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복습
글을 쓰거나 길을 걷다가도 뇌리를 스치는 내용들에 지겨울 정도로 '진부함'이라거나 '새삼스럽다' 등의 수식을 달아 놓게 되는데,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니 대게의 경우 수십 번 생각해 본 내용일 때에야 그렇다. 이미 내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내용들을 환기시킬 때의 느낌에 걸맞은 표현이 자동적으로 따라붙게 된다. 문제는 그런 물음들에 대해 마땅한 답변들이 여전히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는 불길한 신호도 들린다는 것이다. 언어 놀이에서 헤매고 있다는 것만큼 확실하다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나의 생각은 독단적이다. 유아론적 발상이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좀 더 깊이 파고들어 정식화하는 방향만이 유일한 탈출구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두 가지 정도의 표현 말고도 '이미 체현하고 있었던 것의 반복'이나 '상기' 개념 따위를 빌려와 조금 유려하게 생각을 정리한다면 설득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누군가에게 귀감이 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또는 말을 하면서 확실히 정해 놓은 목적, 아니면 은밀한 바람은 타자를 동일자로 포섭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니피앙의 우위를 통해 타자를 더 이상 낯선 타자로 남겨놓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이는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비판에서 기초로 삼고 있는 고찰, "아름다운 영혼은 자기가 비난하는 무질서에 의해 살아간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이 세계의 무질서함, 즉 예측 불가능성은 불안의 정서와 상관관계를 맺는다. (나에게 타자란 무질서함인가?) 하이데거에게 이 세계에서의 존재자란 아주 잠시 동안만 머물다 떠나는 피투된 존재인데, 그 존재는 이 세계가 무엇인 지를 명확히 이해할 순 없지만 자신의 삶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소명을 갖는 존재이다. 특히 20세기의 저서에는 '죽음' 또는 그와 관련된 정념과의 논의가 종종 등장하는 듯한데, 아마 20세기 양차 세계 대전이라는 죽음을 적나라케 현전한 사건이 불안정성을 극대화시켰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인류의 오점으로 남은 사건이 끝난 이후에 전쟁에 참전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외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보고 프로이트가 '죽음 충동'이라는 생존 본능에 반하는 개념을 주창하며 생물학과 결별을 고했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죽음'이란 것은 영원한 모호함으로 남아 있다. '죽음'의 속성이란 간접적으로만 체험할 수 있으며 무규정적인 것, 결코 해명될 수조차 없거니와 영원한 애도의 화두인 것 같지만 일상에서는 관심거리조차 되질 못한다. 예수와 석가가 독창적인 사상가인 이유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 말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 지성의 수준에서 인식되는 그들의 불가해함은 신비화되거나 희화화된다. 신비화 또는 희화화가 인간이 불가해한 것을 받아들이는 두 가지 태도이다.
라캉의 말데로,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는 괴테의 말을 전복하여 '태초에 말이란 것이 있었다'는 말을 수용하면, 언어는 어디에나 있었다. 인간은 세계라는 미흡하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에 맞닥뜨려진 숙명이지만 언어를 통해 이 세계의 어두운 부분을 거두어 낸다. 언어를 통하지 않으면 나의 생각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란 고사하고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언어가 '사유' 그리고 '의식'이라 불리는 것을 포괄적으로 담아내기엔 그 자체로 너무 협소한 도구라는 회의적 주장도 있지만, 그런 자들조차 회귀하는 곳은 언어이다. 다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언어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질서 정연함을 담당한다.
언어를 통해 우리는 어떤 행동을 강요받기도 하고 종용하기도 하지만 이를 토대로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여러 방면에서 소모되는 언어는 인간을 동물과는 다른 지적이고 인격적인 생명체로 분류하는 척도가 된다. 그로써 인간은 무질서함에 대항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체가 마주한 타자는 불가해하지만 담화라는 방식을 통해 양자를 규정하는 '낯섦'을 제거한다. 우리는 내 눈 앞에 있는 타자와의 완벽한 동일성을 결코 구현할 방법이 없지만 우리는 그러한 느낌을 받는다. 주체와 타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구축하는 것이 언어이다. 더욱이 언어는 상호 주체성을 충족시킬 때에만 제대로 기능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발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학문적 권위를 재생산하는 것일 따름이지만 나는 항상 모종의 회의에 부딪힌다. 그것은 실존적 타자와의 소통-불능에서 한계점에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불능 상태가 만들어 내는 일종의 간극, 즉 타인과의 심적 거리감에서 주관은 언제나 독단으로 남는다. 주체는 상징적 질서에 얽매여 있다는 라캉의 말과는 별개로, 상징에 전혀 얽혀 있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곳에서 생경함과 동시에 섬뜩함을 체험한다.
인간이 상징적 운동 속에서 무수한 삶과 자기를 얽히게 만드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즉 바벨탑의 건설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삶들은 존재를 자기 자신의 축으로 놓을 수 있을까? 라캉은 '그런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 두자'라는 권유를 건네며 구두점을 찍는다. 그런 구두점은 합당한 것인가? 그것의 위치를 옮긴다는 건 가능한 일인가? 사실 이런 의문들은 별로 의미가 없다. 타자와의 소통-불능이라는 실존적 한계와 황금률을 적용하는 데에 실패함에 따르는 양자적 불일치에 구두점은 거리낌 없이-아무런 훼방 없이 자연스러울 지경으로- 찍힌다. 그 믿음이 옳은 것이든 틀린 것이든 말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그 한계 지점이 기만적인 것인지 아니면 진실되게 그러한 것인 지는 여전히 의문 부호가 달려 있다.
독단으로 남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상호 주체성을 충족시키는 것 말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둘은 없더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 그때에서야 진정으로 내가 생각한 바에 대해 의심을 멈추고 비로소 절실하게 믿게 된다. 인간에게 생존도 중요하지만 존재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는 무지하며 등한시되기도 한다. 그런 일치적 느낌은 항상 책으로 접하게 된다. 어떤 온기도 접할 수 없는 죽은 자들에 의해 남겨진 말을 통해서만이 허구적인 온기를 접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는 항상 괴테의 말이 떠오른다. '아무리 똑똑한 생각이든, 멍청한 생각이든 옛날에 살았던 누군가가 하지 않은 생각은 없다는 것을.' 타성에 기반해 있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조차도 해괴하다는 것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터라 침묵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미 없었던 생각은 없었다.
'죽음'에 대한 희구라는 '죽음 충동'은 퇴행이 불가능해지는 한계 지점에서 현전한다. 삶은 극복과 퇴행이 빈번히 일어나는 변증법적 운동의 무한한 굴레인데, 그 굴례 내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인식하는 지점에서 인간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라고 말했지만 정녕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일까? 충동이란 것은 자연스레 소여된다. 그러나 충동은 죽음에 빚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를 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삶에 대한 미련에 더 들러붙어 있다. 이는 삶의 고통이 욕망의 잔여물인 까닭이다. 그리고 분석가는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에서 죽음을 현재화시킬 뿐이다. 라캉에게 하이데거주의라는 눌언에 가까운 각주가 달라붙어 있기도 하지만, 하이데거가 죽음으로 존재자의 존재를 환기시킨 반면에 라캉은 환상적인 것들에 대한 거부를 감행한다.
그렇다면 지젝이 '환상을 가로지르라'는 명령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는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로움이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인간에게 있어서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요구가 주체에게 고통을 전가하기 때문이다. 상상의 확장적 국면이 축소됨에 따라 주체는 무기력을 경험한다. 환상은 주체의 자유이며 곧 정체성이다. 이에 따라 주체는 이데올로기라는 탈을 벗는 것을 고통스러워한다. 지젝이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쓰레기'를 먹고 있다고 비유하며 말하지만 이 생각처럼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발상은 또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공급하는 물질들의 지배 아래에서 그 물질이 주체의 지위를 규정하고 있지만 주체로서 그것을 결코 '쓰레기'라고 수용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해서는 안 되는 금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쓰레기'라고 지칭하고 있는 그것이 당신의 자유로움에 대한 보증이다.
그런데 이 자유로움이 착각에 불과하다는 급진적 주장은 마르크스에게서 보충된다. 마르크스의 발상이 오히려 주체의 자유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자유'란 것을 극단적으로 제한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상위 20%가 전체 부의 총량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하위 80%는 총량의 20%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니 자본주의에는 이미 자유가 없다고 반박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2013년 기준으로 상위 1%가 전 세계 부의 총량의 40%를 소유하고 있다. 조금 확장시키면 상위 15%가 부의 86%를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 85%의 하위 인구는 부의 여분인 14%를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기 위해 서로 간에 투쟁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과 근세 가족이 동익의 집 거실에서 싸우는 장면은 노동자 간의 투쟁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연출이다.
케인즈의 명구처럼 현시대의 현존재들은 '풍요 속의 빈곤'을 체험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마르크스의 요청대로 프롤레타리아들이 단합해서 혁명할 리가 없다. 혁명의 요구 조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눈 앞에 놓여 있는 '아메리카노'를 '쓰레기'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아주 편협한 것으로 이해하며 그것이 나의 존재를 보증하기는커녕 너무 소극적일 따름이라는 발상이 혁명에 참여하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아무도 '쓰레기'를 등지고서 대의라는 것을 내걸고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희생이란 일상의 안정적인 것들을 내려놓고 파국으로 치달을 용기이다. (이를 보면 일상의 반대말은 파국인 듯하다) '죽음'의 가능성조차 열어둘 수 있는 즉슨, '죽음을 현재화'하는 사람에게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지옥'이라고 묘사하는 삶을 내려놓기보다는 카페인이 선사하는 각성 효과가 더 달콤한 법이다. 물론 그 달콤함은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함이며 그 능률은 스트레스성 위염과 함께 자본주의를 재생산한다. 더군다나 지금껏 발산하고 있는 냉소는 내 주변을 그런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거니와 나 또한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간혹 농담 삼아 주변 사람들에게 광화문에 단두대를 설치해 본보기로 3명만 족치면 집을 가질 수 있다고 비약해서 말하니, 아직까지 웃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웃음에 대해 저급한 지식수준으로 해석한 것을 따르면 유머의 내용물이 썩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어디 모자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후자를 배제하고 전자의 관점에서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원초적인 감정을 통해 솔직한 욕망을 읽어낸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과 함께 있기 때문에 더욱 솔직해진다. 그러나 그 욕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앞선 욕망에 관한 무의식적 저항인 권위적인 구조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탓이다. 초자아의 징벌적 측면, 즉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몹쓸 존재로 몰아넣는 자학적 태도가 시대적 냉소를 부추긴다. 그리고 이 자학은 자유에 대한 갈망만을 더 강조한다. 조금 더 비약해 보자면, 냉소의 마침표는 나치 정권의 선전 장관으로 교묘한 선동정치를 펼친 괴벨스가 한 말에 닿는다. '대중들은 관대하게 지배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마 자본주의의 수혜자이며 기득권인 사람, 즉 혹여나 단두대에 목이 걸릴지도 모를 사람은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몰상식하고 파렴치하고 비-인격적이고 야만적인 짓거리를 벌인다고요? 당신은 개만도 못한 사람이군요.'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우연적일 때에만 그렇다.
시간의 실존을 재구성하는 발판을 갖기 위해 주체가 퇴행을 겪을 시에는 어느 정도 필수적인 시간을 요구한다. 즉 '이해하기 위한 시간'으로 꽤 가벼운 느낌으로 명명되는 이 시간은 역량에 따라 개인적 차이가 존재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일단 어느 정도 보장된 여유가 퇴행을 견디게 돕는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격언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쉬는 것을 강조하며 '명상'을 추천하는 건 적확한 답인 것으로 보인다. 여유가 없는 사회에는 퇴행을 견디기보다는 그 속에서 저항의 구실을 발견할 뿐이다. 이것이 발견되는 경계는 분석가와의 담화에서 피분석자가 치료를 공격적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지점이다. 여기서 피분석자의 억압된 것이 회귀한다. 특히 종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이러한 현상들이 자주 목격되는데 특징적으로 당위적인 말의 정당성을 수긍하지 못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하지만 어떤 저항의 조짐이 무리를 조성해서 분출되었다고 한들 어떤 지성이나 신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명확하다. 개개인이 그러한 지성을 갖추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존이나 생존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으로 전락한다. 마치 타자가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즉 근본적으로 자기애적 욕구를 방해받았을 때 자연스레 발생하는 '저항'이다. 그러나 저항이 그런 형태일수록 혁명은 폭동일 뿐이다. 우리는 야심한 시간에 사치재를 판매하는 매장을 약탈하는 광경을 목도한다. 자본주의에서 인간이 우월함을 타자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열망이 만들어 낸 부적절한 산물인 사치품을 약탈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지성적 비판이 현신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 누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자신의 목에 걸린 비싼 돌덩어리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에서 자신의 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지 않던 주체의 욕망은 과도한 유동성을 남겨둔다. 우리는 이 시대에 주체가 감당치 못하는 유동성이 폭발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들의 행위를 '폭동'으로 인식한다면 다행히도 당신은 인간적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하지만 명백하게 그들의 행위는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실패이다.
우리는 환상과 동떨어진 현실을 발견할 수 없다. 주체는 관찰자의 관점에서 자신이 당하거나 행한 일을 포착해내지 못한다. 폭행을 당한 사람은 폭행을 당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이에 대한 보충은 상상적인 재현에 의존해 지각적 한계 체험을 억지스럽게 이해하려는 시도로 대체된다. 상상의 심급은 지각의 한계점을 조금이라도 명석하게 만들어 주는 생경함이지만 그런 허구적 시도가 자기 자신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는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반복은 일어난다. 정확히는 그런 요구가 반복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미국식 정신분석은 칼 융의 '민족정신'을 기반으로 싸구려가 되어버린 니체를 전파함으로써 각인되는 두 가지는 불성실함과 감사함의 부족이다. 성공적인 삶과 행복에만 방점을 찍어 놓은 분석은 개개인의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웅 신화 및 우상 숭배를 통해 권위에 호소하는 방식의 필요성으로 귀결한다. 이런 성향들이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던 성향으로서의 보편성을 강조할 수 있겠으나, 이것이 강연대에서 누군가의 입을 통해 전파된다면 오히려 무수히 반복되어 온 역사적 징후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마치 비참한 상황에 몰린 독일을 구제하기 위해 히틀러가 급부상한 것처럼 말이다. 간단히 축약컨대, 현시대의 주관성은 '초인'을 필요로 한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고 말하는데 이를 뒤집으면 난세가 없다면 영웅도 필요 없다. 여담으로 자본주의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경제 위기와 대공황은 시간문제라고 말하긴 한다만 막연하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언젠간 발생하긴 하되 언제가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이를 수학적 모델로 예측하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할 영예를 얻을 수 있다는데.
그러나 니체의 저 유명한 비유보다는 니체 한 개인이 겪게 된 증상이 인간에 대한 더 뚜렷한 한계, 즉 명시해야 할 지표들을 말해준다. 니체는 자신의 저서에서 예수가 타인에게 너무나도 사랑이 부족한 나머지 '지옥'을 고안해낼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인물로 묘사하지만, 그의 마지막 저작에서는 끊임없이 타자에 대한 사랑과 동정 그리고 연민 따위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니체는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지적 열등감이라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니체와 예수가 타자를 수용해 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다시 존재하지만 실증적이지 않는 정념에 기초한 개념에 호소하고 있다. 니체는 분명 상징적 질서를 가로지른 것이 분명하다. 지젝의 말마따나 상징적 질서의 비실재성을 인정한 자만이 상징을 진실되게 믿을 수 있다. 종종 '존엄성'이나 '인권' 따위의 개념들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름'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시니피앙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인지되지만 그 개념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 작용의 연쇄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본인의 입으로 '없다'라고 말하면서도 절실히 믿지는 못하고 있는 무지한 박식함까지 엿보인다. 그저 그런 개념들을 정치적 의도로 곡해시키며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나 철학적 사유란 것이 너무나도 추상적이기 때문일까? 언제적 '도덕적 우월성'인가? 요즘은 '지적 우월성'의 시대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월함에 대한 갈망은 열등의식의 부산물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