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겹구조
자기 자신에게 아주 솔직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솔직함이라는 건 상호 관계에 있어 아주 중요한 덕목인 것으로 알곤 있지만, 간혹 타자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이상에야 더더욱 타자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며, 또한 한 편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당혹스러움을 감추기가 어려운데, 그런 상황에서 충고나 조언은 참견이나 오지랖으로 쉬이 전락한다. 어떤 말을 해야 할 지에 대해 항상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히스테리 증자의 성향이 이러한 시선에 종속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히스테리 증자는 자신의 발화 행위가 솔직 담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정작 그들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자신의 본래적 욕망에 몰입하기보단 아무런 거부감 없이 타자에게로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데, 타자성으로의 전치를 수용하는 정신성의 목적은 그러한 타자와의 적절한 유대를 애써 유지하려는 심급 정도로 이해된다.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본위성에 그르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즉 모종의 불쾌감을 감수하면서도 타자를 만족시키는 것을 완수하는 것으로 해서 소외감에서 벗어난다. 마조히즘적 인간, 즉 피학적 성향의 인간에게 그보다 중대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존의 양태에 병리적이라거나 무의미함이라는 수식을 달아 놓는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자체만이 곧 의미가 되어버린다.
솔직하다고 평하는 사람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알 리가 만무하겠지만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처하는 자족성의 한계 상황이란 여전히 모호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를 존재론적 유희의 결핍이라면, 납득을 위해 독일 낭만주의나 관념론을 들먹이며 진부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구태여 이 빈약한 공간에서 말하지 않더라도 이 세계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에 그렇다. 존재의 근본적 유희에 대해 완전히 부정할 순 없겠지만, 종국적으로는 그 또한 강박증으로 치환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히스테리 증자가 타자의 욕망에 동화되는 것에 방점을 찍어둔다면, 강박증자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몹시 애쓴다. 다시 언급하자면, 히스테리증자가 자기를 보여지는 것과 동일시한다면, 강박증자는 자신을 보여지도록 하며 타자를 동일화하려고 애쓴다. 이 둘은 공통적 분모로 '인정욕'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갖고 있을 테지만,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결핍을 따른다면 후자는 불가능성과 접해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증상의 체현에서의 욕망은 이중화되는 겹구조를 갖는다. 욕망하는 주체가 어떤 대상을 순수하게 희구하는 욕망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러한 욕망이 합당해지기를 바라는 욕망이 존재한다. 인간 존재가 소외되어 있지 않다면 진정한 현실을 마주할 리가 없다는 막스의 말에 착안한다면, 아직까지 그러한 인정에 대한 욕망과 거리감을 더 벌릴 필요가 존재하겠지만, 진정한 현실에서는 불온함만이 진실이다.
물론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욕망은 사회 인지적 범주에 따르는 욕망이다. 즉 구조에 관한 담론이다. 여기서 정신분석에서의 고전적 사례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이는 남성 우월주의적 콤플렉스에 빠진 한 남성의 이야기이다. 그 남성은 아내와의 불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남성에겐 내연녀가 있는데, 바람을 피우면서 지금 당장 아내와 이혼하고 내연녀와 새살림을 꾸리면 현생에서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욕망에 관해 중얼거린다. 그런데 남편이 원하는 데로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을 때, 남편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바에 도달할까? 이젠 꿈같은 삶이 기다릴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남편이 아내와의 불안정한 관계를 제거하고 그토록 그리던 새살림을 차리게 되면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욕망이란, 욕망을 산출하는 구조란 훨씬 더 복잡했다. 남편의 '내연녀와의 새살림'이라는 망상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아내와의 불안정한 관계이다. 불안정성이 소거된다는 것, 즉 아내가 사라지면 내연녀도 사라진다. 참고로 이는 '아는 와이프'라는 드라마의 내용과도 일맥한다.
이러한 불안정성에 근거해 있을 때, 인간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때로는 누군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면서 선망의 대상과 동일화하려고 하며, 때로는 자기 자신을 주변인들에게 한껏 드러내며 자신의 존재를 확립하려고 한다. 구태여 강박과 히스테리라는 두 병리적 증상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한 가지 필수적으로 염려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자신의 '급'에 대해 성급하게 추정하는 사람이 이러한 증상을 쉬이 체현한다는 생각이 스친다. 여전히 불명료하다만, 불명료한 이유는 내가 내 눈을 쉽게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지혜, 즉 프로이트가 드러낸 진리의 형태로서 '내가 욕망하는 것을 원하는 지를 알기 위한 지침' 따위는 철학에 항상 붙어 있는 꼬리표로서 '말장난' 정도로 치부되지 않을까. 자아의 이상형을 축소시킴으로써 그 너머의 지점에 가닿기 위해, 대타자에 대해 존재했던 주체가 그 어느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판단할 수 있을까? 억압이 있는 곳에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만 이미 판단은 억압에 의해 구성된다.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근래에 보았던 글귀로, 굶주리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사람들은 감사와 인정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말이 꽤 인상적이긴 하다. 풍요 속의 빈곤과 일맥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