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고찰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Aug 06. 2020

니체와 정신분석 - 기억의 변증적 소여에서의 주체

'의지의 부정성' 관한 논의

 주체는 끊임없이 재현되는 기억의 내부에 존속한다. 그리고 주체의 기억은 변증적이다. 추억이라고 규정되는 기억은 계속해서 긍정되는 기억들이며 그와는 대조적으로 추억이 되지 못하는 기억은 계속해서 지양된다. 그리고 자아의 변증법적인 구성은 '반복'이라는 개념에 종속되어 있다. 긍정과 부정과는 별개로 이 반복되는 기억들의 순환하는 고리가 주체가 겪어내야 할 숙명이다. 이것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일상의 의미를 부각시키는데, 일상이란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기도 한 양가적인 규정이다. 이것을 '일상성'이라는 표현으로 함축하면 이것에 내재되어 있는 관념이 '반복'인 것이다. 동일한 것의 순환, 그 순환이 선순환이든 악순환이든 간에 주체는 이 순환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따분함을 느낀다거나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무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인데, 포괄적으로는 '공허'라는 정서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 정서로 인해 주체는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를 부단히 해야만 한다고 부추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씻을 수 없다.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방구석에 가만히 누워 숨만 쉬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불행을 겪는다. 이것을 토대 삼아 칼 융은 일종의 우울한 감정을 겪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라 말한 바가 있으며, 후설의 현상학에서 '지향성 : 의식은 항상 어디론가 향한다' 개념과도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반복컨데, 이 '반복'은 살아생전에 끊임없이 일어나며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반복을 재현해 내는 형이상학적인 주체가 철학사에서 가장 획기적이라 할만한 개념이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사유가 인과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상정할 수밖에 없는 주체일 수도 있다. 기계론적 인간관에서 '데카르트의 무대'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주체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며, 모든 것들이 뇌의 기능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이란 것이 단순히 물질의 결과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우리가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글에서는 미신과 관련된 진부함을 반복하게 될 터이지만,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 '반복'의 원인이 아닌 '반복' 자체이다. 이것을 근거 삼는 인물은 니체와 그의 개념인 '영원회귀', 그리고 정신분석의 '외상'의 반복적 현전이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 의지의 기능적 역할에 대한 진리치가 발견된다.


 첫 문단에서 적은 내용들은 니체의 '영원 회귀' 개념이 핵심적인 부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가 이 개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교두보가 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의지는 새로운 의지로, 욕망은 새로운 욕망으로, 의욕은 새로운 의욕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 말은 농담적으로만 소모되는 표현인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항상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에서 '욕망이 끝이 없다'는 말을 대변한다. 이 말에 말미암았을 때 염세주의자에게 있어 인간의 욕망이란 사사로운 것에 그치며, 여기에 끊임없이 사로잡혀 항상 고통스러워하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의 저서에서는 '의지의 부정'에 대해 다루고 있다. 즉 욕망이란 것을 자의적으로 부정하는 의지의 부정성이 인간의 마음에 평정을 가져다줄 것이라 보았다. 그는 분명 허무함을 권유하고 있다. 그 허무의 이유가 인간에게 희망이란 것이 우연의 연속과 인식적 오류로 인해 규정된 허상에 불과하다는 딱히 틀리다고는 할 수 없는 근거에 초점을 두고 있어 더욱 그것을 반박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니체의 의문은 간단했다. '그래서 의지가 어떻게 부정되는데?'이다. 니체는 이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끊임없이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의 연점에서의 고통을 담대히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이로써 쇼펜하우어의 말은 옳다. 인생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 고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 니체의 정언이다. 니체의 '영원 회귀'는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해 시사하고 있다. 즉 쇼펜하우어의 끊임없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는 역동을 인간의 본성으로 개괄했으며, 저 무상한 말들을 전복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도덕(옳음)을 세운 것이다. 현시대에 고통을 감내하는 태도가 강조되고 있다. 시장에서 소비되는 자기개발서만 보아도 그렇다.


 요약컨데, 니체의 '영원 회귀'라는 개념은 '극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의문스러운 것은 이 개념을 어떻게 불교적인 관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지이다. 여기엔 엉큼한 구석이 숨어들어 있다고 생각되기까지 하는데, 그 주장이란 니체의 이 개념이 사물의 변화에 대한 인식, 행성의 공전과 자전으로 인한 계절의 순환, 그리고 그 순환이 곧 전우주적으로 '생의 반복', 즉 영의 순환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심적인 영역에서 단편적인 부분을 엿볼 수 있는 니체의 사상이 불교의 '업보' 개념으로까지 비약적으로 격상한 논지에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가 주는 느낌, 즉 언어의 외양의 고상함과 유사성만이 종교적 개념과의 연관을 보증한다. 이 주장을 합당하게 만드는 어떤 개연적 논리나 근거에 대해 들은 바는 아직까진 전무하다.


 이런 형이상학적 사유를 시도해야만이 '반복'이나 '순환'의 연원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완전히 배제하기란 어렵다. 흄이 형이상학의 실패지점에 대해 고찰하며 그 철학의 계보를 재정립한 것에 반해서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믿음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불가능을 점지하려는 의도 또한 착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논할 문제는 '반복' 내지 '순환'이란 것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입각한 추론과 '의지'의 기능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한 것은 삶에서의 무한한 반복으로서 체현하는 허무에 대한 경계이다. 실상으로도 이것을 느끼는 자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해야만 한다. 일상에서 사람들의 행동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시는 여행을 간다거나 아니면 소비 활동을 통해 내 옆에 익숙하지 않은 신선한 느낌을 주는 사물을 구매하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하게 사람들은 '기분 전환'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분 전환을 원한다. 그러나 한계라고 착각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 지점에서조차 욕망은 새로운 욕망으로 변전한다. 절대 멈출 수 없는 역동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짓는다. 그러나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기분 전환이란 것을 많이 해야 하면 할수록 어떤 압박감에 휘둘리고 있을 가능성이 더 많다. 종종 '역마살'이라고 불리는 것이 끼어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항상 어떤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다.


 다른 예시로 시장에서 소비 활동에 있어 '충동 소비'라고 불리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소비 활동은 분명 사람들의 기분을 바꿔 준다. 그 활동을 통해 얻은 효용이 '자유 시장' 개념을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충동 소비'라고 불리는 현상은 온정주의적 관점에서 절제의 미덕에 대한 요청을 함축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저서에 밝힌 '의지의 부정성'에 대해 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의지의 의미가 '절제력'이라는 것은 아마 익숙한 내용일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적 관점은 니체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기억의 범주에 대한 니체적 지침은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설파함과 '의지의 부정'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과는 반대로 이것이 필요한 사람들은 외상적 징후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주체의 역사적 이력을 재차 환원시켜야 할 필요성과 더불어 시간의 실존성을 재구상하기 위해 망각의 유예를 피해야 한다는 지침이 주어진다. 기억이란 언젠간 잊게 된다는 것을 아주 보편적인 진실이라고 여기지만, 그 망각되었다고 믿고 있는 기억이 현존재의 존재함을 규정한다. 그 기억은 의식적이지 못하며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없을뿐더러, 심지어 현실에서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즉슨, 그것의 실패에 따른 귀결점이자 가시적인 행동 양식으로 가장 극단적인 선택은 '자살'이다. 자살은 죽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기억에서, 본질적으로는 부정적 정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분명히 그들은 살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저서의 이 말은 자살을 생각하게 만드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담아낸다. "내게는 모든 것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더 이상 의욕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내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이것은 외상에 대한 부정과도 연관되며, 아무런 제약 없이 자동적으로 소여되는 그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자살'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이런 취지에서 쇼펜하우어가 자살을 의지의 긍정성이라 본 것이 합당해진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믿음이다.


 그 기억을 그만두기 위해 자살을 선택하지만 오히려 자살은 그것을 성공하는 방안이 되기는커녕, 심지어 고통을 더 강화시키기에 이른다. 다음 내용은 미신에 기반한 것이라 믿거나 말거나이다. 자살을 하게 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죽은 자리에서 억겹의 세월 동안 쌓아온 업을 반복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려면 유일한 출구는 '구원'이라는 것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 또한 전생에 덕을 쌓아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방금 적힌 말은 삶이 충분히 의미있다고 여기거나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에겐 궤변으로 치부될 것이다. 이 해괴함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쾌적한 사유를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에겐 효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은 그들이 원하는 것-기억에 관한 고통을 멈추는 것-을 삶을 끝내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겪고 있는 심리적 압박보다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더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는 암시가 온전히 거짓이라고 한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택을 유보시키기엔 충분하며 잠시나마 '사는 것'에 대해서 고민할 시간을 갖도록 만들 수 있다. 단순히 '삶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로 죽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을 회유하기보다는 '죽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것이 극단적 선택을 멈추게 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현전하는 욕망을 관두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더 큰 욕망인 것이다.


 각설하고, 각기 다른 두 가지 관점에서 발견되는 사실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 존재는 기억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반복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일이다. 라캉은 이것을 '무의식이 열린다'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주체는 의지로 하여금 기억에 대해 긍정할 수도 있으며 부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지의 긍정성'이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나에게 꽤 긍정적인 영향-쾌락 따위-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좋은 것이니 수용하는 데 별다른 거리낌이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단순히 정신의 감응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반면 의지에 대해 확실히 존재하는 것은 '의지의 부정성' 말고는 없다. 인간 존재가 어떤 고난이나 역경을 안겨주는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의식적으로 격려를 마다하지 않으며 또는 스스로에게 명령을 한다. -힘을 내자!- 그 암시를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것은 긍정이라기보단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닌가. 니체는 삶과 자신의 운명을 예찬-amor fati-하며 최대한 긍정하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 배후에 수많은 의지적 표현은 어떤 부정적인 것을 대면했을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더해서 '부정'은 정신분석-특히 후기 라캉-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도 일맥한다.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구축해 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에 대해 이해 및 거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의지'라고 불리는 낱말이 사유 구조에서 시사하는 것을 단순히 '규정성'으로 생각하고만 있었는데, 무언가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만이 의지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가 아닐까.


 그런데 여기도 여전히 문제가 팽배해 있다. 그래서 '의지'란 무엇인가? 이것은 여전히 미지의 것이다. 이런 문장 몇 줄 가지고 의지가 무엇인지 말하기엔 부족하기만 하다. 또한 의지에 대해 이런저런 교육을 행한다고 한들 정신병리적 증세를 겪고 있는 사람의 병이 고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정신분석의 치료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 하이데거는 단순히 의지를 가지라고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더 명석한 사고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의지'라는 주체의 착각일지도 모를 자율적 성향에 힘을 실어 견해를 피력한 것이 아닌,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건을 끌어와서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비본래성에 대한 거부를 의지를 통해서가 아닌 명백히 실존하며 언젠간 겪을 운명에 대한 서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능하도록 이끌어낸 것이다. 앞서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사유 구조-욕망을 그만두는 것은 더 큰 욕망이다-와 동일한 것이다. 그 사유는 욕망의 상쇄나 가로막음 따위라기 보단 신경을 쓰지 않음, 즉 무관심이다.



 다시 니체에 대해 돌아오자면, 더군다나 니체는 자신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보고서 던진 저 의문-의지의 부정이 어떻게 가능한가?-을 그대로 실천해 보았을 심산이 크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고독을 묵묵히 견디는 낙타에서, 고독을 지배하게 된 사자로, 그리고 초인으로 제시한 '어린아이'로의 귀결이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선언하고 있다. 특히 '어린아이'를 그 끝으로 삼은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한 번은 어린이 집에 봉사를 하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어린 친구들을 세심히 관찰해 보니 니체가 말한 것과 동일했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놀이란, 새로운 놀이를 만드는 놀이였다. 그것을 하는 연유에 대해 물으니 아주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지금까지 했던 놀이들은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니체가 초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로 어린아이를 지목한 이유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이란 모든 것들이 새롭기만 하기에 이 세상을 항상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볼 수 있으며, 또한 새롭고 창발적인 생각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매 순간 새로이 굴러가는 운명의 바퀴가 니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분명 미쳐버렸다. 나는 니체에 대해 설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니체가 40살부터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말년엔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니체의 사상과 더불어 그가 살아온 행적이 특이하다는 것과 또한 분명히 그가 인간의 심리에 대해 명석하고 깊이 있게 통찰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여하튼 니체가 미쳐버린 이유는 '의지의 부정'과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써, 최근에 시간을 쏟는 생리심리 관련 저서에서 본 사례 때문이다. 그 사례의 주인공은 '단기 기억 상실증'을 겪고 있었다. 그 환자는 잠시 전에 한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환자는 똑같은 잡지나 소설을 수십 번을 읽어도 흥미를 잃지 않았다. 읽은 내용을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반복해서 읽은 내용은 항상 새로울 수밖에 없으니, 그 내용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환자가 니체가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한 '초인'과 다를 게 무엇인가? 의지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공상적 태도를 통해 병리적 증상 조차도 재현해내려고 한 것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여기서 니체가 의지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은 어린아이로의 회귀, 즉 기억을 자의적으로 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든 기억에 대해 부정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니체의 마지막 저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유고작이자 미완성 작품이다. 그런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미쳤으니 말이다. 참고로 과학의 급격한 발전이 일상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와중인데, 고통스러운 기억을 제거시키는 약물 치료 방법이 연구되고 있기도 하다. 약물 치료는 쥐를 통한 임상 연구 결과에서는 효과적이었다고 하는데, 해결해야 할 문제는 그 문제적 기억과 관련된 신경에만 약물이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려다가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될 수도 있다.


 니체가 자신의 저서인 <선악의 저편>에서 천재의 전형인 인간류에 대해 피력한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종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자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지만 너무나 호기심이 강해서 항상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존재". 이는 정신병리학적으로 강박 관념이며, 강박은 라캉적으로 '욕망의 잔여'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잔여물'이라는 것에 대해 주체가 어떻게 인지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서 '찌꺼기'로 전락하는지 그 여부가 결정된다. 그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기억을 의미한다. 그리고 각별히는 우연하게 발생했을 터인 상황으로 인한 기억에 '필연적'이라는 의미가 부여돼 그것이 곧 미래를 위한 존재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필연'이라는 의미 부여가 어떻게 가능한가? 모르겠다. 여담으로 니체의 저서는 천재를 위한 저서이다. 그것이 일반적인 지성의 소유자에게 먹혀들기 위해서, 즉 대중적인 저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니체가 한 말을 선택적으로 걸러내야만 한다. 니체를 말하면서 고독-독존-과 창조적 유희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선택적'이라는 수식을 쓴 이유이다. 니체는 분명 고독을 견디라고 말했다. 결코 값싼 위로를 건넨 적이 없다. 그런데 니체의 이 지침조차도 쇼펜하우어의 저서에서 나왔다. 쇼펜하우어의 저서에는 '고독을 얼마나 잘 견딜 수 있는지는 지성의 척도'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과거엔 고독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선 고독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즐기기 위해서 고독이 필요할 뿐이었다.


 철학 서적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던 순진한 시절에 지식을 탐구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학문을 추구한다면 삶이 무료해질 터가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식에 끝이 있을까? 그러나 그때가 순진한 시절이었던 이유는 학자는 가난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학자의 부류는 대략적으로 3가지 정도였는데, 원래 부잣집에서 태어나 물질적 제반 조건의 풍족함으로 먹고사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극소수와 명성을 얻은 덕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소수이다. 그리고 둘 다 아닌 대다수는 그냥 가난했다. 사실 순진하다는 것과 어리숙함은 동의어이다. 그런데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도 계속해서 자신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정신적이라기 보단 존재적 유희이다. 그렇다면 호기심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어떤 대상이 낯설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낯섦을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상하리만치 궁금한 것이 없다.


 ps. 여담인데, '반복'에 의한 정서와 의지의 기능에 대한 관점은 오래된 연인에게 질려버려서 새로운 만남을 추구하려고 애쓰는 바림기가 가득한 사람에게 보이는 성향과도 다른 점이 없는 듯하다. 바람을 피려는 사람들의 의도는 일부일처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가? 그들에겐 이 제도가 불편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맥베스는 비운의 주인공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