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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19. 2022

사랑의 역설

진리의 방법론

 17세기 일본에 천주교가 처음 도입될 당시 신자들을 색출해내기 위해 한 짓은 '후미에', 즉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모형을 밟고 지나가는 행위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를 거부했는데, 이는 종교적 상징물을 훼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는 가톨릭 교리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엄청난 숫자의 신자들이 고문당하거나 순교하게 되었는데, 반면 밟고 지나간다면 그건 나름대로 신성 모독이기에 자신의 신앙심에 타격을 입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예에게 목숨이 있는 자유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녕 문제가 되는 것은 신도의 믿음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시험대 위로 올라간 신도의 믿음이 올바르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고 반대로 그 믿음이 적절치 못하다면 배반으로 간주하는 옹졸함이 신의 덕목이던가? 그렇게 가혹한 신이라면 믿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아니면 그저 신에 대한 오인에 불과한가.


 물신화는 인류의 오랜 역사이다. 지금까지 '십자가'와 관련된 사물만큼 가장 큰 상징적 의미를 덕지덕지 발라 놓은 사물은 없었겠지만, 어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해 숭배한 역사는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특히 자본주의에서 '돈'이라는 사물에 대해 갖는 견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가령 '돈이 전부다.'라던가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와 같은 농담 속에 전체성이나 전능함과 같은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에서의 '자본'이라는 수단 또한 물신화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기를, 자본은 곧 신인가? 앞의 농담과 마찬가지로 돈으로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는가? 농담에는 어느 정도의 사실이 섞여 있지만 그것이 과장이나 기만에 가깝다는 것인 즉슨, 돈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은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진실처럼 기능한다. 이를 통해 주체의 언표 행위는 무의식의 담화와 다름 아니며 더불어 그 층위 내부에서 자본의 지위가 가장 높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정언 명령의 뒤틀린 역설이 튀어나온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지만 환유된 구조를 파악하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다시 박해에 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이 시험을 통해 교인을 색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종교인들의 믿음 덕택이었다. 엄밀히는 믿음이 얼마나 독실한 지를 판별하는 척도는 신에 대한 '배반' 또는 '죽음'이라는 이율배반의 선택지에서의 차이에서 드러나는데, 두 행위에서의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적으로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는 배반적 행위에서는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다. 즉 적어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안도감은 배반적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반면 십자가를 밟지 않고 죽음을 택하는 경우 삶을 포기할지언정 자신의 신념은 지킬 수 있게 된다. 특히, 십자가를 밟지 않는 사람에게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죽음이라는 원초적 공포를 뛰어넘은 사람이기에, 즉 자아는 본능적 위협을 배제할 만큼 과대하게 계상되어 있다. 그러한 신자는 몹시 위험한 존재라고 낙인찍힐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질적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음을 불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은 신념의 부차적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문제를 차치하고서 묻고 싶은 건, 이 신자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고작'일 지도 모를 신념을 지킨 것만으로 족하다는 것은 얼마나 합당한가?


 분명 누군가는 신자의 이러한 태도, 즉 죽음을 불사하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한 시선과는 무관하게 신념을 고수하는 일은 본인에게도 분명 득이었다. 이는 단순히 공포를 배제함으로써 초월적 상태에 도달한다거나, 신념이 있는 삶의 중요성 따위를 설파하는 교설로 끝맺어지는 것이 아닌, 십자가를 밟지 않는 행위에서는 신념 자체가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그렇다면 그러한 태도를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신자가 진정 얻고자 했던 것에서 진위 판별이 가능한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랑'이다. 그것도 무한하고도 영속적이며 지고한 사랑 아니면 그러하다고 믿어지는 '신의 사랑'을 얻게 된다. 신에 대한 독실한 믿음이 천국으로 가는 보증일 진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관념적으로 그러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말미암아 행동이 통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에서는 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신을 믿는다는 전치된 구조가 존재하며, 이러한 역설은 라캉의 말대로 '사랑의 천박하고도 기만적인 측면'이 아니던가. 즉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고자 하는 것이다.


 '천박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이나 생각 따위가 얕거나, 말이나 행동 따위가 상스럽다.'인데, 이는 어떤 대상의 가치를 저속하게 바라보며 또한 가치를 깎아내리기에 아주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면 라캉의 말에 말미암아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줄 것을 요구하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규정하며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사랑은 오로지 누군가의 사랑을 얻기 위한 기만적 행위에 불과한가? 사랑의 이러한 역설적 측면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점 때문에 사랑에 부여한 의미가 퇴색될 처지에 놓여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역설이 너무나도 흔하고 일반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 심리에서 흔히 겪는 불가피한 문제가 '보상성'인 탓이다. 인간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이후에 반드시 모종의 보상이 따르길 기대하는데, 이 때문에 사랑의 이러한 측면은 일상 속에서 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것부터 타인을 대하는 것까지 어느 정도의 조건-그것이 물질적이든 심리적이든-하에서만이 적절한 유대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역설이 항상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랑의 광적인 측면 때문인데, 인간이 자기 파괴성이라는 본위적 성향은 자기-처벌적 기제로서 무의식적 반응이지만 대개의 경우 합리화된 채 은폐되며, 결정적으로 타자에게 수용되지 못함에 따라 빈번히 발생한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슬프다는 것을 넘어 때로는 우울과 분노로 그리고 복수의 감정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의 숭고한 이면 뒤에 감춰진 가혹함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믿음을 통해 공포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믿음 자체를 순수하게 지속한다는 것이 크나큰 오해라는 것을, 오히려 기댓값이 없는 믿음이었더라면 애초에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치가 더 확실하면 할수록 믿음도 더 견고해지기 마련일 것이다. 물론 일명 '십자가 밟기'라는 일례에서의 믿음 자체와 믿음을 지탱해주는 보상은 허구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새삼스런 발언일 진 모르겠으나, 신적 믿음의 허구성 때문에 몹시 기이하다는 평이 각주로 달린다고 한들 이 허구가 애초에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의미는 좀 더 각별해진다. 여기서 각별함은 보상이란 곧 '약속'인 탓이며 '신'은 절대적 보증인이다. 그리고 이 각별한 의미 덕택에 현실의 조건을 초월해 있을지언정 공상에만 그치는 것은 더더욱 아니게 되는데, 여기서 '의미'는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은밀한 의미를 내포하는 한에서 그렇다. 다시 말해, 이러한 허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모든 것들은 탄생의 우여곡절을 망각한 채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허구가 애써 감추려고 하는 것이 이 허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아무리 생각해 본다고 한들, 정말 그러한 사랑을 약속받았는 진 결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주체는 여전히 충만한 사랑의 불가능성 속에서 충만함을 원하며 동시에 그러한 충만함을 베풀어 줄 보증인을 찾는다.


 애석하게도 아무리 어떤 말이 타당하다고 한들 그 말 자체에 실현 가능성까진 내포된 것은 아니며, 게다가 사랑에 대한 갈구는 결핍으로 읽힐 따름이다. '보상성'이란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애쓰는 일의 일환일지라도 온전하게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나 이것에 대해 어렴풋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안다고 한들 욕망하는 것을 구태여 그만둘 이유는 없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욕망의 원인을 안다는 것은 진실과의 대면이지만 여기서 진실이란 자신이 극구 부정하고자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를 그만둘 시에 남겨진 선택지는 미쳐버리거나 아니면 희생하는 것 말고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이 진정 원하는 것은 과거의 소산을 바로 잡는 일이다. 라캉이 '무의식'을 '주체를 구성하기 위해 작용한 것이 남긴 흔적 위에 버려진 개념이다.'라고 말했듯이, 즉 구성되다가 멈춰버린 그리고 만들어지다가 덜 만들어진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이러한 불완전함 탓인지 주체는 충만한 보증인에게 자신에게 영원히 상실된 부분-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을 요청한다. 그리고 요청을 받는 보증인인 '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되었을 때 원하는 일을 이루어주겠노라고 선언할 정도로 지고한 존재이기에, 이에 따라 담보로 잡혀 있는 주체의 성실함에는 모종의 확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확신은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보이지만 엄밀히는 일종의 계시적 형태이다.


 앞의 모든 진술은 '진리'라기보단 진리를 지속시키고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론이라는 것을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 더불어 진리가 죽음을 각오할 정도의 의지에서만 비롯되었다는 믿음은 의지에 대한 너무나도 편협한 정의에서 비롯된 오해이거나 지나친 의미부여인데, 실존주의가 낡은 몽매주의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체주의에 힘이 실리는 것은 더더욱 아니게 되는데, 왜냐하면 진리가 기능하는 방식을 문제 삼거나 대체할지언정 진리 자체를 버릴 순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사실적으로 어떤 구조가 은폐하고 있는 허점을 비판적으로 폭로하는 것과 더불어 인간에게 주어진 불가피한 숙명을 해결하기 위해 의지를 소급 적용시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치부될 따름인데, 사실 진짜 문제는 그러한 계시가 보상을 전혀 준비하지 못했을 때 그렇다. 다시 말해 약속을 어겼을 때 문제가 된다.


 사실 십자가를 밟지 않았기에 죽음을 면치 못한 신자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녕 문제는 십자가를 밟고 지나간 사람의 몫으로 남겨진다. 신의 요구 사항을 즐기기는커녕 충실히 해내지 못하기에 자신의 자질을 문제 삼고 책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결코 상징적 의미를 포기하지 못한다. 때로는 죽음조차도 불사해야 하는 고통 속으로의 유폐는 충동의 자리이지만 이 자리가 진리가 위치한 곳이다. 그리고 분명히 진리는 주체를 가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주체는 대타자의 욕망을 향유함으로써 실존의 거점을 마련하지만 결코 그 자리에 가닿을 순 없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적 농담은 대타자를 향유하지 못한 주체의 곤경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이러한 언표 행위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주체의 무기력이다. 애석하게도 사랑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박해가 시작된 시기가 1629년이었으며 1939년까지 암묵적으로 박해가 이어져 왔다고 한다. 그 이후에 교황 비어 12세가 칙서를 발표하면서 가톨릭에 대한 핍박은 줄어들었으며, 이후 일본 제국의 패망 이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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