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꽤 오래전부터 구전으로 내려온 말인 듯한데, 우리의 선조들은 이 말에 대해 얼마나 심려 있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아마 앞선 세대의 사람들이 아무리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들, 과학이 발전한 작금의 시대보다는 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웃을 때 일어나는 신체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면, 일단 우리가 웃게 되면 횡경막의 수축에 힘입어 막대한 양의 산소가 신체 내부에 공급된다. 그리고 우리가 박장대소할 시에 신체에 총 650개의 근육 중에 231개인 약 1/3 정도의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이 운동성은 우리가 강도 높은 운동을 할 때보다도 훨씬 더 효율적이며 효과적이라고 한다. 거기에 더해 생리학적으로 일상생활을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엔도르핀'이라는 호르몬이 분출되는데, 그 호르몬은 스트레스와 관련된 호르몬들의 분출을 억제시킨다. 이는 곧 신체 면역력이 높아지는 것과도 연관이 된다. (그렇다고 한다...) 이 정도만 해도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또한 굳이 과학적 지식들을 열거하지 않고서라도 저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웃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여태껏 본 적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웃고 있을 때 직관적으로 행복한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배를 움켜 잡을 정도로 웃긴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미미한 정도의 웃음을 흘리기도 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 실소를 머금기도 한다. 웃게 되는 상황이 우리 몸에 아주 미세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조차도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웃는 일을 마다할 마땅한 이유란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웃음이란 배제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배제하고 싶지도 않은 정서로 이해된다. 더군다나 웃음은 존재론적인 차원의 원초적 정서이기도 하다. 웃음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감정이다. 누군가가 웃음을 참으려고 할 때를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웃음을 쉽사리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웃음을 참는 사람은 그것을 참으려 하면 할수록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웃음을 참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반대로 웃음을 억지로 수행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깝다.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입 주변부의 근육을 있는 힘껏 끌어올리면서 미소를 지어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남들에게 충분히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진실되지 않다는 점에서 불가능이다. 이것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저 단순하게 주변 분위기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이며 억지이다. 우리가 억지로 하는 일들에서 좀처럼 흥미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함의는 자기 자신에게 투명하고 정직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으로써, 행복을 겨냥한 정언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웃음이란 것은 왜 발생할까? 이 정서는 주체와 어떤 대상성과의 연관 속에서만 그 유래를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대상성이란 단순하게는 가시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물부터 시작해서, 홀로 있을 때의 관념의 범주에서 재현되는 이미지적 기억까지도 내포한다. 혼자 있을 때 웃는 사람을 보고서 미친 사람이라고 인식하기에 이르지만, 이는 그 사람에 대한 호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또 느끼고 있는 지를 그 사람이 입을 열기 전까지 알 턱이 없다. 물론 우리가 웃는 상황은 대개의 경우 실존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빈번히 드러난다. 특히 웃게 될 때, 웃음의 대상이란 '낯선 것'이어야 한다. 그 대상은 주관의 의도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다. 즉 웃음은 그 낯섦을 대면했을 때에 발생하면서 동시에 그 대상을 주체적으로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태와의 마주함이며 또한 그 의도치 않은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긍정할 수 있어야만 웃을 수 있게 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 유머에 실패하는 유일한 경우는 딱 한 가지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머가 '진부한 것'일 때이다. 즉 그 대상이 낯선 것일 때에만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유머가 성공하기 위한 조건 2가지를 더 추가해야 하지 않나 싶다. 추가될 조건이란,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는 유머를 접하는 사람은 그 유머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유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웃기보단 어떤 것을 이해하려고 할 때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말귀를 잘 알아먹는 사람은 해야 될 말의 1/4 정도만 말해도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 지를 금세 알아 차리는 법이다.
나머지는 그것이 충분히 긍정적으로 수긍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유머의 내용물이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즉슨, '진지한 것'이다. '진지한'이라는 수사가 가리키는 곳은 금지된 영역이다. 즉 현실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불가능'한 실재이다.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캐릭터 '조커'는 사람을 죽이거나 온갖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기행을 펼치는 인물이면서도, 미친 듯이 웃어 댄다. 그의 반사회적 행동 앞에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거나 또는 두려움 앞에서 침묵한다. 조커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의 얼굴을 재인하며 'why so serious?'라고 묻는다-다들 왜 이렇게 진지해?-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심연에는 딱히 경계라 할만한 것이 그어저 있지 않다.
웃음이란 주체와 어떤 대상성과의 연관 속에서만 발생한다. 우리가 익살맞은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나를 웃게 만드는 사람은 내 앞에서 유머러스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행동은 내가 예측할 수 있는 범주의 바깥에 놓여 있다. 우리가 웃긴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내용들은 평범이나 일상과 같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난 양상들이다. 그리고 유머의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나는 그 대상의 행동과 말투를 맥락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긍정하고 있다. 반면에 웃음을 유발하려는 자는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희소함이라는 정곡을 찔러야만 한다. 희극인들이 머리가 좋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상상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유머의 대상에게서 '익살맞음'이나 '우스꽝스러움'과 같은 형용수사를 부여한다는 것은 동시적으로 무언가 부족하다거나 모자람, 불충분함 같은 '결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유머를 행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건 스스로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행위 자체이다. 즉 지적 인격체인 사람이 스스로의 가치를 절하시키는 것이다. 희극인들이 무대 위에서는 타인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무대가 끝난 뒤편에서는 우울감을 견뎌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희극인들이 공황 장애를 겪는 사례는 수두록하다. 참고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유머의 대상을 마주하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주체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통해 얻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 쇼펜하우어의 웃음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모호하지만 꽤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웃을 때 우리의 마음에는 명예스러움에 관한 열정이 스쳐 지나간다.'
누군가에게 웃음을 선사한다는 건 또 다른 주체격인 타자들에게 있어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에게 있어서는 꽤 슬픈 일일 지도 모른다. 공자는 '우둔한 자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이 모인다. 겉으로 우둔하되 속으로 현명하라'라는 격언을 남겼다. 공자의 말처럼 실제로도 우둔해 보이는 자들의 주변엔 사람이 많이 모인다. 그러나 이것이 타자들에게 충만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 익살맞은 대상에 대해 아주 조심스러우면서도, 때로는 신중을 기하면서, 가끔은 과감하게, 우월감을 충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둔함에 대해 얼마나 긍정할 수 있을까? 웃음의 체계나 기능 따위를 모른다 할지라도, 웃음거리가 된다는 건 몹시 기분 나쁜 일 중 하나이다. 그리고 도대체 현명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우월감을 충족한다는 것이 가학적 유희의 본질이다. 타자를 마음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통제적 환상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이 유희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듯 사회적 관계망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섭렵하고자 한다. 그 쾌감 속에서 주체는 타자에게 의존함에 따라 고립감을 제거시킨다. 주인 덕에 노예가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은 지배적인 힘을 고수하고자 하는 어떤 방법론들을 창출하겠지만, 이와 동일하게 주인조차도 노예가 없인 살 수 없다. 그리고 이 유희는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를 퇴색시킨다. 인간은 자유를 열멍한다. 그러나 '자유'란 것이 독립적일 수 없음에 따라 자유는 도피의 대상으로 치부된다. 이 도피적 성향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지칭보다도 존재에 대한 더 근본적인 정의일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가학성을 무의식적으로 수긍하는 사람들은 가학성에 대해 문제삼기는 커녕, 열등감이나 박탈감 같은 부정적 정념들을 아주 탁월하게 소거시키는 해소법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가학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길 좋아하며 타자에게 비판 아닌 비판을 수용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타자가 나의 비판을 수긍하지 않는 것에 왜 불만을 품고 화를 내는가? 비판의 목적이 타인의 올바른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것이 화를 낼만한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비판하는 자는 비판의 대상을 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발화에 숨겨진 의도가 그는 존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리고 그들이 뱉는 말들은 그들이 살아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론 이것의 이유는 '고독'일 것이다. 니체의 저서 중 하나의 제목은 고독한 인간이 원하는 바가 가감없이 드러난다. <이 사람을 보라!>
가학성을 필두로 한 행동 자체엔 '유희'가 숨어들어 있다. 그리고 그 근원은 '존재함'이다. 그렇다고 이 충만한 즐거움에 생생하게 전도되는 사람은 이것에 대해 절실히 이해하고 있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스스로 의도하는 것조차 아니다. 그저 이 행동만으로도 인간은 정체 모를 고양감에 젖어들기에 그냥 이것을 행한다. 특히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결코 자기 자신을 우스꽝스러운 대상으로 만들면서 주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소의 대상이 될만한 사람들을 물색하기만 한다. 결과적으로 유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롯이 타자이다. 이것은 가학성이 '의존증'이며 자유의 의미가 퇴색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격하게 나아가면 자연스럽게 상하 서열이 형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세 가족의 각각의 가장인 기택과 근세 그리고 동익이 등장한다. 이 셋 중 주인공격인 기택은 근세처럼 대만 카스텔라 사업을 벌이다 실패했다는 동일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기택에게 근세의 존재란 익살맞은 타자였을 뿐이기에 그 어떤 동정도 베풀 의향이 없었으며, 근세가 실패한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그의 불성실한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기택은 동익에게 '가장의 무게'를 들먹이며 유대하기를 희망하지만, 마찬가지로 동익에게 기택은 역한 냄새를 풍기는 익살맞은 타자였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신의 옹졸한 자존심을 문제 삼을 생각이 없기 때문에 결코 단합할 수 없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선언이 실패하는 이유이다.
웃음은 그 대상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이것에 대해 우리가 웃긴 하되 그렇다고 그 대상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변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웃음의 대상을 선정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인 즉슨, 그 대상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는 웃음을 배제할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웃음이란 그 대상을 자연스럽게 배제하게끔 기능한다.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심리학적 지침에 의거하면 그 사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의 자존감을 누락시키는 말을 한다면 마냥 웃고만 있으면 그 사람은 정말로 내가 괜찮은 줄 안다. 성격이 좋은 사람이 만만이 사람이 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상대방이 정중하지 못하다거나 상대방의 말에 의해 자신의 기분이 나빠지게 되면 확실한 의사표현을 하라고 조언한다. 물론 타인이 나를 조소의 대상으로 삼았을 시에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고 넘길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인식하기엔 내가 꽤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로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유쾌함의 정체란 무엇일까? 그것은 주체적인 관점에서 유머의 내용이 '진지한 것'이 아닌 또는 사실과 무관한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을 나눠보자면, 나는 친구들과 농담 삼아 서로를 '노예'라고 부른다. 한 친구의 직업은 사회적 인식 내에서도 위치가 꽤 높은 편인 은행원이다. 벌이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 친구는 최근에 한국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내 집 마련'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친구에게 '1등급 노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의 직업은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꿈꾸는-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인- 9급 공무원이다. 우리는 그 친구에게 '9등급 노예'라는 신분을 부여했다. 물론 나는 그 친구들보다 못한 위치라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런 신분에 대한 규정들은 사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농담 삼아 서로에게 혐오의 말들을 주고받으면서도 희희낙락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규정들이 진실이었으며 그 밑에 '진정성'이라는 각주가 달린다면 어떻게 될까? 즉 우리는 진실되게 '노예'들이었으며 그 말을 사실적으로 수용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결코 웃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진지하지 않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다행히도 계급제도란 것은 사라졌으며 염려할 필요도 없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내가 노예라는 것을 보증할 만한 그 어떤 객관적인 지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낙인은 도리어 혐오적 지칭이 충분히 유머의 내용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며, 전혀 진지해질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까지 한다. 작금의 시대에 계급을 칭하는 표현이 과거로부터 거슬러 올라와 여전히 사용되긴 하지만, 그것은 오래전에 유효성을 상실했다. 더해서 우리가 서로를 지칭하는 혐오 표현을 듣고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서로에 대해 악의가 없기도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옹호하는 자본의 시대에서 '노예'가 된 까닭은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반대로 계급적 표현에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다른 예시도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직역하면 '귀족의 의무'이다. 그래서 누가 귀족인가? 민주주의에서는 모두 다 같은 '시민'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말'이라는 것 그리고 곧 '언어' 자체에 지배력이 있듯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언어적 수사는 그 대상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마찬가지로 웃음이라는 정서를 유발하는 대상이 된다는 건 주체로서 꽤 모욕스러운 체험일 지도 모른다. 말이 힘을 갖는 것처럼, 웃음은 그 대상을 배제시키는 힘을 갖는다. 그런데 웃음의 기능이란 앞서 가학성에 대해 설명 및 기술한 내용을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즉 웃음은 그 어떤 지식의 편람들 보다도 우선적으로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을 뿐, 윤리적 관점에 의해 '가학성'이라는 각주가 달렸을 뿐이다. 웃음이 기능하는 예시로,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풍자 문학'이 있다. 풍자의 예를 들어보자면, '미다스 왕의 당나귀 귀'가 있다. 요컨대, 미다스는 신분적으로 '왕'이었지만 우스꽝스러운 '당나귀 귀'를 갖고 있어 이를 숨기려고 급급했던 인물이다. 당나귀 귀라는 낯설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인해 '왕'이라는 사회적 위치도 함께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격하된다. 웃음은 무겁고 진중해야할 것을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풍자의 대상이자 웃음의 대상이 된 미다스 왕은 비판의 대상이면서도 과격하게는 파괴시켜야할 대상으로 취급되기에 이른다. 여담으로, 왜 귀가 당나귀 귀가 되어버렸을까? 아폴론 신이 자신을 기만한 벌로 귀를 잡아당겨 당나귀 귀가 된 것인데, 이는 좀 더 잘 들으라는 의미이다.
웃음의 본연적 기능에 의해, 그리고 혐오가 가미된 조소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진실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이것으로 인해 계급, 즉 누가 위에 있고 아래에 위치하는 지를 확연히 가르며 또한 웃음의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이것에 의해 주체의 '역량'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의 '역량'이란 존재론적 '차이'에 관한 개념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역량'은 유머의 기준이 된다. 웃음을 통해 주체의 도덕관념, 이해력, 그리고 상상력이 드러난다. 앞에서 유머의 조건에 대해 말한 것들을 재차 상기해 보자면, 그 세 조건에 의해 세 가지 규정이 도출된다. 하나는 유머의 주체는 진부한 것을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유머의 주체는 유머의 내용물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유머의 주체는 진지한 것, 즉 웃어야할 상황과 웃지말아야 할 상황을 구분하는 기준선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따라 '선을 넘지 말라'는 말은 아주 심도 있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언제나 그 '선', 즉 기준이란 것을 정했다. 그런데 도덕관념과 이해력 그리고 상상력이라는 세 개념을 구분했지만, 사실상 모두 같은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혐오적 표현을 기꺼이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이 수행한 그 발화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까? 무심코 던진 그 발언은 언제든지 자기 자신도 해당될 수 있다는 신체 구조상의 회귀가 전제된다. 자신이 뱉은 말은 언젠 다시 자신의 귀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예컨대, 예수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격언을 남겼는데, 이 말을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와 동시에 말이 주체를 어떻게 사로잡는 지를 이해할 수 있다. -죄가 없는 자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슴지 않고 돌을 던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죄가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죄에 대해 관대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 관대함의 원인은 자신에게 해당될 만한 사항이 전무하다고 절실히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해 주체가 발화에 종속되지 않고 틈새로 빠져나가버리게 되는데, 반면에 발화에 종속된다는 것은 곧 가능성에 대한 염두이기도 하다. 가능성이란 주체가 타자화되는 지점인 욕망의 연점에서만 고려될 수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이 지하방공호에 살았던 근세를 혐오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이 지하방공호로 도망치듯이 쫓겨나게 될 결말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과 유사하게 타인의 물질적 풍족함이 원대한 이상향 아니면 외적인 모습 따위에 대해 질투하고 시기하는 이유란 마찬가지로 본인에게 해당사항이 없기 때문이다. 소외된 주체는 상징적 질서에서 배제되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역량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질투와 시기에 기대어 발산되는 혐오의 정서는 자신의 무기력을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의를 품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웃음거리가 되면서 배제되는 것을 아주 솔직하게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 문제는 그런 부정적 정념들이 얼마나 정당할 수 있는 지가 관건이다.
우리는 왜 타인이 던진 사소한 말 한 마디에 기분이 나쁠까? '자존감'이라는 표현은 꽤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이것은 나를 존중하는 것과 더불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충만함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이것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불분명하지만 그 고상한 의미만으로는 납득하기엔 무리가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자기-존중을 무작정 권하는 말들은 나에게 억지서러울 따름이다. 서점에는 자존감과 관련된 도서들이 빼곡히 들어 차 있지만,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지가 여전히 의문스러울 뿐이다. 이런 책들이 보장하고 있는 한 가지 심리적 진실은 요즘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이다. 사실 이것은 자존보다는 믿음 내지 신념의 문제가 아닐까? 자신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 때문에 신념이란 것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본인이 애초에 신념이란 것을 가져보질 못한 것이다. 그러나 신념을 갖지 못하는 것 따위보다 더 큰 문제는 산재한 문제들을 진실로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는 순간일 지도 모른다. 그 지점에서는 애써 유지하려 했던 사소한 일상마저도 붕괴된다. 이를 구태여 실현시킬 마땅한 이유란 것이 있을 진 의문이다. 아는 것이 힘인가? 아니면 모르는 것이 약인가?
글을 계속 쓰다 보니 드는 생각인데, '명예'라는 것은 존재함을 보증하는 명백한 지표인 듯하다. 이 명백함이란 알려진 한해서 그렇다는 것이지만, 확실히 대다수는 명예스러움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명예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의 시선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곧 '명예'이다. 그리고 주체가 이것을 원하는 이유는 '타자'란 최초의 시점에 이미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존속은 탄생의 순간이 주체적이지 않다는 것을 함축한다. 자식을 낳는다는 건 부모의 선택이다. 나의 이름조차도 내가 직접 정한 것이 아닌 태어나 보니 그렇게 불리고 있었을 뿐이다. '타자'란 내가 존재하기 시작한 최초보다도 우선적으로 존재한 것이다. 이 세상엔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 또한 이것이 가장 의미있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명예를 '타자의 시선'이라고 인식하게 된 뒤부터는 내적 동기란 것이 많이 사라졌다.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문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신기해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