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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08. 2020

혐오, 불가피함과 기능적 효과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혐오하는 방법

 혐오란 감정은 일상적이다. 혐오하는 것을 악행이라 규정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그 규정 자체를 배제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 그러니까 혐오가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혐오는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윤리의 가장 근간이 되는 감정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무언가 잘못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힐난하긴 한다만, 그 의중은 타인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다. 가령,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를 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고 치자. 그 눈빛은 경멸을 가득 담고 있으며 입가에는 조소가 번지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이 건네는 무언의 압박에 의해 쓰레기를 다시 줍게 되었다. 푸코가 비판한 '판옵티콘'은 '타자의 응시'의 합치이다. (물론, 그 배후에 실재적으로 입증된 권력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오래전부터 질서를 규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총 3가지 정도의 행동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앞서 예시를 든 것처럼, 그 무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쓰레기를 줍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냥 무시하고 아무런 행동 교정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그 사람이 나에게 건넨 혐오를 동일한 방법으로 건네는 것이다.


 이 행동 방식들 속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 솟구치고 있다. 첫 번째의 경우 당연히 반성에 따른 수치심이다. 내 행동에서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나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얼굴에 속된 말로 철판을 깐 것이다. 그냥 남을 딱히 신경 쓰지 않는 사람으로 타인의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이런 태도가 굉장히 각광받고 있는 듯한데, 타인의 현존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어떤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마지막은 타인이 나에게 준 수치심에 정면으로 도전해서 그 사람을 동일한 방식으로 혐오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반성'이라는 사유 능력 자체가 결여된 사람일지도 모른다.(2번째와 3번째 중 무엇이 더 나쁜 것으로 보이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여담으로, 대한민국에서 타인의 충고나 조언을 간섭, 참견, 오지랖 등으로 치부하는 태도가 만연해 있는데, 즉 눈치를 주는 자체에 반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눈치 주는 것이 오롯이 나쁜 것이 아니다.


 요즘같이 혐오가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세상이 있었을까 싶다. 물론, 혐오는 언제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범지구적인 조화와 유아론이 교묘하게 공존하는 세상에 살게 되면서 혐오하는 방식은 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이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이점을 누리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한다는 윤리적 항을 자연스레 이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방금 의무라는 표현을 썼지만, '윤리적'이라는 표현에 강조점이 찍힌다.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할 때 윤리와 법은 둘 다 규율이긴 하되, 윤리가 자율적이라면 법은 강제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윤리가 더 광범위하고 애매한 것들을 지칭하는 반면 법은 윤리보다 협소하지만 더 강하게 적용되며 어길 시에는 처벌이 따른다. 이에 따라, '인터넷 예절'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면 강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내용이 텅 빈 공허한 형식에 그치고 만다. 결국 윤리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자율성'이며, '의지' 자체의 의미이기도 하다. 칸트의 법철학에서의 '선의지'의 의미란 자발적 규율이 된다. 그러나 칸트의 노력이 무의미할 정도로 인터넷 상에서는 익명성을 이용해 서로를 헐뜯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반면 욕망의 관점에서는, 어릴 때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었었는데, 여전히 시행되지 않는 것을 보면 대중들은 익명성의 효과를 은밀하게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보다 익명성 자체에서 발생하는 이점이 만인에게 더 유익한 것인 즉,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보다 은밀하게 즐기는 데에 더 큰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이를 비약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은 누군가를 혐오하고 싶거나 또는 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른다. (익명성으로 인한 문제가 '표현의 자유'라는 것에 대한 추종이라 한다면 그것은 맹목적일 뿐이며,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표현의 이기적 방종'이라고 고쳐 쓰도록 하자)


 은밀한 방식을 작동시키는 혐오를 간단히 정의하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나의 자존이나 신념, 즉 어떤 의미로서의 '소유'에 문제가 생겼을 때 타인을 혐오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쉬운 일들 중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우리는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경험적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이 도식에 따라 혐오에 대한 반작용은 언제나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혐오는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혐오 자체는 관계의 단절을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힘이다. 그러니 혐오하지 않는 방법이나 혐오 자체의 원인에 주목하는 것은 관계가 부지불식 간에 사라져 버릴 위기를 이해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종식시키는 건 자율성이라는 불안한 요소에만 존속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자율적인가?- 절제의 미덕이 강조하거나,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고 있다는 건 가히 놀라울 만한 도덕성의 소유자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리고 혐오를 하지 않는 것, 즉 그것을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회성의 항이라고 규정 하더라도 이것은 언제나 실패한다. 왜냐하면 혐오의 주체가 지정한 혐오의 대상들은 또 다른 주체이다. 그리고 혐오의 대상으로 지정된 주체들이 혐오를 당하면 자체적으로 동일한 혐오를 생성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방식이기 때문이다.


 혐오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척도들은 언제나 자신의 가치를 고수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도덕이란 말인가? 도덕의 역할인 제대로 된 옳은 일을 규정하고 갈등을 무마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에 반해, 현재의 도덕은 언제나 상대를 억누르는 폭력적 기제로 활용되는 한에서만 유용한 도구로 보인다. 그 속에서의 도덕의 기능이란 더 그럴듯한 논리를 활용한 지성의 감투를 쓴 자를 승자로 만드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반박할 수 없을 정도의 지성을 들이밀어서 상대방을 멍청이로 만드는 것은 논쟁에서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그나마 유일하게 혐오를 정중함으로 포장하는 방식으로 떠오르는 건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일 것이다. 즉 스스로가 얼마나 무지한 지를 깨우치게끔 유도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들키기 싫어하는 것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멍청이라고 낙인 찍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화를 낸다. -Voltaire-

 

 ps. 부제는 움베르트 에코의 저서인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인용한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의 저서는 당연히 다 읽지 않았다. 못한 것이기도 하다. 6개 국어에 통달한 석학이었던 그가 적은 글들은 너무 어렵다. 책을 읽으면 내가 모르는 내용이나 개념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해하기는커녕, 읽는 내도록 지적 수준에 대해 반성만 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르는 개념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읽었던 과거의 열정은 없기에, 일단은 바보로 남기로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불국사에 적혀 있었던, '어리석음과 깨달음은 같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문구로 움베르트 에코의 깨달음과 나의 어리석음을 동일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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