나도 쉽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진리값이 얼마나 높을까? 여기까지는 인과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앞서 눈의 기능을 말한 이유는 '고유한 신체적 한계'가 있다는 점을 명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 한계로 인한 사유불가능성은 주체가 자기 자신의 진실된 이미지에 결코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진실됨에 접근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에 의해 언제나 다른 경로를 물색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경로는 욕망이 자리한 곳이다.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분명 거울이라는 사물을 발명해내기도 했지만, 이 생산적인 힘에 의해 도리어 주체의 발이 묶이게 된다. 한 편으로는 거울이라는 사물이 없던 시절에는 타인의 시설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이것에 익숙해짐에 따라 어느새 시시했던 것들은 마땅히 따라야 할 강박적인 무언가로 변모하고, 개인이란 더더욱 사회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집단적 정신에 유배되어 있다는 사실은 간과되고 만다. 또한 거울의 등장 이유가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 수시로 발견되는 감정인 '수치심' 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결점을 생각하는데, 스스로 부끄러이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울이란 사물은 딱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자격지심이라 할만한 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그 연원을 추적해낼 때 만나는 것은 '타자의 혐오'이다. 경험적으로, 어떤 혐오의 기색을 타자가 드러낸 순간 자기 자신을 돌아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혐오가 없었다면 '결점'이라는 개념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점으로 수치심은 타고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성서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을 때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옷을 걸친 것이다. 이는 자신의 나약함의 징후이자 그것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거울'이라는 사물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인과적이며 무의식적이고 보편적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타인의 시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며 누구나 이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주체에게 거울에 비친 모습이란 의존성의 가장 적나라한 표상이며, 거울이라는 사물의 기능의 영향력이란 타자의 영역 아래로 자연스레 스며들어 가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허나, 거울은 현재에 필수품이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무언가'는 사방에 널려 있다. 모든 익숙한 공간 내의 의식은 무작정 무의식을 추종하기에 이르며 맹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인과성 내에서 주체의 자리는 없는 것인가? 주체란 오로지 타자에게 종속되어 있을 뿐인가? 그렇지 않다. 인과적 사유는 절대다수에게 통용되며 자연스러운 것들로, '객관성'이라는 개념을 충족한다. 이와는 반대로 목적론적 심리학은 인과적 문제를 끊어 내기 위한 시도로 '자유의지'를 치켜세운다. -트라우마 따위는 없다.- 그리고 주체의 자리를 선정하는 것은 다시 눈의 기능으로 환원된다. 눈의 자의적으로 통제가 가능한 감각이다. 즉 우리가 보기 싫은 것들은 보지 않을 수 있으며 반대로 보고 싶지 않아도 볼 수 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의지를 유추할 가장 적절한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로서가 아닌 순수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시작점은 눈의 직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순수한 주체라고 한들 정신의 수용 기능과 같이 타자의 존재는 언제나 주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즉 눈이 직관적이지 않을 때에는 그 영향력 아래로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언제나 눌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텍스트들은 인과론과 목적론의 이율배반을 다룬다. 여기서 어떤 객관성의 편린을 떠올린다면 당연 인과론이다. 그러나 언제나 의식이 돌아와야 할 자리는 목적론적 사고이다. 이 둘의 대립은 어느 한쪽을 논외로 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인과적인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야만이, 즉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하는 인간 존재에 국한된 객관적 사유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목적론이 성립할 수 있다.


 지금껏 지속되어온 어떤 윤리적 지침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이유는 인과적 이해의 지반이 빈약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지금 신체 구조와 그에 따른 한계점에 의해 생성될 의식 구조는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관점을 보다 떠오른 생각이다.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미싱 링크'라는 개념을 고안해 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화석들은 과거의 어떤 개체가 현재의 개체로 진화했다는 증거로써 채택되기엔 부족하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 수많은 진화론자와 고고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그 간격이 꽤 유의미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즉 중간 단계의 화석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의 답변대로 창조론자들이 문제 삼았던 것을 해결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창조론자와 진화론자의 논박이 흥미롭긴 하다만 그리 큰 관심사는 아니다.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 '미싱 링크'라는 개념은 꽤 흥미롭다. 칸트 이후로 '목적의 왕국'에 대한 희망의 발로뿐 아니라 옛 성인들의 지침은 간당간당하게만 그 명맥을 있다. 즉 윤리란 언제나 텅 빈 공허함만이 지속된다. 그런데 이 공허함의 이유는 인간에 대한 인과적 이해가 부족한 것은 아닌가? 칼 융의 생각과 같이 프로이트의 인과론과 아들러의 목적론은 이율배반적이긴 하지만 이 둘의 적절한 교합, 즉 이율배반적인 사태들을 등가 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문제점들에 대해 적응하고 발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를 등가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인과적 사고의 미비점이 더 절실히 충당되어야 한다는 점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이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문제가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왜 불가능한 지를 이해하면 된다. 불가능에 대한 이해는 가능한 것들은 더욱 명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ps. 인과성의 객관적 토대에 대해 고민하다가 적은 글이다. 라캉의 거울이론을 이해하기 전에는 해괴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해괴함이 무엇인지 이해가 안 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ps. 일화는 초등학생쯤인 듯한데, 만화로 된 탈무드에서 나온 내용이다. 이게 왜 머릿속에 있는 진 의문이다. 어린 시절이지만 꽤 인상적이었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기억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것이 '인상적인'에 대한 이유는 언제나 하이데거에게 그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꽤 해괴한 생각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데, 철학자들의 말보다 해괴하겠는가? 아무렴 어떤가 싶어서 그냥 한 번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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