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는 건 앎과 무지가 교차되는 그 경계지점에서만 가능해진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글을 쓰면서 항상 느끼는 건, 글이란 내가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적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글쓰기는 진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재차 캐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반복컨데, 주체는 앎이라는 범주 내에서만 존속한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언어는 결코 적힐 수 없을 것이며,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경계지점에서 드러나는 무지에 의해 의심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건 무엇 때문인 지 알 수 없다. 이 반복적인 물음의 원인을 단순하게 호기심 때문이라고 갈무리 지을 수도 있겠으며, 아니면 무지함을 싫어한다던가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는 듯하다. 이러저러한 설명들을 해 놓아도 만족스럽진 않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반복이 일어나는 이곳이 '심연'이라고 불리는 곳이 아니던가. 아니면 인간 지성이 나아가야 할 '실재'라고 칭해지는 곳이던가. 어쨌든 그 와중에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주체가 발화 행위를 수행하면서 항상 불가해한 의존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그렇듯, 오롯이 나만 알고 있다고 철저히 믿는 무언가는 독단으로 남는다.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언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언어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움베르트 에코가 자신의 저서 <장미의 이름>에서 적은 문장을 인용하자면,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언어에 대한 의존에 대해 생각하면서 제약을 하나 걸어 놓았는데, 그것은 어떤 주장을 받아들일 때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며 특히, 형용 어구에 대해서는 치밀하게 경계를 하는 것이다. 형용사는 발화 행위 내에서 개별적 성향을 드러내는 가장 핵심적인 지표라고 생각한다. 가령, 우리는 어떤 사물의 형태를 보고 '완벽'하다거나 아니면 몹시 '아름답다' 정도의 주관적인 느낌을 갖는다. (가장 익숙한 예시로는 사람마다 선호하는 외모가 다르다는 것 정도겠지만) 형용 표현으로 지칭된 사물은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이 반영되어 가치가 부여된다. 가령, 다이아몬드 원석을 세공해 만든 반지는 그 재료가 단단해서 쉽게 변질되지 않는다는 속성을 갖는 덕에 사랑의 상징으로 취급된다. 사랑하는 자들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사량을 서약하는 것을 넘어서, 그 맹세에 '영원성'이라는 속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이아몬드 반지를 구입한다. 그런데 다이아몬드 반지가 정말 연인과의 이별이나 이혼을 막아줄까? 확실히 그렇지 않다. 이것은 마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부적이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미신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다이아몬드 반지에 엄청난 값이 매겨진다. 미신적인 믿음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 단순히 취향의 문제라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그 너머로 존속하고 있는 것은 '영원함'에 대한 갈망인 것이다. 즉 반지의 구매자는 사랑이 변치 않기를 원하고 있다. 뭐, 다시 생각해 보건대, 이 반지가 사랑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반지를 살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의 소유자라면 경제관념의 차이 때문에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지의 소유자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영원하게 지속하고자 하는 시도가 성공할 것이라고 보장하지 않는다.
이렇듯 인간은 사물에 항상 욕망을 투영시켜 왔다. 실용주의적이고 기술적인 관점을 넘어서는 것도 모자라서배제하기까지 하면서, 사물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필요 이상의 것이 반영돼 있다. 그렇다면 '신성한 폭력'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신성함이라는 수식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폭력이라는 행동 앞에 이 단어를 위치시키는 건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닌가? 제목의 '폭력'이라는 행위 앞에 붙은 '신성한'이라는 수식어조차 주관적일 수박에 없다. 이 말은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를 읽다가 접한 표현이다. '신성'이란 무엇인가? 지젝의 수사는 주관적이며, 그가 밝힌 데로, 이것이 객관적이라 할만한 척도 따위는 없다. 이것을 보증하는 대타자도 없다. 이것을 신성하다고 추정하는 위험은 전적으로 주체의 몫이다. 그러나 여기 적힐 글은 '신성함'에 대한 주관적인 지침이 아닌 '폭력'의 객관성에 대한 논의이다.
우선, 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공자는 겪지 않고 아는 것이 상책이고 겪고 나서 아는 것은 하책이라 말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나?- 하지만 상책이란 불가능한 듯하다. 인간은 자신이 겪은 것들에 대해서만 이해하고 말한다. 그래서 반성적 사고란 언제나 사후적이다. 가령, 지금도 제3세계 국가 어디선가 총포에 의해 죽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며, 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고 한들 아사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글을 고쳐 쓰고 있는 와중에도 누군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사건은 어디에선가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일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나와는 완전하게 무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뉴스에서 살인 사건이나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거기에 대해선 분노를 금치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비인간성에 대한 추문을 떠올리며, 우리가 불미스러운 사건을 마주한 당사자와 공유하고 있는 땅덩어리 위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하게 된다. 우리는 나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자가 겪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공유하여 생각하는 동일화의 추론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한 대응책으로 법적인 처벌을 강화하자고 순진무구하게 주장한다. 이것이 왜 순진무구하냐고? 사형제도가 도입되면 범죄가 사라질 것 같은가? 단언컨대, 온갖 고문방법을 총동원하여 범죄자를 극악무도하게 처벌하는 방안이 도입된다 할지라도, 인간은 반드시 '죄'라고 규정된 것을 저지른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눈을 가리기 위한 사회적 안전장치 따위를 고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굳건한 믿음으로 대대로 계승되고 있는 정언이 하나 있다. 그것은 '폭력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이다. 이 말은 뉴스에서 종종 흘러나오는 폭력 사태를 보고 공포심을 느끼거나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수용할 법한 말이다. 이 말은 분명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문제 삼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훼손되기가 너무 쉽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예시는 '정당방위'이다. 어떤 범죄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가해자를 공격했는데 하필 가해자가 죽어버렸다. 그 즉시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그 사람은 악인인가? 법적으로는 그 사람이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기 때문에 가해자로 지목받기 충분하다고 지적한다면, 법이란 참 무기력한 범주이다. 그럼에도 폭력이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법이나 윤리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엄밀한 논리적 연역을 요구하는 것과는 반면 간단하게 인간은 신체적 고통으로 인해 발생하는 불쾌함을 기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폭력이 나쁘다'는 논리정연한 연역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도 충분히 직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것은 하물며 어린아이도 그렇다. 맞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만약에 당신이 마조히스트라 해도 '신체적 고통'이라는 낱말 앞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라는 수식을 달아 놓겠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과다출혈로 죽어가고 있는 중인데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진정성을 의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쨌든 우리는 폭력에 대해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배워왔다. 경험적으로 납득할 만해서 의심을 품기가 더 어렵다. 앞서 언급한 '정당방위'란 결국 어디까지가 적절히 방어적인 행동인 지가 관건이 된다. (적절히요?) 그러나 이 예시는 어느 정도의 여지를 만들어 놓을 순 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말은 '폭력은 정당화되기 어렵다'는 정도로 변형되어 아주 작은 여지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지조차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인 '신성한'이라는 수식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폭력을 행하는 일을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이 표현은 그 자체로도 모순적으로 이해되며 배척되기 십상이다.
아주 선량하고 평범하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의 경우엔 폭력을 좋아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조차도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을 순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때로 분노하기 때문이다. 분노는 우리가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거나,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아니면 나의 자존을 보호받지 못했다는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위협에 대응하는 정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분노하진 않는다. 우리는 이 감정이 인간관계를 해침에 따라 주체를 고립시킨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왕이면 갈등 상황이 발생해도 말로 좋게 푸는 것을 선호한다. 여기에서 언어의 사회적 기능이 드러난다. 반면 언변 및 어휘력이 부족하여 자신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바를 제대로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시로 말을 하지 못하는 유아는 조금만 불편하면 성을 내거나 울며 떼를 쓴다. 그렇다면 아이는 왜 떼를 쓸까? 간단하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이 충족된 상태를 자유라고 규정한다면 자유롭지 못하다는 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리심리학적인 관점에서 폭력의 발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꽤 흥미로운 예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붉은 원숭이와 호르몬의 분출량에 관련된 관찰 값이다. 연구자들은 붉은 원숭이 무리에서 5-HIAA라는 물질이 뇌의 전전두피질로 적게 분출되는 원숭이들을 추려냈다. 관찰 대상이 된 원숭이들은 집단 내에서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였는데, 그런 원숭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가 7m 정도 되는데도 아무런 목적 없이 도약하는 과감한 행동을 보이고,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기 위해 서로의 털을 빗어주는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는 애교 수준-그럴 수도 있잖아?-으로 보인다. 그러나 늦은 밤중에 호르몬이 적게 나오는 원숭이 한 마리가 성체 수컷 2마리에게 덤벼들다가 다음날 변사체로 발견되거나 아니면 포식자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고 맞서다가 결국 죽었다. 그 원숭이들은 분노라는 정서를 통제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공격적인 행동은 죽음을 자초했으며, 5-HIAA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뇌척수액을 통해 덜 공급되었다. 그 물질은 전전두피질에 공급되어 세르토닌이라는 호르몬을 촉진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인간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라는 지칭과는 반대로 인간은 비합리적이라는 견해가 20세기의 주류 사고로 자리 잡았다. 아무래도 1,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라 더더욱 외상에 의한 비정합적인 행동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으며, 비합리성에 대해 귀추가 모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반-이성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굳이 역사적 이력에 따른 철학적 계보를 가져올 필요도 없이 '분노'라는 정서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일상의 경험에서도 우리는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종종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분노라는 정서는 원숭이들의 예시와 같이 자기-통제력을 상실했을 때에 발생한다. 특히 우리는 분노하고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건네는 요청은 '일단 진정하라'는 말이다. 그 감정이 잠잠해지기 전까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건넨다. 의식적으로 분노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을 것이다.
분노라는 정서와는 별개로 세르토닌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는 사례가 있다. 그것은 정치철학에서 단골 주제로 다루어지는 들어봤을 법한 예시인데, 달리는 기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한 명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공리주의적 사례이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기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상태이고 계속 달리면 철로 끝에 서 있는 5명의 사람이 죽게 된다. 그런데 중간에 기차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스위치가 있고 그 스위치는 내가 잡고 있다. 그 스위치를 누르게 되면 기차의 주행 경로가 바뀌게 되어 단 한 명의 사람만 죽게 된다. 양적으로 5명의 생명이 1명의 생명보다 값어치가 있으니, 공리주의에서 합리적인 선택이란 과감하게 스위치를 누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금 다른 설정을 부과하면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게 된다. 설정에서의 차이는 스위치를 눌러 기차의 주행 경로를 바꾸는 것이 아닌 나보다 덩치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 사람을 철로로 밀어서 기차를 멈추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합리적인 선택은 과감하게 그 사람을 철로로 밀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선택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고 결괏값도 같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망설이기 시작한다. 스위치라는 매개변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선택하거나 아니면 직접 밀어야 한다는 과정에서의 차이만 존재할 뿐인데도, 우리의 뇌에서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실험에서 말하는 바는, 스위치를 눌러 간접적으로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우와는 다르게, 직접 자신의 두 손으로 밀어야 하는 경우에는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즉 세로토닌이 더 많이 분출되는 것이다.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를 두었을 뿐인데도, 스위치를 누르는 것보다 직접 밀어야 하는 것이 정서적으로 더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즉 인간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면 할수록 세르토닌이라는 호르몬을 더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통제와 관련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게 된다. 세로토닌 호르몬은 별칭으로 '포옹 호르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이 호르몬이 인간의 사회성의 요소로 지대하게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세르토닌이 분비되지 않는 사람은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충동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
물론, 이런 논의는 철학적 유물론적 관점과는 무관하다. 사실 자연에서 여러 생물들이 인간처럼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간단한 반박이 가능한데, 인간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복잡성을 생물의 근본적인 욕구 활동-굶주림, 배변, 수면, 섹스-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원숭이랑 인간이 같아요?- 어떤 '욕구'의 단순성을 인간사의 복잡성과 비교하는 이유란 동물들도 하는 행동을 인간들도 하기 때문이겠지만, 비교 불가능한 이유는 '욕망'이란 간단하게 서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적으로 인간 존재를 환원시키는 과격함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충동이 동물적 갈망의 일정 부분을 충족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분노함'이라는 정서적 표현에 대한 발생론적인 차이가 있다면,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서, 즉 가난함 때문에 화가 나는 것과 소외되거나 존중받지 못해 화가 나는 건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후자는 배가 부른 것인가?)
사실 범죄에 대해 논하는 건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의 기능적 역할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분비되는 것과 인간의 정념이라는 것을 갖는 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포나 연민, 죄의식 아니면 분노와 같은 정서는 분명 사회적 조건과 그에 따르는 믿음의 차이에 의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을 하나로 일치시켜 표현하면 '상상력'이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며 걱정하는 이유는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을 부정적 상황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연민이나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부정성을 주체의 위치에서 대입하여 상상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사건으로 분노를 하거나 선에 대해 회의감을 갖는 이유는 '유토피아(없는 세계)'를 상상하며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서들을 갖게 만드는 건 비-실재를 향한 정신적인 활동 때문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이런 정신적 활동들이 주체를 기표 속에서 소외시키고 이미지와 주체를 분리시킨다. 주체는 이러한 분열을 겪는다. -현실이 언제나 불만족스럽고 자신이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을 씻을 수가 없다- 여기서 세르토닌의 역할은 철학적 의미로서 환원시킨다면 의지라는 개념에서 '절제력' 정도이다. 앞에서 세르토닌이 전전두피질에서 분비된다고 했는데, 인간의 정서를 관장하는 뇌의 영역은 '편도체'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래서 편도체가 활성화되지 않거나 또는 문제가 있는 경우엔, 세로토닌 호르몬의 결여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 예시로,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던 한 남성이 자신이 범죄를 저지를 것을 계획하면서 유서를 적었는데, 유서의 내용이 독특했다. 그 내용은 자신의 뇌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뇌를 해부해볼 것을 요청한 것이다. 그 남성은 총기를 난사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나중에 뇌를 열어보니 종양이 생겨 편도체 부위를 누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서도 인간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근본적인 만족감과 호르몬 분출에 대한 사적인 희망사항을 염두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은 좋은 만남이 호르몬을 분출시키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 예로, 분리불안 증세를 겪는 환자가 자신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인이나 믿을만한 임상심리학자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편도체가 아예 활성화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범죄를 저지를 때 치밀하게 계획적이고 냉철하게 움직이는데, 세로토닌은 정상적인 수치로 분출되고 있었다. 그런 자들은 범죄를 나쁘다고 인식하기는커녕,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까지 주장한다. 그들은 선천적으로 반사회적인 인간들이다. 여기에서 반사회적이란 무반성적이고 무비판적인 태도를 일컫는다. 그들은 상징적 질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자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처벌을 통해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수모적인 것이나 치욕 따위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성을 기대할 순 없다. 반성적 사고란 연민의 감정에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폭력도 폭력 나름이다. 모든 폭력적 사태를 보고 모두 동일하게 비인간적인 행동이라 단순하게 규정하지만, 각각의 사태에는 각기 다른 원인을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철학적 유물론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충동에 관한, 무의식에 관한, 정념에 관한 담론들이다. 간단하게는 모든 개별적 주체를 최대한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 곧 사회적인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방침이다. 앞서 공리주의의 사례에서 유물론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자면, 기차 브레이크가 고장 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그들의 원대한 목표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위적 성향인 자기 파괴성을 최대한 감소시키고자 하는 것이 지젝이 '신성한'이라는 수식을 붙여 방법적으로 혁명을 옹호하는 이유이다. 좌파 지식인들이 역사의 종말을 예견하는 사건을 계속해서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억압된 징후로 남게 하기 위함이다. 외상적 징후란 언젠간 회귀한다. 그러나 '신성한'이라는 비-인간적 수식은 보편적이지 못하다. 즉 어느 누구나 마땅히 그렇다고 따를만한 지침이 되질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현시점에서 신성함을 적극적으로 수긍하는 자들의 분개함이란 그들의 고뇌이다. 그런 자들은 자신의 신체도 그 낱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마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살고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겪고 있지 않을까. 또 매일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릴 텐데, 그들은 '도파민 과잉'이라는 불행이자 축복을 달고 태어난 자들이다. 그러나 반복하기를, 신성함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표도 없으며 보증해줄 대타자도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믿음이며, 여기서 폭력의 객관성에 대한 논의하는 이유는 주관적인 믿음이 범사회적으로 방대한 의미로 관철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성한 폭력이라는 표현은 정당방위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정당방위가 죄가 되는 세상이다.
투쟁적인 역사를 쟁취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모든 개별적 존재자들에게 '용기를 가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합당할까? 사실 이 말에 의해 주체는 결정 장애를 겪는다. 결정 장애는 더 나은 것을 판단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구조적 억압에 대한 대안으로 '폭력'을 선택하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꽤 무책임한 발언인데, 그것을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라는 요청으로 보충하고 있다는 것이 더 의문이다. 현실을 인식하고자 하는 주체에게 '상상'의 기능이란 무엇인가? 상상이란 애매하게 그지없다. 그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대한 견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불가능의 이유이기도 한데- 선험성이 애초에 결여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을 묘사했을 때는 그렇게 처절하고 참혹할 수가 없었는데 막상 천국에 대해 적어보려 하니 빈약하게 짝이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천재 시인 단테는 현실에서 지옥의 처절함을 묘사할 소재들을 넘치도록 발견할 수 있었던 반면, 천국을 위한 소재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인간의 사유가 경험한 것들에 국한된다는 협소성이 발견된다. 아니면 이런 건 어떤가?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이 세계를 읽어낸 것들을 통해 전개될 법한 상황을 연출해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를 연출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당연 허구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나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상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 주체는 자연스럽게 그 희망과 분리되며 현실이 매우 불만족스러워질 것이다. 용기를 갖는 것보다는 불만족이 터져 나오게끔 만드는 것이 더 쉬우며, 불만족은 용기보다도 더 솔직한 정서이다. (사실 시간문제이긴 한다만)
나는 갖갖은 인간의 성향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제도적으로 구축시키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있으나, 내가 바라보는 미래상-만약 그것이 일어난다면-은 꽤 삭막하긴 하다. 그렇다고 딱히 문제적이라고 할 것도 없다. (지금이라고 딱히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니!) 그러나 봉착한 문제는 남녀 간의 사랑마저도 통제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괴롭게 만들긴 한다만, 뭐 어쩌겠는가. 이왕 결심했으니 사랑에 부여해 놓은 자유와 관련된 쓸 데 없이 고귀한 관념부터 철저하게 파괴시켜야겠다. 어떤 이상향에 대해 에둘러 말하는 것이긴 한데, 자폐증을 앓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나 훨씬 좋은 일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선택은 항상 주체의 몫이다.
이것을 시작하게끔 이끈 말이 있다. 그것은 반사회적 인격장애, 흔히 사람들에게는 익숙하게 '사이코패스'불리는 자들에겐 '영혼이 없다'라고 주워 들었기 때문이다. 출처는 밝힐 수 없지만, 이런 신화적이고 미신적인 문구는 종종 괴기스러운 창작물에서 감정이 없는 존재를 그릴 때나 간혹 설명으로 등장하는 문구이다. 현실에서 어떤 문제적인 징후가 관찰되는 사람에게 '영혼이 없다'는 말보다는 '편도체에 문제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과학이 신흥 종교로 부흥하는 시대이니 굳이 '영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사실 편도체니 영혼이니 하는 원인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는 건 딱히 중요하지 않다. '정서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판별할 수 있는 관찰 가능한 징후가 중요한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런 개념들을 다루기 때문에 공부를 한다.
최근에 2년 전에도 느낀 감정을 한 번 더 느끼게 되었는데, 나는 자꾸 겁을 먹는 탓에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움베르트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지식의 정복은 언어에 대한 공부를 통해서 가능하다. 공부할 일이다! 허나 의기소침해할 것은 없다!'라고 적어 놓은 문장을 보고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게 되었는데, 새삼스럽게 감명을 또 받는다. 무엇 때문인지, 나는 항상 의기소침해 있다. 그리고 엄밀하게는 에코의 책에서 발췌한 저 문구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쓴 문장으로 알고 있다.
ps. 2008년도에 출판된 저서에서 참조한 내용들이라 바뀐 내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교재를 대학 강의를 위해 구입했는데 그 시점이 2017년도이다. 지금 새로운 개정판이 출간됐는 진 모르겠으나, 원래 개정이라는 게 완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만 수정되어 다시 출간되는 것이니, 내용상 진위여부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