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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08. 2023

(1/2) 간단히 알아보려다 간단하지 않게 된 MBTI

MBTI에 대한 대략적이고 주관적인 분석

 주변 세계에 관한 풍부한 경험적 정보를 활용해 인간 행동의 일정한 패턴을 파악하고, 그 행동과 주변 환경 사이의 인과 관계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론을 세우는 능력은 인간이라는 종이 성공적으로 진화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현실적인 사람들은 종종 이론이나 이론화를 냉소하지만 사실 그들 자신도 항상 모종의 표현되지 않은 이론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 존중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36p, 프랜시스 후쿠야마.


    세간에 화제였던 그리고 여전히 조금씩은 회자되는 MBTI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불신을 초래했다. 맹신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믿게 된 사람들을 배양했으며 수많은 회의주의자들과 비판주의자들 또한 양산하게 되었다. 확실히 예전보다 인기가 시들해지기도 했고 술자리에서 가벼운 소재로 소모하기 좋은 주제 정도로만 취급된다. 그러나 이를 믿든 믿지 않든 간에 자신을 지시하는 지표 정도는 알고 있으며, 심지어 본인 스스로 이런 것들은 종교에 버금간다며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통해 자신의 습관이나 성향에 대한 변론을 늘어놓는 모순을 보여주기도 한다.


    앞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저서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이론' 내지 '관점'이라고 불리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는데, MBTI도 이에 해당되지 않나 싶어 정리 삼아 쓰는 글이다. 사실 이는 대략 2달 전에 그저 재미로 정보를 찾아보다가 예의상 융의 <심리 유형>을 읽었었다. 이왕이면 무엇이든 좀 더 깊게 파고드는 게 항상 즐거운 법이지 않는가. 그런데 너무나도 깊은 감명을 받는 나머지 더욱 믿게 되었으며,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적게 된 글이다. 여담으로 조던 피터슨이라는 융을 전공한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는 융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유형의 사람으로 너무나 추상적이고 정신적이며 관념적이어서 언어로 개념화할 수조차 없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통찰력을 발휘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피터슨과 마찬가지로 <심리 유형>을 읽는 내도록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대체 이걸 어떻게 한 거지...?" 그나마 융이 서론에서 자신이 20년 동안 임상 경험과 여러 저서들을 접하며 얻은 지식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겠다 싶어서 적은 글이라고 한다. 이 말인 즉슨, 어떤 일이든 20년은 기꺼이 정성을 들여야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여기엔 책에 대한 호평과 감상평, 비평 그리고 사견들을 두서없이 열거할 생각이다. 처음에는 정리를 잘해볼 생각이었지만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 미리 양해를 구하자면 석학 수준이긴커녕 학부 정도의 수준에 미칠 아주 조악한 글쓰기가 개진될 예정이기에 애매모한 것들은 그냥 애매모호하게 남겨둘 예정이다. 그 와중에 어설프게 얻은 지식들에 의거한 추론으로 간략한 진술이 가능하다면 기꺼이 적어 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글을 적는 이유는 답답함이 쌓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무용한 것들 때문이다. 그중 대표 중의 대표, 무용한 것 중에서 최고는 '회의주의자의 말'인데, 그 까닭이란 회의주의자만큼 직관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본인들 스스로 데카르트의 후예인 것처럼 으스대면서 자신이 공회전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다. 게다가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이란 권위를 빌려와 호소하는 것뿐인데 이는 생각이란 것을 스스로 해보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러니까 남을 비판하고 의심하기 이전에 좀 더 생각이란 것을 해보고 만약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찾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법이다.


    이어서 회의주의자가 무쓸모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인데, 어느 누구라도 어느 집단이나 조직에 소속되기 마련이며 무조건적으로 의견을 내는 쪽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 사람의 의견 때문에 모조리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쳐질 운명에 처해진다 한들 말이다. 여기서는 2가지 사안이 몹시 중요해진다. 하나는 적절한 비판에는 반드시 명석한 지성과 통찰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즉슨, 절벽 아래로 떨어질 운명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심리적 요인인데, 방황은 인간의 삶에서 최악의 것 중 하나로 반드시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없다면 최소화해야 한다.



    군주는 풍문에 귀를 기울이거나 남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할 때는 늘 신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공포를 느낀다. 그렇다고 우유부단해서도 안 된다. 적절히 신중하면서도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인해 경솔히 처신하거나, 과도한 경계심으로 인해 주위 사람을 불안케 만들어서는 안 된다.

- 군주론 186p, 니콜라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저서의 제목 그대로 군주의 자질에 대해 논하고 있다. 당대의 시기는 중국으로 치면 춘추전국시대, 한반도의 경우 통일 신라 전 시대와 같이 패권 다툼이 치열했던 시기이다. 마키아벨리를 높게 평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가 이념이라는 허상-비실재적 믿음-을 통한 논의가 아닌 현실에 입각한 정치적 논의를 최초로 서술한 인물이라 호평하지만, 그 호평과는 별개로 그에 대한 비판도 합당하다. 바로 논리적 모순에 대한 지적과 빈약한 논조이다.(책의 쪽수가 너무 적었나?) 물론 마키아벨리의 저 말 자체가 틀렸다곤 할 수 없다. 군주의 자질을 차치하고서 무릇 인간은 선택에 앞서 언제나 신중을 기하되 너무 우유부단해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며 동시에 언제나 위협을 무릅쓰며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어야 하지만 자신의 너무 과단하여 경솔하게 행동해선 안 된다.


    이 말은 분명 옳다. <군주론>에서는 계속해서 '현명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논리적 모순에 쉽게 저항하지 못하며 대체적으로 무조건 한쪽의 입장으로 편향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매 순간 신중을 기하는 사람은 너무나 신중하고 현명해지려는 나머지 우유부단하고 의심이 많아지며 극단적으로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한다. 반면 너무 과감하게 앞서 나가려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위험에 대처할 방도를 마련하지 않았기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기도 한다. 스스로를 비판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그렇다면 갑자기 왜 <군주론>의 내용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가? 이는 MBTI로 분석한 각 성향의 차이에 잘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융 또한 이러한 모순에 대해 서술했다.


    개인적으로 '논리적 모순'이라고 부르기보단 '이율배반'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이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명제가 병치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율배반을 헤겔이나 마르크스 같은 사람들은 변증법을 통해 멋지게 풀어냈다. 헤겔은 정신에서의 역량을 통해 모순을 해소하려 했지만 마르크스에게는 세계의 모순 자체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융의 관점, 즉 그가 분석한 심리의 유형과 각 지표들 간의 대립은 이러한 이율배반을 드러낸다. 하나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점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답안이라기보단 모순이 형성되는 까닭과 모종의 심리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서술했다. 융은 "정말로 의지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뤄야 할 조건을 먼저 예상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심리유형, 187p)라고 서술했다. 철학적 교훈은 항상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적중시키고 있으며 의지의 작동원리나 방향성을 결정할 따름이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Ni(내향 직관)은 말 그대로 의식이 외부 세계가 아닌 마음 내지 무의식으로 집중되는 것을 일컫는다. 이 기능이 정체성, 즉 주된 기능으로 자리 잡으면 감각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소여되는 상상적 이미지들과 무의식의 차원으로 의식이 향한다. 하지만 융에 의거하면 이 기능이 주된 기능인만큼 열등한 기능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 기능은 Si(내향 감각)으로 이는 감각 가능하며 경험했던 현실적 요소들 간의 연관이다. 특히 내향 직관이 주기능으로 자리 잡은 사람은, 스스로에 대한 가능성을 믿으며 의식이 내부인 무의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세부적으로는 질서, 체계, 패러다임, 이데올로기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상징'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이런 것들을 파악하는 능력에서 탁월함을 발휘한다. 융의 말에 의거하면 "한쪽에 영감을 따르는 몽상가와 예언가가 있고, 다른 한쪽에 예술가와 기인이 있다.(심리유형, 497p)"라고 언급한다. 의식에서 항상 직관 내지 연상 작용의 힘을 빌리기 때문에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예측하고 가능성을 생각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결정을 내린다. 반면 Si(내향 감각) 성향은 현실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서도 옛 경험들을 비추어 안정적인 선택을 내린다. 그래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고 전통적인 것을 중시한다. 이로 말미암아 융이 법칙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하나의 기능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기능이 자연스레 열등해지거나 또는 무의식적 보상기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 즉 하나를 얻게 되면 포기하게 되는 이득들을 함의하고 있다. 아무래도 철학을 좋아하니 철학적 의미로 표현하자면, 선택은 다른 선택을 배제하는 효과를 낳는 것이다.


    융의 <심리 유형>에 의거하고 있는 MBTI 검사는 단순히 사람의 성향을 4개의 알파벳으로 나타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각 성향마다 1차 기능(자신의 정체성)부터 4차 기능(열등 기능)까지의 의식의 기능과 5차 기능부터 8차 기능까지의 무의식의 기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참고로 내가 Ni(내향 직관)과 Si(내향 감각)를 예로 든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더 풍부한 이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즉 나의 1차 기능이 Ni(내향 직관)이며 8차 기능이 Si(내향 감각)이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가능성만을 믿고 고집을 부렸으며 무모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내 가능성을 추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 나는 너무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은 과거의 경험을 무시한 채 내린 선택이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이는 조지 오웰의 <1984>에서의 당의 강령에서도 잘 나타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미래로 향하는 움직임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쌓아온 관성의 결과물이 될 확률이 높다. 특히 나이가 더 들수록 완전히 새로운 길을 택하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존에 꾸준히 해왔던 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가 중요하다는 말이나 지금 당장이 중요하다는 말은 어린 친구들과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나 그렇다. 나이가 30대에 접어드니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계속하고 있으며 딱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마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계속 이 일을 하지 않을까? 무엇이든 정성을 들이지 않고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꼴' 정도는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를 지배할 수 있을까? 이는 개인에게 발생한 운명적 사건이나 역량인 의지 정도에 비추어 가늠되지 않겠는가.


    어찌 됐든 앞서 언급한 이 2가지 기능인 Ni(내향 직관)과 Si(내향 감각)뿐만 아니라 Ne(외향 직관), Se(외향 감각), Fi(내향 감정), Fe(외향 감정), Ti(내향 논리), Te(외향 논리)까지 총 8가지로 구성이 된다. 이는 융에 의거하면 한 개인에게 하나의 기능이 우세하게 될 경우 다른 것들은 자연스럽게 의식에서의 열등한 기능-덜 사용되는 기능-이 되거나 무의식의 보상적 기제-배제되어 잘 사용하지 않으려거나 미발달한 기능-으로 남게 된다.



    누구나 이 마음의 법칙이라 부르는 것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융의 진술은 변증법적이다. MBTI 지표에서도 말해주듯이 하나의 성향이 100%인 사람은 없다. 그런 경우 융은 그 사람을 정신병자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기능이 우세해질 수밖에 없다. 즉 자연스레 다른 기능은 열등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심적 작용에 기인해 기능의 대치와 배열이 형성된다. 그리고 보상적 기제로 인해 배제되는 기능은 '열등 기능'이라 칭하며 스스로에게 부족한 기능을 키우기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융의 주장은 아무래도 '균형'이나 '조화'와 같은 개념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다운 주장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 기능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여기서도 융의 명석함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사유의 기능'이다. 즉 우리가 생각이란 것을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파악할 개념이 있다. 이는 융의 견해 및 MBTI 분석틀의 효용적 측면으로 MBTI가 인간의 성향을 16가지 성향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이유인 4가지 보편적 척도가 선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4가지 척도는 철학사에서 몹시 중요하며 왕왕 등장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MBTI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 정도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전제이다. 그러니까 종종 16가지 성향이 인간의 '다양한 개성'을 구분하기에는 너무나 편협한 척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혹자는 128가지나 256가지 정도는 되어야 다양성을 모두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렇다면 묻기를, 128가지가 아닌 64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 했을 때, 4가지 척도를 포함해 2가지 척도를 더 구해야만 한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가? 만약 2가지 척도를 구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100년 이상은 심리학사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까? 물론 그 주장에 대한 취지는 몹시 훌륭할 지도 모르겠다. 개성에 대한 존중은 쉬이 자유와 존엄에 대한 그리고 인격에 대한 존중과 맞닿아 있는 까닭이다. 그러한 비판적 견해에는 분명 따뜻한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만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며 심지어 인간의 개성은 그리 다양하지도 않다. 이러한 진부한 견해는 인류의 짧고 긴 역사가 보증하는 애석한 면이 아닌가 싶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민중이 열악한 상황을 타파해 줄 영웅을 소원하는 것처럼, 그리고 천재성을 질투하는 열등감의 발로에 젖어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일말의 존중을 찾길 바라는 소외된 사람에게서 보이는 일종의 연민인 탓이다. 물론 이는 나의 고지식한 면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나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의 개념화와 구체화를 원할 뿐이다. 이 진부한 논의는 나 또한 사고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질책하며 권위에 힘입어 마침표를 찍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부 세계와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무한한 깊이의 개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내적 자아나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도 사실은 타인들과의 관계, 남들이 제시하는 규범과 기대치를 토대로 이뤄진다.

- 존중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102p, 프랜시스 후쿠야마.


    어찌 됐든 간에, 사유의 기능에 대해 말하기 전에 4가지 척도에 대해 한 번 열거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MBTI에 좀 더 애정을 갖기 이전에 발견하고 이해한 효용적 가치에 대한 진술에 의거한다.


1) 지향성

    우선적으로 내향성(I)과 외향성(E)을 나누는 척도는 '의식의 방향성', 즉 후설의 현상학에서의 '지향성' 개념이다. 후설의 개념은 간단하다. "의식은 항상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이며 어디론가 흐르지 않는 의식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융의 관점 역시 의식이 외부의 대상으로 향하느냐 아니면 내부로 향하느냐에 따라 외향적 인간과 내향적 인간으로 나누어진다. 물론 여기서 벡터적 성격의 운동 속에서 '방향성'을 결정할 뿐이며 힘의 총량에 대해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총 2가지의 의견이 제시된다. 하나는 프로이트의 견해이며 나머지는 융의 저서에 적힌 견해로 엄밀히는 '그로스'라는 학자의 견해이다. 여담으로 지향성 개념은 생각보다도 많은 것들을 시사해 준다. 개념에 대한 정의만 봐도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게끔 조건 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인간은 방구석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만으로 불행한 존재이기에, 가만히 누워서 고통받거나 아니면 너무 열심히여서 고통받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운명이다. 이왕이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더 즐겁지 않겠는가. 물론 그 고통이란 견딜 수 있는 수준이어야만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이 유아기적 시절에는 모두 외향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장함에 따라 무조건적인 사랑을 향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내향적 인간이 된다. 즉 외부로만 향하던 에너지가 내부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유아 시절에 겪었던 생경한 경험이라는 정신분석을 관통하는 주장보다 더 흥미로운 주장은 그로스의 주장이다. 그는 내향성의 '연장'과 신체적 회복 능력 내지 '항상성'이라는 개념과의 연관을 통해 정신적 연장과 수축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은 직관(N)과 감각(S)을 나누는 척도를 설명하기 위해 일단락 짓도록 하겠다. 어찌 됐든,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오자면 사랑이란 인간 삶에서 불가해하지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의 단위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는 주변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주목받기를 원하는 유쾌한 사람, 명품을 구매하며 한껏 자신을 치켜세우려는 허영심 많은 사람,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애쓰는 사회 운동가,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명예롭게 죽기를 소원하는 군인 그리고 항상 어른의 관심을 받고자 애쓰는 어린아이. 모든 인간은 사랑받고자 애쓴다. 후쿠야마가 자신의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자신의 "위신"을 위해 투쟁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가장 위상이 높은 저작과 그 저작의 주인은 최근에 읽은 <죄와 벌>을 집필한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아닌가 싶다.


    <죄와 벌> 도입부에서는 주인공 라스콜니노프가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라스콜니노프의 살해의 동기는 전당포 여주인인 괴팍한 악덕 업주를 처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악인으로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선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대의가 주인공의 살해 동기이다. 그러나 그 대의의 저변에는 자기 자신의 영웅화에 있었다. 술집에서 건너 들은 악덕 업주에 대한 험담이 그의 내재된 동기를 부추겼다는 점과 더불어 시대적 상황이 불운했다는 점이 명백한 근거이다.

    라스콜니노프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형식과 주제만 다를 뿐, 아주 평범하고 이미 수차례나 들어온, 아주 흔한 젊은이들 특유의 대화와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대화와 이런 생각을 듣게 된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막 생겨난 지금.....? 왜 하필이면 노파에게서 그런 생각의 맹아를 막 얻어 온 지금, 때마침 노파에 관한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일까......?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항상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 하찮은 술집의 대화가 앞으로 일이 진척됨에 따라 그에게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정말로 여기에는 어떤 숙명이, 계시가 있는 것 같았다...

- <죄와 벌 1> 124p,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그리고 살인 이후에 가여운 라스콜니노프가 끊임없이 죄의식에 시달리는 모습을 묘사했으며, 진부한 사랑 이야기가 900페이지가량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읽는 내도록 진부한 전개 속도에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을 느꼈던 터라 답답했었다. 작가를 조금 이해하자면, 당대에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러시아에서는 원고 장수마다 원고료가 책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길게 써야만 했던 것이다. 어쨌든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라스콜니노프가 살인자라는 것을 자백하며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으며 8년 형에 처해지게 된다. 언뜻 그의 자백과 그에게 부과된 형벌이 그를 자유롭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법적 질서를 어긴 자가 겪게 될 인간적인 수모와 심적 퇴행을 그려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서 죄의식의 진짜 원인에 대해 엿볼 수 있다. 라스콜니노프가 진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는 자신과 연을 맺었던 사람들 -자신의 가족, 오래된 친구 그리고 연인-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엄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 대해 무슨 말을 들어도 사람들이 내 얘기를 어떻게 하더라고 나를 지금처럼 사랑해 주실 거죠?"(죄와 벌 2, 436p)


    이는 단순히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모범 답안 즘으로 귀결하는 것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법이란 것이 사회적 안녕을 위해 만들어 놓은 최소한의 강준칙이라는 함의와는 별개로 범죄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사람이 겪게 될 상황과 정서 상태를 묘사함으로써,  이는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 내지 '인정 욕구'라 불리는 본성적이면서도 어쩌면 관능성과도 연관이 깊은 질서의 원형을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무의식' 개념과 연관이 깊다. 심지어 <죄와 벌>에서는 라스콜니노프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와 함께 무의식적 콤플렉스가 축적되고 있다는 징후를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제시한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무슨 짓을 하는지 나 자신도 모르면서...."(죄와 벌 1, 200p) 그렇다. 이 정도는 적어줘야 대략 200년은 이름을 남긴다.


    구태여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내용을 들고 와서 간략히 기술한 이유는 프로이트의 입장보다도 훨씬 풍부한 이해가 가능할 것 같아서 그렇다. 우리가 사랑받고자 하는 존재라는 최초의 원인과 마음의 법칙을 이해하고자 했으며 무의식에 관한 담론을 정식화하고 사회적 담론으로 이끌어 낸 것은 프로이트라 할 수 있겠으나, 도스토옙스키는 훨씬 앞서서 보편적 성향에 의해 충분히 일어날 허구적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이미 탁월한 관점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프로이트로 돌아오자면, 인간에게 있어 퇴행이 코 앞에 놓인 장애물에 대해 상정하는 것처럼, 내향성이라는 지표는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불화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낙인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맥락에 따라 간략하게 일축하자면 인생에 굴곡이 심할수록 인간은 더 내향적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내향성에 대한 오해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종종 내향적인 사람을 내성적인 사람과 동등하게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내성적이라는 말에는 좀 더 진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 의미는 개인적인 관찰에도 입각해 있는데, 외향적인 사람보다도 좀 더 조심성 있고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중함과 조심성은 분명 배려심과 연관이 있지만 너무 연약한 심성을 갖고 있는 가능성을 간과해선 안 되기 때문에, 괘를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세상이 어려워지고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을수록 더 자기-방어적이게 되고 자기연민의 양도 커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MBTI와 관련된 비판 중 하나인 성향으로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간혹 내향성(I)인 사람이 말을 많이 한다거나 유쾌하게 행동하는 등의 '활발함'을 보이면 MBTI가 가리키는 지표에 대해 믿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하나의 성향에 대해 말해보자면 INFP 유형의 사람이 소극적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는 별개로 활발한 모습을 보이면 MBTI는 거대한 오류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내향적인 것과 내성적인 것은 상관관계가 있을 뿐이지 인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내향적인 사람이 내성적일 확률은 높지만 모든 내향적인 사람들이 내성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는 무의식의 개념과 그 영향에 대해 간과했기 때문에 오해를 낳는다.


    세상에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항상 확률과 상대적 관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MBTI에는 분명 확률과 상대성에 의거한 견해가 녹여져 있다. 결과표에서도 단순히 성향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 대략적인 퍼센트도 말해주지 않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주된 기능인 1차 기능부터 4차 기능까지 그리고 무의식의 기능은 5차 기능부터 8차 기능까지의 기능 분류를 통해서 명확히 밝히는 것이 옳다.


    INFP의 1차 기능은 내향 감정(Fi)이다. 이는 "자기 성찰적 측면과 반성"에서 두각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이 기능이 너무 비대화된 나머지 과해진 반성은 스스로를 괴롭히기 좋은 정서이다. 그래서 이 성향의 사람들이 정신 상태가 무너졌다는 가장 두드러진 징후는 항상 자기감정이 최우선이게 되며 극단적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인간 실격>의 저자 '다자이 오사무'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서는 자전적 성격의 소설이다. 융에 따르면 내항 감정 유형의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솔직 담백하게 서술할 수 있는 언어적 표현력을 가지면 예술가가 된다고 한다. 여담으로 솔직하게 말하건대, 오사무 같은 사람은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극도의 자기 연면에 빠져 상황을 타계하려 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읽으면서 그렇게 눈물이 났었다.


    어쨌든 만약 병리적 상황이 지속된다면 자신의 무너진 감정 아래에 매몰되어 주변 상황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감정선이 붕괴된 이유가 본인에게 있다기보다는 외부에서 찾는 것이 더 옳다. INFP의 5차 기능이 외향감정(Fe)인 탓이다. 이 기능은 타인과 "정서적 유대를 맺음으로써 삶에 보람"을 찾는다. 이 기능이 의식에서나 무의식에서 다른 기능보다 우월한 기능으로 작동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남들의 눈치를 많이 살핀다. 그리고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차 기능으로 활용하는 것이 외향직관(Ne), 자유로운 발상과 상상력이기 때문에 그들과 친해지면 그 누구보다도 유쾌하고 활발한 사람이 된다. 사실 이 설명은 최근에 이 유형의 사람 중 자의식이 강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었다. 특히 융은 자신의 저서에서 의식의 관점을 당연시했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무의식에 대한 담론이 좀 더 필요하다. 이는 융의 '그림자'라는 개념을 빌려와 보충할 내용을 기술하면서 적어볼 예정이다.


    진부한 설명을 덧붙이는 이유는 하나를 이야기하기 위함인데, 그것은 너무 단편적이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성으로 인해 내향성과 내성적임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어휘력의 문제이다. 게다가 MBTI 뿐만 아니라 모든 심리 분석의 결과들이 결코 해소할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을지언정 개개인 간의 상대적 차이에 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나열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성향과 에너지의 차이는 타자를 조우한 상황에서만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이에 대한 논의 또한 척도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융의 생각과 MBTI 분석을 비판하며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2) 연상

    두 번째는 직관(N)과 감각(S)을 나누는 기준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확히 어떤 개념으로 불러야 할지 의문이다. 그러나 이견의 여지없이 성향을 구분 짓는 데 있어서 가장 영향이 큰 지표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N은 직관으로 가능성 내지 상상력과 연관이 깊고 S의 경우 감각하는 그리고 경험한 세계와 연관이 깊다.


    이는 지향성을 척도로 삼은 외향적 성향과 내향적 성향의 구분과도 연관이 된다. 앞서 지향성에 대해 언급할 때 심적 퇴행 작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는데, 재차 언급하자면 퇴행의 원인은 자신이 타계해야 할 어려운 상황이 주어졌을 때 발생한다. 이러한 심적 현상은 아주 크나큰 일이 일어났을 때도 일어나겠지만, 자신의 주변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에 의해 일상적으로도 발생하기도 하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을 때나 그리고 반복적이고 진부하면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히 퇴행의 개념 하에서 '그로스'라는 학자는 신체적 회복 능력과 정신의 강도에 의해 내향적 인간과 외향적 인간이 결정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했다. 여기서는 '부수현상설'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콜린성 호르몬'의 기능적 효용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우선적으로 부수현상설이란 뇌의 전기신호가 생각이란 것을 하도록 만든다는 물질주의적인 관점을 일컫는다. 정신, 마음 그리고 영혼 따위가 생각이란 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생각이란 현상도 뇌의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관점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관점을 취하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사고 작용이 활발한 것을 넘어 너무 과도하게 일어난 나머지 발생하는 부수적 문제에 대해 논할 때는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 아닌가 싶다. 특히 전기 신호가 너무 자주 발생하게 될 경우에는 뇌에 미세한 상처를 입히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콜린성 호르몬'의 일종인 '아세틸콜린'이 분출되는데, 이 호르몬의 기능은 각성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는 호르몬일 뿐만 아니라 자극으로 이해 발생한 미세한 상처들을 소독하는 효과를 갖는다고 한다. 이를 통해 신체가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스트레스의 양이 역치에 다다르면 신체는 영양을 섭취해야 하거나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리고 알다시피 신체적 역량이 다르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내가 항상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에서의 역량도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만약 신체적 회복 속도가 뛰어나 정신이 '연장'할 새도 없이 수축해 버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외향적 인간이 된다. 반면 정신의 강도에 비해 신체의 역량이 현저히 떨어진다면 자연스레 내향적 인간이 된다. 즉 이는 한쪽의 역량이 다른 한쪽에 비해 약할 때 무조건적으로 결정된다. 만약 두 간극이 그리 크지 않다면 아마 외향성과 내향성의 구분 자체가 그리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무조건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진 것은 옳다.


    그리고 여기서 직관(N)과 감각(S)의 성향의 구분은 하나의 가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감각을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고 직관은 현존과 부재의 차이를 가늠해야만이 정합적으로 보인다. 즉 직관력 내지 상상력을 좌우하는 연상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는 자연스레 감각 성향의 인간이 된다. 그런데 감각 성향의 사람은 기질적인 문제로 인해 직관 성향의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직관 성향의 사람이 감각 성향의 사람도 될 수 없다. 이 변화는 일시적일 따름이다. 융은 이에 대해 '조정'이란 표현으로 개념화했는데, 그 이유는 타고난 기질 때문에 언젠간 회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억압된 것은 언젠가 제 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는 무의식에 대한 변론을 적으며 더 생각해 볼 생각이다. 특히 근래-대략적으로 3달 전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설명에 아주 커다란 감명을 받은 이유는 남미의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소설 <백 년의 고독>에서 '아우렐리아노'와 '아르까디오'라는 성을 받은 두 형제를 통해 보여준 성향의 차이 덕택이다. 이 저서는 제목 그대로 한 가문의 한 세대에 걸친 고독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가문에서 아우렐리아노 성을 받은 자식은 자연스럽게 정신적 인간이 되는 반면 아르까디오 성을 받은 자식은 육체적 능력이 더 강하다는 소설적 설정은 작가 양반께서 이미 인간의 기질적 차이에 대한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가. 여담으로 이름의 차이로 이해 운명이 결정된다는 논조는 우리나라에서는 '명성학'과 굉장히 비슷하다. 물론 명성학이 기질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내가 주워 들은 바로는 인간의 삶 100% 중에 20%가 자신의 자유 의지이고 40%는 자신의 업보 그리고 나머지 40%는 이름의 의미로 인해 결정된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적어도 이 세계가 의미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꽤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를 믿어도 딱히 손해 보는 일은 없기 때문에 이왕이면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 신중하게 짓길 바란다. 또한 만약 자신의 이름에 아무런 의미도 담겨있지 않거나 안 좋은 뜻이거나 또는 그저 이름이 부르기 좋거나 이뻐서 등등의 하찮은 이유라면 바꾸길 바란다. 나이 들어서 바꾸면 그건 또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한다. 어차피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기 때문이다.


    헛소리가 길었는데 다시 본론을 돌아오자면, 이는 지향성을 척도로 삼은 외향적 성향과 내향적 성향의 구분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융에 의거하면 -전체적으로 정신분석을 관통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에너지가 외부로 향하지 못하고 내부로 향하게 될 때 콤플렉스가 축적되게 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의식이 신체 쪽에 집중되면 감각(S)이 되고 관념에 집중하게 되면 직관(N)이 된다. 물론 부재와 현존을 가늠해야 한다고 해서, 그리고 이미지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연상력이 뛰어나 직관 성향을 가진 사람이 더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융은 자신의 저서에서 직관 성향인 사람을 독일의 관념론의 부흥의 포문을 열었던 '임마누엘 칸트'를 예시로 들었고 반면 감각 성향인 사람을 영국 출신의 박물학자인 '찰스 다윈'을 예시로 들었다. 감각 성향은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며 사물이나 상황을 관조하는 능력과 연관이 깊은 반면 직관 성향은 가능성 또는 공상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직관 성향의 사람이 현실을 있는 그 자체로 바라보기보단 자신의 주관적 편향에 맞춰서 바라보며 심지어 왜곡이 일어나기 쉽다.

 

    직관과 감각 성향에 대해 구분하긴 했으나 내향성과 외향성에 대한 설명도 몹시 중요하다. 여기서는 융의 설명을 좀 덧붙여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이미지를 전달하는데, 이 이미지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위로 수많은 세대를 내려오는 주관적인 경험의 분위기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의 기미를 퍼뜨린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순수한 감각 인상은 깊이 발달하면서 과거와 미래로 닿는 한편, 외향적 감각은 낮의 햇살에 드러나는 사물들의 일시적 존재를 포착한다.

- <심리 유형>, 488p.

    

    이는 내향 감각(Si)과 외향 감각(Se)에 대한 설명이다. 이를 통해 정신의 강도에 의한 연장과 수축에 대한 설명이 될 진 모르겠다. 위의 설명에 의거하면 계속 언급하고 있는 '연장'이라는 개념에 '시간'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외향성의 경우는 이러한 정신성의 부재 내지 신체적 회복력 탓에 그 순간 자체에 머무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2가지 정도에 대한, 즉 또 다른 이야기를 할 필요성이 생기는데, 그것은 '대상'에 대한 견해와 병리적 측면이다. 계속 언급되는 개념은 '지향성'이다. 즉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한다. 그것이 하나의 사물이든 관념이든 의식이 포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 '대상'이란 것이 사물인지 사람인지에 따라서 관점이 또 달라지게 된다. 병리적 측면과 대상성에 대한 논의는 감정(F)과 T논리(T)를 다룰 때 할애하도록 하겠다.


3) 한계

    개인적으로 외향(E)과 내향(I)을 나누는 기준이나 추후 다루게 될 판단(J)과 인식(P)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직관(N)과 감각(S)에 대해 다루는 건 좀 더 어렵지만 생각보다도 괜찮았다. 그러나 감정(F)과 논리(T)의 척도를 개념화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그냥 여러 가지 가정과 추론을 통해 내용을 정리해볼 생각이며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의 관찰값을 통해 개진해보고자 한다.

    인간들은 무엇인가를 시도할 때마다 자유가 늘 적대감을 보인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어떤 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편안한 예속의 상태로 던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현학적인 가르침에 절망하며 자연 상태의 방종에 빠진다. 강탈은 인간 본성의 허약함을 내세울 것이고, 반란은 인간 본성의 존엄을 내세울 것이다.

- 심리유형 134p, 융.


    개인적으로 언제부터인가 가능성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불가능한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 불가능을 규정짓는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레 보편적 담론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를 회고하면 공교롭게도 독일의 관념론과 실존주의에 공부하며 하찮은 의지를 치켜세웠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분명 쇼펜하우어에 의해 정신이 붕괴됐었다. 그리고 그 이후 정신분석과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넘어간 시기와 일치하지 않을까. 그리고 언제나 가능성만 바라보다가 내 소망과 의지가 박살 났다고 생각하며 절망에 빠졌을 때,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으며 절망과 우울에 대해 이해하고자 했다. 다시 의지를 세우기가 꽤 시간이 걸렸다. 사담이 길었는데, 어찌 됐던 무한한 잠재력과 유한함을 규정하는 한계라는 이율배반은 나의 주된 관심이며 앞으로 남은 여생에서 내가 괜찮은 성과를 낼 수만 있다면 이와 관련된 논의를 진척시킨 결과일 것이다.


    사실 척도를 한계라고 규정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정신의 빈약함과도 연관이 깊다. 그리고 똑같은 책에서 발췌한 융의 견해는 인간적 수모를 관통하는 주제인 '고독'에 관한 글귀이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를 알려고 한다거나 견디려 하진 않는 것 같다. 심지어 본인이 외로움에 빠져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라도 했는지 묻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는 헤겔적으로 '즉자 존재'가 '대자 존재'가 되는 도야의 과정이 아닐까. 즉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바라보는 연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습은 고사하고 일단은 무작정 고독을 해소하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융의 세련되고 정돈된 표현처럼, 자신의 개성을 버리고 집단에 소속된다던가, 진리를 견딜 수 없어 방탕과 방종을 추구한다던가, 그리고 헤겔의 주종 변증법에 따라 주인에의 의지를 고취하며 타자에게 굴종을 요구하거나 또는 주인과의 결속을 끊어냄으로써 주인에게 다른 의미의 고독을 선사할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은 극단적 자유를 추구하지만 '죽음 충동'이라는 불미스러운 가능성을 항상 마주해야만 한다. 서로 유사하면서도 또한 차이를 갖는 이러한 행동 양상은 분명 보편적인 몇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지만, 인간이 근본적으로 '고독'하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점이 아주 놀랍지 않은가. 어찌 됐든 외로움은 인간을 고유한 한계로 이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불쾌함을 정신에 만들어 낸다. 그리고 여기서는 헤겔의 너무나도 유명하고도 절묘한 변증법이 드러나게 된다.


    앞서 INFP 성향에 대해 말하면서 5차 기능인 외향 감정(Fe)은 "타인과 정서적 유대를 맺는 것에서 보람을 찾는"다고 설명했었다. 즉 외부에 정서 상태로 의식이 향한다. 반면 INFP의 4차 기능인 외향 논리(Te)의 경우에는 외부의 논리로 의식이 향한다. 즉 INFP 성향인 사람의 의식에서 가장 열등한 기능이지만 가장 바라는 기능이다. 즉 의식의 차원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골몰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외향논리 기능이 1차 기능인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하게 부합하는 표현은 "인간은 시대적 산물"이라는 말일 것이다. 융은 "그의 행동을 지배하는 도덕법은 사회적 요구, 즉 지배적인 도덕적 관점과 일치한다. 만약에 지배적인 도덕적 관점이 변한다면, 외향적인 사람의 주관적인 도덕적 지침도 그에 따라 변할 것이다."(심리유형, 389p)라고 서술했다. 즉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지배력이 강한 논리에 따라 행동한다. 아마 가장 자본주의적인 인간일 것이다. 이 기능이 1차 기능으로 활용되는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자신의 체면을 몹시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들에게 결코 자신의 빈틈이나 약점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 완벽하고 무결한 모습이 그들이 외면이다. 그런데 MBTI에 의거하면 이 기능이 1차 기능인 사람의 경우 4차 기능으로 내향 감정(Fi)이 된다. 즉 의식에서 가장 열등한 기능이 되어버린다. 즉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사람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사람을 원한다. 이는 굳이 MBTI에 의거하지 않더라고 인생을 아주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심리적 징후이다. 특히 개인적인 준칙으로 강박증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몹시 만족스럽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그렇지 않으면, 즉 자신이 하는 일에서 만족을 찾지 못하면 타인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불만족을 보상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일에서 만족을 찾기는커녕 인정조차도 받지 못하게 되면 거기서 권력에의 의지가 탄생한다. 아들러는 권력욕이라는 것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정서라고 말했다만, 엄밀하게는 자신의 열등성에 대한 '보상'이다. 이는 권력이란 귄위와는 다르게 존경받지 못한 자들의 보상 심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특히 논리(T) 성향인 사람들이 남들보다 좀 더 우월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논의는 '대상'이 사물이 아닌 '인간'일 경우에 해당한다. 즉 여타 심리학의 목적이 그렇듯이 사회적 상황과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도모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사회적 상황과는 별개로 내가 '한계'라고 규정 지은 이유는 논리 성향과 감정 성향 사람의 극명한 차이 때문이다. 감정이란 개념에 대해 생각하면 항상 '충동'이라는 개념이 먼저 떠오른다. 실제로 논리보다는 항상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훨씬 강한 힘을 갖고 파급력도 더 강하다. 이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지 않는가. 물론 그런 행동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긴커녕 호혜적인 관계조차도 유지하지 못하게 될 확률이 높지만 말이다. 그래서 논리 성향이 강한 사람이 감정 성향의 사람보다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의 한계 내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역치를 넘어섰을 때 인간은 충동적이게 된다.


    앞서 언급한 외향 논리(Te)에 대해 좀 더 언급하자면, 이 성향의 사람의 가장 주된 기능은 '목표를 잡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현시키 위해 행동함으로써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성공을 위해 이러한 태도를 학습시킨다. 또한 시대를 막론하고 실천은 중요하다. 게다가 이 성향의 사람들은 계획을 완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인내심도 강하다. 겉으로 보기엔 너무 철두철미한 나머지 냉철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러나 냉철한 사람으로 보이는 만큼 냉혈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타인이 자신의 계획이나 성취에 방해가 된다면 굳이 타인과 함께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외향 논리(Te)가 1차 기능인 사람의 8차 기능은 외향 감정(Fe)이다. 이 기능은 '타인과 정서적 유대를 맺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다. 예컨대, 성공한 사람의 유언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죽기 전에 자신의 성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주변 지인들과 시간을 보냈던 것이 가장 큰 의미였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귀 말이다. 유언의 주인이 주체가 자신이 관계 맺은 타인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심리적 현상을 간과했기 때문일까? 사실 이는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2인자로 기록된 살리에르는 죽기 전까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하고 질투했으며 명성을 부러워하지 않았는가.


    반면 이런 것들의 중요성에 대해 이해하면서도 지표는 감정 성향인 경우가 있는데, '충동'의 개념과 마찬가지로 '한계'란 것이 척도로 작용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불가능한 일을 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현학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는 논리성향의 친구와의 대화 및 여타 관련 영상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비단 그 친구뿐만 아니라 논리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거나-대상이 사람인 경우- 불가능해 보이는 일-대상이 사물 내지 사건인 경우-에는 결코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롯이 자신이 가능하다고 믿는 일에만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는 현명한 태도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또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건대, 이 척도에 대해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인간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기 마련이며, 그저 극명한 대조가 심리 법칙에 내재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4) 동기

    마지막으로 판단(J)과 인식(P)을 나누는 기준은 '동기'이다. 처음에는 '시간관념'이 절대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했었다. 통상적으로 판단형이 시간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해서 계획적인 반면 인식형 인간이 시간의 속박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유로운 것을 지향하며 즉흥적이라는 점이 통념인 것 같다. 이러한 통념에 의거하여 가장 처음에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른 것이 '동기'였다. 왜냐하면 '동기', 즉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항상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으며 시간을 최대한 쪼개가며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융의 책에 버젓이 적혀 있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내 추론이 빗나간 적이 잘 없었다는 사실에 기꺼이 기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낸 적도 없다는 것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이 '동기'란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직언하자면 동기란 '사회적 산물'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대략 5년 전에 읽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보드리야르의 저서에 정확하게 적혀 있다. 마지막 문장이 여전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가치 없는 세상의 허무함을 가리기 위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어쨌든 마지막 문장임)

    

    <시뮬라시옹>은 영화 <매트릭스> 첫 도입부에서 펼쳐든 책의 제목이다. 시뮬라크르는 '파생실재', 즉 실재를 재현하지만 실재보다도 더 실재 같은 가짜, 그리고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즉 사물에 담긴 고유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유물론적 관점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앞서 짧게 직관(S)과 감각(N)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세계가 '의미'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었는데, 이는 '가치'와 동의어가 아닐까 싶다. 가치란 분명 사회적이다. 그리고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동기가 항상 자리 잡는다. 동기가 사회적이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는 각 성향마다 나타나는 기능에서도 극명하게 분화되어 나타난다. 이 동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 또한 미뤄두기로 하겠다.

  

    가령 ISTJ나 ESTJ 같은 경우 1차 기능과 2차 기능이 각각 외향 논리(Te)와 Si(내향 감각)으로 나누어진다. 외향 논리에 해서는 이미 언급해서 넘어가고 내향감각(Si)에 대해 말하자면 '현실에서 선택을 내려야 할 때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안정적인 선택을 내린다.'라고 한다. INFJ나 ENFJ의 경우 1차 기능과 2차 기능이 각각 내향직관(Ni)과 외향감정(Fe)으로 나타난다. INTJ와 ENTJ의 경우는 외향 논리(Te) 그리고 내향직관(Ni)이다. 그리고 ISFJ나 ESFJ의 경우 내향 감각(Si)과 외향 감정(Fe)이 각각 1차 기능과 2차 기능으로 할애된다. 이를 굳이 열거한 이유는 이 기능들이 '동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즉 내향직관(Ni), 내향감각(Si), 외향논리(Te), 외향감정(Fe)이 판단형 인간이 사유의 주된 기능으로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관점에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각각에 대한 부연 설명을 간단히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향직관(Ni) - 무의식과 상징 작용을 따른 원칙

내향감각(Si) - 경험과 전통에 입각한 체계

외향논리(Te) - 시대에 통용되는 지배적 논리

외향감정(Fe) - 시대에 통용되는 도덕적 정서


    반면 인식형의 경우, INFP와 ENFP는 1차 기능과 2차 기능이 내향감정(Fi)과 외향직관(Ne)으로서, 외향 직관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INTP와 ENTP는 1차 기능과 2차 기능이 각각 내향논리(Ti)와 외향감각(Se)이다. 내향 논리는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그리고 ISTP와 ESTP는 1차 기능과 2차 기능이 내향논리(Ti)와 외향감각(Se)이다. 마지막으로 ISFP와 ESFP는 내향감정(Fi)과 외향감각(Si)이다.


외향직관(Ne) -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능성

외향감각(Se) - 자신이 지금 당장 보고 느끼는 것

내향논리(Ti) - 자기 자신의 고유한 논리와 비판적인 분석

내향감정(Fi) - 자신의 마음 상태


    이를 구태여 열거하는 이유는 앞서 각 척도들에 의해 분화가 이루어졌듯이 인식형이냐 판단형이냐에 따라 어느 정도로 사회적 관점에 치중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징', '전통' 그리고 '지배적 논리'나 '도덕적 정서'는 타자와의 연관 속에서만 밝혀질 수 있는 반면 인식형의 경우 자기 자신의 '상태'나 '만족'에 그리고 사물에 더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다시 동기에 대해 언급하며 진부한 이야기를 하자면, 각 성향별로 판단형인 사람이 가진 경향성이란 자신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통감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애석하게도 인간사에 있어 존중과 사랑 그리고 존경은 유사함에도 전혀 다르다.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사랑과 존경은 자신에게 특별히 가치를 갖는 사람에게만 헌정된다. 나는 모두를 친절하게 대하며 존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다정하게 대하고 모두를 사랑할 수 없으며 존경만큼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1차 기능과 2차 기능만 열거했기 때문에 한정적으로 규정되며 편협한 사고이다. 그렇기에 다른 기능들이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사실 동기에 대한 논의는 정신분석에서의 '퇴행'이라던가 '무의식저 전제' 따위의 개념에 의거하여 설명을 개진해야 할 것 같으니, 무의식에 대해 보충적으로 설명하는 곳에 할애하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예시로 이러한 분화와 교의적 측면을 좀 더 적극 조명해 보도록 하자.


    예컨대, 거시물리학의 거장으로 알려진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INTP라고 알려져 있는데, 듣기로는 이 성향이 창의성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다. 꿈에서 스키를 탔는데 빛과 경주를 하면서 '빛의 절대 가속' 개념에 대해 떠올렸으니 그럴만하다. 여기서 INTP의 1차 기능부터 8차 기능까지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내향논리, 외향직관, 내향감각, 외향감정 // 외향논리, 내향직관, 외향감각, 내향감정]


이 된다. 대괄호 중간에 '//'로 쳐놓은 부분에서 앞부분이 1차부터 4차 기능인 의식에서의 역량이고 뒷부분은 5차부터 8차 기능인 무의식에서의 역량이다. 융에 의거하여 재차 설명하자면 전자의 기능은 의식에서의 기능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자의 기능들은 무의식의 보상 기제로 남게 된다. 즉 의식이 강할수록 무의식의 보상 기제도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만약 의식이 어떤 이유로 인해 쾌적함을 유지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붕괴되면 강해진 무의식의 기능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니체적 의미로서 '초인'의 의식을 갖고 있다면 무의식은 결코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이론에 불과하다. 인간은 항상 음식을 섭취하여 영양을 보충해야 하고 충분한 수면 시간을 취해야 하며 과도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적 관계를 통해 고독을 해소해야만 하며 관능성의 결핍조차도 초인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살아생전에 바이올린 연주가 취미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외향 감각(Se)-사물을 관조하는 능력-와 내향 감정(Fi)-자신의 기분을 감정 상태를 살피는 성찰적 측면-를 위해 시간을 쓴 것이다. 이는 마치 영화 <타인의 삶>에서 정보국 요원인 비즐러가 타인의 삶을 감시하면서 피아노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바꾼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지성이라면 굳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정립하는데 시간을 쏟느라 여념이 없었을 테니, 이런 것들을 개념화하진 못하더라도 직관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무의식의 보상성이 아인슈타인을 음악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융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쪽으로 치우친 ("유형적인") 태도는 적응에 결함을 낳고, 이 결함이 세월을 두고 누적되면 조만간 적응에 장애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 적응에 나타난 장애가 주체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보상 쪽으로 움직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 보상은 그때까지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태도의 제거(희생)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 심리유형 36p, 융.

 

 그리고 이 보상성은 위에서 언급한 도스토옙스키의 무의식에 관한 명석한 통찰을 담은 문장에서처럼, '통제불가능성'을 함의하고 있다. 이 또한 추후에 적어볼 예정이다.


    지금까지 제시한 4가지 척도와 사유의 기능에 대한 설명과 마찬가지로 기능의 서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MBTI의 효용적 측면이다. 즉 기능의 대치 관계에 의해서 8가지 기능의 서열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융을 전공한 피터슨이 종종 했던 말과도 일맥한다. 피터슨은 '가치의 서열화'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가령 여러 가치들, 예컨대 기독교에서는 '믿음, 사랑, 소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3가지 중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또한 프랑스의 국가 이념은 '자유, 박애, 평등'이다. 만약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융은 모든 사람이 8가지 사유의 기능을 갖고 있지만 그중에 하나를 자의에 의해서든 타성에 의해서든 주로 활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융이 아닌 MBTI의 설명에 한해서는 주로 의식의 3차 기능까지는 적극 활용하는 것 같다.


    첨언하자면, 개인적으로 나는 어느 정도의 상식만 갖추고 있다면 알만한 저명한 인물-과거든 현재든-들에게서 성향을 나누는 건 그리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아인슈타인의 예시처럼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알고 그것을 보충하고 개발하는 것이 MBTI의 교의적 측면이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에서는 터부시되어 미신으로 치부되는 관상이나 사주팔자와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미신들은 단순히 나의 운명을 점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부족한 점을 미리 알고 고치거나 또는 내가 겪게 될 불우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예측을 기반으로 삼는다. 위에서 한 번 언급했지만 너무 인상적이고 세련된 표현이니 복습 삼아 한 번 더 언급하도록 하자. "정말로 의지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뤄야 할 조건을 먼저 예상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심리유형, 187p)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항상 정규분포 그래프가 떠오르는데, 직언하자면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 완전히 다른 이유로 성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저명한 인물은 모든 기능들을 충분히 활용할 만큼 풍부한 사유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자신의 2차 기능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봤었다. 애석하게도 극단적으로는 동물적이고 원초적 본능에 따라 타성에 젖은 삶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글을 적는 내도록 간간히 언급한 MBTI의 교의적 측면에 대해 재차 언급하며 글을 마무리하자면, 결론적으로 자신의 의식에서 주로 다루는 기능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며 동시에 자연스레 보상적이고 열등하게 남는 기능들 조차 키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부족한 점에 대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채워 넣을 수 있다면 유의미한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설픈 문장보단 좀 더 깔끔하게 정리된 융의 글을 보도록 하자.

    현실 속에서 만나는 모든 유형을 보면, 의식적인 일차적 기능 외에도 모든 면에서 일차적 기능의 본질과 다른, 상대적으로 무의식적이고 보조적인 기능이 있다는 원칙이 두루 통한다. 일차적 기능과 보조적 기능의 결합은 아주 익숙한 그림을 그려낸다. 예를 들면, 실용적인 사고와 감각은 서로 부드럽게 결합하고, 사색적인 사고는 직관과 결합하여 순조롭게 나아가고, 예술적인 직관은 감정적 가치 평가의 도움을 받아 이미지들을 선택하고 표현하며, 철학적 직관은 강력한 지성의 도움을 받으며 철학적 비전을 이해 가능한 사상으로 체계화한다.

- 심리유형 506P, 융.


    양해의 첨언은 원래 무의식에 관해 나름의 지식을 축약해서 효용적 가치에 대한 변론과 비판을 늘어놓으려고 했지만, 글도 너무 길어지고 생각 정리가 덜 되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사실 어디부터 생각해야 할지 몰라서 정리할 생각조차 없다. 그래서 언제 적을 수 있을 진 미지수이다. 물론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는 점이 다행이다. 대략적으로 적힐 내용을 열거해 놓자면, 1. '분화'와 '조정' 개념에 따른 인간의 자기기만 / 2. 융의 '그림자' 개념을 통한 잠재성 / 3. 무의식의 통제 불가능성 / 4. 각 척도의 과잉에 따른 병리적 징후 그리고 만약 여력이 된다면 5. 각 성향에 따른 가치관 정립 방식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구태여 이 글을 적는 이유는 내가 대략 5년 전에 떠올린 생각과 융이 제시한 알고리즘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서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재차 언급하자면, 이는 은유 따위가 아닌 정합적인 법칙이다. 누군가에겐 삼류학자의 엉터리 이론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500p 의 텍스트를 반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융이 제시한 4가지 척도를 통해 제시한 8가지 지표는 인간의 '사유의 기능', 즉 '생각을 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는 타인의 삶에 녹여진 말과 행동을 관찰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개인적인 성취로는 융의 <심리 유형> 뿐만 아니라,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던가 심지어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과 같은 소설에서조차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가설의 단초를 발견한 덕택이다. 생각보다 너무 게을렀지만 놓지 않았기에 망각 속에 파묻혀 있었던 감흥을 찾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양해의 첨언은 각 성향마다 1차 기능부터 8차 기능까지 나열하는 알고리즘에 대해 적으려 했었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설명할지도 모르겠고 시간도 없고 게다가 게으름 탓으로 안 적을 생각이다. 솔직히 별로 안 궁금해할 것 같으니 본인의 지표들이 궁금하다면 직접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feat. 감마남자의 삶..)


// 저서 정보

<심리유형> 칼 구스타프 융 (부글북스, 2019. 02. 10)

<마키아벨리 군주론이탈리아어 완역 결정판 / 정치적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니콜라 마키아벨리 (인간사랑, 2014. 10. 20)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존엄에 대한 요구와 분노의 정치에 대하여> 프랜시스 후쿠야마 (한국경제신문, 2020. 04. 20)

<죄와 벌 1, 2>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민음사, 2012. 03. 30)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12. 04. 10)

<백 년의 고독 1, 2>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2000. 01. 05)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민음사, 2012.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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