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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15. 2020

죽음에 관한 변증적 고찰

사후에 관련된 어떤 믿음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죽음은 탄생만큼 중요하며,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칼 융-


 모든 것들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일이다. 인간은 무릇 언젠간 죽고 마는 그런 존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더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에게 국한된 사안이 아니다. 진화론에서의 모든 생명의 행위는 보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삼으며, 심리학에서는 건강한 정신의 중요성을 말한다. 경제학에서는 윤택하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 Economic의 그리스 어원은 가사 자원의 관리, 즉 가정의 돌봄이다.- 말하고 있으며, 정치는 국가의 존속과 세계의 평화에 주목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어떠한 개인의 생을 보존하기 위한 논의이다. 자유와 책임에 대한 모든 철학적 논의들과 연결되어 있는 현재의 시장 논리들과 이데올로기들도 지금의 삶을 잘 살고자 하는 염원들을 반영한다. 이런 학문들 속에서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음을 배제하고는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을까? 죽음만이 오로지 삶이 무엇인지를 답하게 만들지 않는가. 만약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가정이 따라붙는다면 삶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없을 것이며 삶의 방식도 완전히 바뀔 것이다.


 '죽음' 자체가 무엇인지는 대략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대략적 이해'라 함은 '삶이 끝난다'라고 아주 간단하게 이해하는 정도이다. 즉 그것이 대략적인 이유가 죽음이란 것은 언제나 간접적으로만 체험되며 우리는 죽은 자들의 경험담을 들을 수도 없고 인식가능한 영역으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의 마지막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이다. 이 말이 가장 적절하게 요청되는 영역이 바로 '죽음'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죽음에 대해 말한 꽤 익숙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둘은 예수와 석가모니이다.


 천국과 지옥이 있을까? 개인적으로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이 바람이 무색하게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 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그런데 정확히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자명할 것이다. 앞서 우리가 죽음에 대한 경험담을 들어볼 수 없는 것처럼 천국에 가서야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실시할 수 있고 지옥에 가보아야만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실시할 수 있다. 하물며 천국에 당도한 사람은 지옥이 있는 지를 확실시 할 수 없을 것이다. -삶에서 경험이 대체할 수 없는 항인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간에 정확하지 않다면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알 턱이 없다. 그런데 죽음이 불가항력적이고 무차별적이며 공교롭다 하더라도 중요한 이유는 욕망의 양태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내가 앞서 말했듯이 '사후'에 대한 모든 논리와 논란들은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이 논의는 니체의 텍스트를 통해 좀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그에 대한 사랑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무섭게 분노하면서 가혹하면서도 광적으로 사람들에게 오직 사랑과 사랑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충족감을 느끼지 못했던 가련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그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처넣을 지옥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인간의 사랑의 한계를 알게 되면서 사랑 그 자체이고 완전한 사랑의 능력을 갖는 신을 고안해내야만 했다. 그러한 신은 인간의 사랑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너무나 우매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랑을 가엾게 여기는 신이다. 그렇게 느끼고 그와 같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 자라면 죽음을 희구하게 된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써놓은 이 글귀는 예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니체가 당시의 이데올로기적 환영이었던 '신'에 대한 의존적 연결 고리를 끊어 내려는 시도를 함축한다. 니체가 본 예수는 인간의 사랑이 너무나도 보잘것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실망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것을 고안해서 사람들이 억지스럽게라도 누군가를 사랑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말에 따라 사람들이 지옥이 있다고 믿게 된다면 악행이라 규정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온갖 선행들을 마다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실제로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선행을 거리낌 없이 행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들의 광적인 모습과 사회적 분란이 독으로 작용함에 따라 사람들은 이들을 기피하고 혐오하지 않는가? 오히려 십자가의 계율 아래에서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기까지 하다. 이것 또한 이유가 명확하다. 그들의 믿음은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보증수표이며 잘못을 저지르면 회계를 통해 신에게만 용서를 구해서 면죄부를 얻으면 그만이다. (신은 자비로워서 모든 것들을 용서해주지 않는가!)


 선악의 지지부진하고 공허한 담론들을 뒤로하고 예수에 대한 니체의 통찰을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과 그 둘 간의 불가분적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시로 2014년에 이슈가 되었던 아프간의 산사태이다. 자연재해로 인해 사람들이 흙 속에 파묻히게 되었는데, 그곳을 정부적 차원에서 '단 무덤'으로 선언했다. 그들은 대략 2000여 명가량의 실종자들이 있음에도 단 하루 만에 구조 작업을 중단했다. 그리고 그들은 중단한 이유로 삼은 것은 실종자들의 생존이 불분명하다는 것과 구조 장비가 턱 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나 핑계가 될 여지를 피할 수 없다. 즉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생존자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성과 기술적 결함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의 종교적 믿음일 것이다. 이를 문화 상대주의로 이해해야만 하는 것인가? 산 자들은 묻힌 자들이 그들이 평소에 믿던 교리에 따라 영생을 얻고 천국에 당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흙 위에 있던 자들은 교리적 믿음을 통해 흙 아래에 묻힌 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축하(?)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의 평온을 얻었을 것이다.(종교가 마음의  평온을 선사해주는 매개라는 입장이 합당해질 수 있다) 그러나 흙 속에 파묻힌 사람들의 믿음이 지속되었을 진 의문이다. 흙 아래에 묻힌 자는 구조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죽기 전에 평생토록 믿었던 교리를 바꾸었을 것이다.


 이것에서 비롯해 이데올로기 자체의 영향력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그리고 믿음이 행동을 통제한다는 공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엔 '업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현생과 모든 인연들은 전생의 업보에 의해 결정되는 즉, 전생의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면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되고 전생의 덕은 현세에 와서 누리게 된다는 믿음은 어떤 행동 양태를 띄고 있을까? 이 믿음에 기반해서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한다. 그리고 어떤 생명 -그것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간에- 도 해하지 않음에 따라 다음 생에는 어떤 업보도 남기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즉 현생이 전생의 업을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것이 목적 자체라면, 그 업이 끝나면 성불하고 미륵이 된다. 하지만 만약 현생에 업을 다 풀지 못하면 다른 생에 또다시 고통이 반복될 것이다. 다음 생의 고통이 어느 정도일 진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어떤 고통스러운 상황이 반복된다 해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다고 주워들은 바가 있다.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 -쇼펜하우어-


 특히, 극단적인 생명 존중의 윤리가 발현되는 종교가 불교이다. (물론, 요즘 스님들이 이 교리를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이 윤리인 이유는 '황금률(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을 실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단적 희생의 양태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희생이란 의지와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불교는 어리석은 중생에게 모든 욕망들은 사사로울 뿐이며 세속적인 것들을 비워내기 위해 정신을 단련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고행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억누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제의 미덕에 따라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바라보게 되면서, 그 결과로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믿음의 주체는 대상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아무런 가치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것이 만인에게 적용되고 비대화해지면 세상의 모든 갈등은 종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갈등이란 가치 체계 간의 충동이다.-(이타주의자의 근저에 허무주의가 깃들어 있다는 칼 융의 말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지 않는가?) 그러나 갈등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욕망하지 않음' 자체에서 이미 근거를 둔다. 즉 내가 무언가를 바라지 않음에 따라 누군가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모적인 경쟁을 하지 않고도 타인은 손쉽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니체는 예수를 '너무나 사랑이 넘치는 인간이어서 어떤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 인간'으로 보았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리를 실현시킨 자에게 천국이라는 보상을 선사한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무언가 비슷하지 않은가? 또한 예수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들의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살아생전에 만난 적도 없는 두 성인의 통찰이 변절 없이 전해져 내려왔다는 가정 하에서, 인간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는 듯하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란 그들이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논리적 연역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성인의 말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건 인간의 믿음은 해소되지 않는 모종의 두려움을 가리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두려움 자체는 믿음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예수와 석가는 인간의 심리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탁월한 지성의 소유자였을 것이다. 즉 사후에 대한 두려움을 현세의 행동의 중축으로 삼아서 사람들을 통제한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가치가 폄하된다거나 윤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내가 아는 선에서- 죽음 이후에 대해 말한 유일무이하며 최초격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소설에 등장할 법한 모든 사후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들은 이 둘의 논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그들이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다면 현재까지 축적된 무수한 텍스트들과 이미지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사람은 없다.


 나는 좋고 편해 보이는 인상(만만함과 한 끗 차이인)이라 그런지 길을 걷다가도 통칭 '사이비'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자주 잡히는 편이다. 그러나 그들을 혐오하기보다는 기꺼이 대화를 나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왜 그렇게 사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그들은 공통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그 감정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생을 바란다. 특히 눈여겨볼 점은 그들은 나와 나의 조상들을 위한 일이라는 이타주의적인 말을 건네지만 그것은 수단이며 위장일 뿐이다. 그들은 실증적이지 않은 믿음을 통해 본인들의 은밀한 목적을 달성한다. 여기서 목적이란 자신의 덕을 쌓는 것이다. 그들은 부적(겨우 종이 쪼가리) 하나를 태워서 자신의 덕을 쌓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또한 '불신지옥'을 확성기에 대고 외치는 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천국에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들이 천국에 가는 방법은 성서에 적힌 지침들을 전달하는 것, 즉 예수의 말을 전도하는 것이다. 예수의 말만 전하면 천국에 간다니, 신은 한 편으로는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 (무지한 사람들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자는 누구인가?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무엇을 믿을지가 항상 문제가 되어 왔다. 이 믿음의 부재는 '바다 위를 정처 없이 떠도는 배'로 종종 비유적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래서 믿음이란 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믿음에 의해 현세의 행동 방식이 정해지기 때문에 무엇을 믿을지가 항상 문제가 된다. 정치적으로 양갈래로 나뉘어 소모적인 다툼을 벌이는 것부터 친구 사이에 사소한 갈등까지, 모든 이원화의 최종 심급은 믿음의 차이인 것이다. 죽음 이후에 대한 편향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말을 따르는 듯하다. (딱히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현재 우상화된 질서로 자리 잡은 과학계의 영향력이 아닐까? 20세기 전반에는 비합리적인 믿음을 종식시키기 위해 무신론을 강조해 왔다. '비합리적'이란 종교적인 모든 믿음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노력한다고 한들 종교계는 사후세계나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 그것이 그들이 삶의 의미로 삼는 유일한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이라는 자명한 결과를 내어 놓으면 된다. 그렇다. 이미 불가능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 중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삶의 행동들이 달라질 것이다.


1. 죽으면 끝이다.

2. 죽으면 끝이 아니다.

3.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참고로 나는 종교는 없지만 유신론자이면서도 신은 믿지 않는다. 물론, 내가 믿지 않는 신은 종교계에서 말하는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신이다. 반면 의미 부여에 그치고 말겠지만, '신'을 사유하고 정의 내린 철학자들의 말은 좋아한다. 이것이 내가 유신론자라면 유신론자인 이유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죽으면 끝이 아니다'라는 2번의 입장을 고수하기 때문에 이런 글을 적었는지도 모르겠다. 1번을 선택할 경우 '침묵을 종용해야 할 사안'들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여러 가지 의미로 삶을 즐기는 데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3번을 선택한 경우는 자명한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하나 인식적 한계를 통감한 사람일 것이다.

 

 2018년 안락사를 택한 104세 호주 과학자가 이슈가 되었다. 그는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스위스로 날아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는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들었다. 죽음을 축하한다고? 그럴만하다. 그에게 삶이란 일련의 무의미함이 시작된 순간에 끝이 났으며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바라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사람을 보고 떠오른 사람은 '칼 융'이다.


 3대 심리학 거장 중 한 명인 융은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가 근거로 삼은 것은 '정신의 기능'이다. 우리는 현재에 머무르지만 과거나 미래를 넘나들면서 시간적 제약을 벗어나고 또한 공간적 한계도 초월해버릴 수 있다. 이 기능을 근거로 '죽음 이후에도 '정신'이라는 것이 지속된다면?'이라는 추론적 믿음을 구성했다. 그래서 이것이 왜 필요할까? 정신분석가인 그의 치료 대상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그들에게는 왜 이런 생각이 필요했을까? 치료 대상은 바로 노령한 사람들이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인, 즉 죽음이 코 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언제 죽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임종의 순간이 코앞이라고 느끼며 이것이 부지불식 간에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온함에 시달렸다. 융이 보기에 그들은 앞 날을 바라보기 힘들어하고 겁에 질려 있어 과거를 돌아보기만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 이런 믿음을 부여한 순간부터 그들은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사소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삶을 더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칼 융의 생각에서 행복에 대한 정론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든지 무언가 해야할 만한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있다고 해서 안락사를 택한 호주 과학자가 삶을 다시 살아갈 의지를 가졌을 진 의문이다. 104세면 솔직히 죽고 싶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혹시나 그 사람의 정해진 수명이 110세 정도 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타나토 노트>에서 어린 두 주인공은 페르 라세즈 묘지에서 죽음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이 인상적이어서 프랑스를 여행할 때 그 묘지에 갔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그런지 그곳에서 불현듯 공자가 제자에게 한 말이 떠올랐었다.


'삶도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논하겠는가'


 이 말을 현답이라 믿고 살았었는데, 여전히 삶이 아닌 것들에 골몰하는 걸 보면 나는 우둔한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게 더 행복한 듯하다.


 ps. 지옥이 있기를 바라는 자는 어떤 불합리함에 분노하는 자이며, 천국이 있기를 바라는 자는 불온한 망상에 시달리는 자이다.


-참고-

<조세 일보> 아프가니스탄 정부, 산사태 지역 '집단 무덤'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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