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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Nov 18. 2020

정직한 자들의 세상

침묵의 양상들

 일상에서 여유를 갖는다는 건 요즘 시대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런 것들은 사치이며 패배자의 마음가짐이라고 비아냥대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옹졸한 치부에 편을 들어줄 생각도 없다. 좌우지간 요즘만큼 여유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 적나라케 드러나는 세상은 또 없을 것이다. 한 편으로는 여유를 가지지 않았을 때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겪을 바에는 차라리 낫다는 식의 위안은 충분히 정당하다. 이 시간은 퇴행을 견딜만한 여유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라는 칼 융의 생각에 의거한 것이다. 퇴행에 적응하는 것이 불가피한 만큼 주체는 현재를 불안 속에서 보내고 미래를 마주 보기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런 퇴행의 시간을 기준으로 그만큼에 비례하여 타자를 원하게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까? 타자를 욕망한다는 말 자체에서 비롯되는 명백한 의뭉스러움은 일상 속에서 빈번히 드러난다. 타인이 딱히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친절을 베푸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홀로 있는 시간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때때로 타인에게 강압적이고 무례한 요구를 행하거나 또는 막무가내로 흠을 들추어내려는 저급함으로 이어지고 막상 그러한 시도들이 실패했을 시에는 부산한 중얼거림을 배설하고 때로는 과격함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타자와 유대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꽤 수다스러운 존재인 즉, 아무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시시콜콜하고 진부하다 할지라도 어떤 유대감 속에서 말을 뱉음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해묵은 지식은 오히려 인간이 반드시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당위성으로 귀결하는 듯하다. 그러한 체험의 부재는 주체를 환상적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만들 뿐이다. 어떤 일말의 가능성, 즉 타자와 미약한 고리마저도 맺지 못한 까닭에 아주 사소한 것들 속에서마저도 등장하는 사소한 이미지는 주체가 얼마나 자기-존재를 드러내고 또 실현하려고 부단히 애쓰는지가 인식되지 않는가. 인간이 고독한 존재인 탓에, 타자에게 유대를 요청하는 방안으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동일화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동일화적 원리가 어떤 편협한 틀에 준거해 있으며 아무리 정당하다고 한들, 어쨌든 그러한 획일화는 주체에게 있어서 만큼은 꽤 유익하고도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유대 속에서 대상관계인 타자가 주체의 요청에 적절히 부응해주어야 할텐데, 그렇게 되지 않을 시에는 어떻게 될까? 이 둘을 분간하는 마땅한 척도가 있을까? 예컨대 우리는 일상에서 매력이 철철 넘치다 못해 과잉된 사람을 간혹 볼 수 있다.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그 사람의 입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재치 있는 표현이 쏟아져 나온다. 어딜 가나 사랑받고 각광받는 사람들이 존재가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남몰래 기고만장한 속내를 숨기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사람이 충분히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부러움은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행할 수 있다. 가령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같은 책을 읽으면서 타인을 대하는 방식을 탐구하거나, 그것보다는 더 쉽게 무작정 소위 '인싸'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꾸준히 모방하며 자신을 한껏 치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애석한 것은 아무리 그러한 노력을 정진한다고 한들, 범접할 수 없는 한계지점은 명확히 존재한다. 물론 그런 모방이 쓸 데 없다고 말한다 한들 그러한 모방을 그만둘 순 없을 것이다.


 동일화적 원리가 이데올로기의 기획물인 것처럼 다루어지지만 실질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우월한 대상을 선망하며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어떤 질서, 모방의 근거가 알현되는 기준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해 동경을 갖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하물며 선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행하는 스크린 속의 인물에 대해서도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내가 너무 착하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는 모호한 심급은 그 자체로는 이해가 되질 않지만, 그런 말들이 거짓이라는 지표가 있긴 하다. 만약 그 사람이 타자와의 유대를 구축하는 시니피앙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침묵한 채 존재했더라면 나는 그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대중의 호의적인 시선을 바라고 있다고 간단하고 단편적으로 답을 내릴 순 있으나, 재차 언급하자면,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만족스러운 자들은 굳이 입을 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크리>에 적힌 문구를 빌리자면, 자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말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관점은 마르크스가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도 일맥하는 것 같다. '유언이란 것은 살면서 말을 충분히 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나 남기는 것이야.' (아님 말고.)


 이러한 유대를 섭렵하지 못하는 자들은 적대적 실재, 즉 광인으로 등장하기 십상이다. 그런 광인들로 인해 정상적이고 성실하고 평범하며 남에게 친절하고 사려 깊고 배려심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자들과 공감하는 자들은 상징적 질서의 강화를 요청한다. 여담으로 이것에 아주 적절한 예시가 있는데, 어떤 나라를 여행하고자 할 때 그 나라의 치안 상태를 확인하고 싶다면 경찰이나 보안 요원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면 된다. 범죄를 저지른 자를 제압해야 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린 무기가 가벼울수록 그만큼 치안이 좋은 것이다. 진정한 문제란 그러한 사람, 즉 광인들이 출몰하는 이유일 터이지만 현시대는 의심을 양산하기만 하고 적절한 답안은 아직 없는 듯하다. 답을 내리긴 어렵겠지만 현시대를 아주 적절히 기술하는 잘 쓰인 문장이 있어 이를 인용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싶다. '구제하려는 욕망과 규제해야할 필요, 자선의 의무와 징벌하려는 의지가 뒤섞이게 되고, 흔히들 이 양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쓰인 글귀이다.


 최근 아파트 건물에 불을 지르고 불을 피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른 사람들도 느꼈겠지만 눈살이 찌푸려지는 장면은, 그 사람이 죄의식을 갖긴커녕 도리어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마땅히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 그 사람은 반사회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도 없고 그렇다고 마땅한 논리적 연역도 없다. 그러나 최근까지 꾸준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문구를 말해보자면. '정직한 자들이 가장 먼저 자살을 한다.' 영화 스크린을 뚫고 나온 듯한 극악무도한 살인범이 충분히 정직했더라면 불을 지르거나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자신을 파괴시키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리는 매 해마다 꾸준히 10,000명의 정직한 자들이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본인 스스로 너무 순하고 정직한 탓일까? 아니면 연민이 너무 강한 탓일까. 마치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베트맨의 깊게 뿌리내린 알량한 정의감과 연민이 조커를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끊임없이 거듭해서 강조되는 건 현시대의 정언이다. 하지만 그런 정언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자들, 부족한 자들을 가르치려고 드는 자들은 결코 그들 스스로가 자족 이하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자족함이 그것의 과잉의 불필요함에 응답하지 않는 이상,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자들이 그것을 그만둘 수 있는 방법은 그들 스스로 불만족함에 깊이 몰두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반면 그런 자들은 얼마나 충직하게 복종하려고 들며 또한 권위 앞에서는 침묵하는가. 나로서는 도무지 그런 성향을 이해할 방도가 없으니, 그냥 인용문을 적고 마침표를 찍겠다.


 각자는 자기 내부에 그것을 위한 지적 토대와 관습적인 도덕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데, 각자를 대상으로 한 장기간에 걸친 관찰은 무엇보다 먼저 각자가 이 법에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하며, 각자는 중대한 시기에 자기 내부에서 이 법의 규정의 단순하고 분명한 명령을, 즉 복된 사람들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들을 것이다.
<에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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