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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Apr 30. 2023

데미안 신화

우리 시대의 우상

    상징의 최고 중요성은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에 있다.

- <분석심리학> 칼 구스타프 융.


    역사의 전체 과정이 순환한다면 작금의 시대는 어디쯤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현재의 경기 불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미지수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가질 것이라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어 놓는다. 출산율의 하락이나 물가 상승률, 그리고 여전히 신기록을 갱신하는 자살률이 무색하게 냉소는 더 깊어진다. 게다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치 역학과 더불어 특정 산업에서의 출혈 경쟁, 주기적으로 언급되는 환경 관련 문제, 그리고 주변에서는 구조 조정으로 인한 권고사직 및 희망퇴직 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전망도 밝다. 세상은 점차 빠르게 변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과 구조에 대한 편린들이 아닐까.


    지금 적힐 글은 대략 3~4년 즘의 의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당시 아주 불쾌한 생각에 사로잡힌 후 써 볼 의향은 충분했으나 개념 정리가 되지 않아 적지 못한 생각이다. 심지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순간이었기에 의문만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를 회고하면 독일 철학을 대략적으로 훑어보고 정신분석에 입문했을 때인데, 공부할 때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었었다. 책의 골자가 니체적이라는 건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 소설 속에서조차 니체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언급했으니 조예가 있다던가 아니면 헤세가 독일계 소설가라던가 하는 부연 설명은 딱히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조예가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소설의 말미에선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책을 접하면서 정리된 생각이 현재의 글이다.


    우선 <데미안>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종교적으로 신실한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자랐다. 아무래도 그런 엄격한 탓인지, 터부시되는 것에 대한 사소한 욕망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사소한 악행을 저지르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저열한 욕구를 해소할 방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악행으로 인해 오히려 약점을 잡혀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으며 기가 죽은 채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와중 데미안이 운명처럼 나타났고 소심함으로 일관하던 태도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뀌던가. 그 이후에도 싱클레어는 오랜 시간을 방황하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놓지 않았던 것이 있다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이를 지탱하고 있던 정념은 데미안에 대한 동경이었다. 여기까진 주인공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마음에 내재한 문제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는 꽤 감동적인 이야기로 단순하게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정에서 얻지 못한 안락함을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마부인'을 통해 얻는다는 소설적 설정 또한 일종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던가. 그러나 어느 철학자가 사다리를 걷어차버려야 된다고 했던가. 문제는 스스로 성장했다고 믿지만 여전히 데미안의 그림자를 벗어던지지 못했다는 점과 더불어 진짜 문제는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묶어 놓은 결속 자체이다. 데미안과 재회한 대목에서 불쾌함이 시작되는데, 그 '대목'을 한 번 살펴보자.

    이따금씩 나는 자주 내 삶의 평화로움에 놀라곤 했다. 나는 워낙 오래 홀로였고, 포기를 연습하고, 나 자신의 고통으로 힘들게 허우적거리는데 익숙했던 터라 H시에서의 이 몇 달은 꿈의 섬처럼 느껴졌다. 거기서 나는 요술에 걸린 듯 편안하게 오직 아름답고, 유쾌한 일과 생각들 속에서 살 수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구상하는 보다 높은 새로운 공동체의 전조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 <데미안> 210p.

    싱클레어가 꽤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지냈으며 많은 것들을 체념했었고 끊임없이 자신을 질책하며 시간을 보냈다는 것, 게다가 에마부인 덕에 안도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고백은 '소속에 대한 욕구'를 해소할 안정적 지반을 얻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어떤 궤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니체가 망치를 들고 만들어 놓은 길이다. 자고로 니체적 사고방식의 일환이라 함은 관습, 문화, 규범 등등과 같은 집단성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만의 규율을 만들라는 것일 텐데, 주인공은 독자성을 일깨우기는커녕 오히려 지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이런 진부한 담론은 막론하고 그 이후에 '높은 새로운 공동체의 전조' 따위의 표현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깃들어 있다. 이 대목이 나치의 도래를 표상하게끔 이끈다는 것은 전혀 억측스럽지 않을 것이다.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는 현재에 이르러 2차 세계대전이라는 파국의 원인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로 인해 몇 년 전까지도 나치 추종자들의 재판 소식이 들렸다. 이뿐만 아니라 히틀러나 괴벨스와 같은 인물들에게는 '희대의 악인'이라는 수식어가 달렸다. 하지만 이러한 가치판단을 차치하고 생각해 보자면, 예수나 석가와 같은 성인들에 비견할 바는 아닐지라도 히틀러는 역사상으로 최고의 동기부여 전문가로 손꼽혀도 무색하지 않는가? 국소적이라 한들 그는 대중을 영합하는데 성공했다. 철학의 이상이 '세계의 종합'이라면 나치즘은 4대 성인 이후로 전례 없는 화합을 이뤄냈다면 억척스러울까? 그런데 문제는 소설 속에서는 그 유래를 추적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점이 <데미안>의 난해함이다. 소설의 전개상 아무런 부연 설명 그리고 복선 따위도 없이 지긋지긋하게 자기 성철만 했던 싱클레어라는 인물이 갑자기 공동체적 운명에 대해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두 청년이 짊어진 운명으로의 예속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도약이다. 다음 대목에서는 전쟁에 대한 암시를 통해 그들이 마주할 운명을 예견한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내가 인간을 과소평가했음을 알았다. 그렇게 봉사와 공동의 위험이 그들을 제아무리 제복을 입혀 획일화해 놓았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운명의 의지에 눈부시도록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많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공격 때뿐만 아니라 어느 때나 확고하고 먼, 약간 신들린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시선은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엄청난 것에 몰두해 있음을 뜻한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무얼 원하든 믿고 생각한다. - 자기들이 준비되어 있고, 쓸모 있다고, 그들에게서 미래가 형성되리라고.

- <데미안> 218p.

    이는 소설 속에서 재회 후 전쟁이 일어났으며 싱클레어에게 '공동체적 운명'이라는 수사를 통해 암시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니체가 자신의 운명을 통해 이미 보여준 '운명에의 의지'와 같은 수사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헤세의 글을 통해 총 3가지 정도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독일 철학적 계보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마음에서 '인정욕'과 더불어 그러한 마음이 현실 구조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대한 추론이다. 마지막으로는 '언어의 지위' 그리고 '상징'에 대한 담론이다.




    우선, 나치즘의 원형에 대한 대략적인 추론을 적고자 한다.


    독일 철학에서 칸트를 이어받은 헤겔, 헤겔을 반목한 쇼펜하우어, 헤겔을 반목하며 쇼펜하우어의 표상을 이어받은 마르크스, 쇼펜하우어의 의지를 이으면서도 그를 부정한 니체, 그리고 니체의 의지를 이어받은 하이데거까지. 지금 열거한 독일의 저명한 사상가들은 독일 철학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사상가들 사이에서는 개인의 존엄과 독자적 개성 또는 '독존'이라는 한 항과 공동체적 규율 내지 공동의 목표 그리고 '공적 영역' 따위를 다루는 반대항으로 나눠져 대립한다. 이는 독일 철학이 아니더라도 거대 담론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이율배반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하면 자연스레 집단적 규율은 약해진다. 반면 공공적 영역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희생은 불가피한 일이 된다. 즉 철학 담론에서 어디를 중점으로 삼느냐에 따라 개인과 집단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진 채로 의미를 개진한다. 물론 이는 단순 추론이라 구태여 나누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묻기를, 독일 전체 사상에서 대체 어디서 그 접합점을 찾을 수 있는가? 그나마 총체적 관점을 갖는 철학이라면 헤겔이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과 공동체라는 화해할 수 없는 불균형이 내재되어 있다. 헤세가 소설적 상상력을 통해 소급적용시키지 못한 채 어린 싱클레어 앞에 데마인이 등장한 것과 같은 우연한 인연, 그리고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공동체적 운명'을 암시한 대목이 불균형으로 인한 해소되지 않는 '간극'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역사적으로 히틀러와 휘하 나치들은 대중을 규합해 내는데 버젓이 성공했다.


    당시 독일 상황을 살피면 1919년도 1차 세계 대전 패망 후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로 인해 마르크화를 찍어낼 수밖에 없었고 통화량의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레 독일 경제는 비탄의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 독일에 살던 젊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외부에는 조악한 현실이 존재했으며 내부에는 불가피한 현실을 타계하기 위한 의지가 필요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의지 자체 대해서만 논한다면 니체는 제격인 인물이다. 그러나 니체의 글귀는 굴레에 메이지 않는 창조적인 사람을 위한 잠언이 아니던가. 적어도 니체의 책을 읽었더라면, 니체적으로 산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이해할 것이다. 의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초인적인 지성을 발휘하여 무한한 상상력과 첨예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얻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즉 천재들에게 헌정된 수사들은 하나의 경로를 제공할 뿐, 동기나 태도를 배운다고 없던 천재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초인'이라는 것은 불가능함에도 조악함이라는 조건은 그러한 지반을 무시하며 어느새 불가능한 것은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니체가 부정한 쇼펜하우어의 말 "의지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함의일 테지만, 어쩌면 니체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숭고한 도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의지를 치켜세우기 위해 니체를 꺼내드는 건 탁월하고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마땅히 택해야 할 불가피하고 예정된 수순에 불과할까? 일련의 우연은 필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순 없다. 하지만 응당 치러야 할 대가와 필요에 의한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점이 명석판명할 때, 예측-가능한 우연이란 어불성설이 아닌가.


    좌우지간, 이러한 시도-불가능한 도전-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가능성에 대한 실패로 인한 좌절 그리고 계속되는 좌절로 인한 끊임없는 질책과 자신에 대한 실망, 그리고 그 이후에 절망에 이르는 퇴행의 과정 속에서 주체가 가닿는 것은 '잔여물'이다. 실존적 무기력과 인정에 대한 욕구, 그리고 라캉의 "욕망의 실패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욕망의 실패는 항상 성적인 욕망으로 남는다."라는 말이 참이라면 관능성의 결핍에 시달리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독일의 역사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듯이 실패가 거듭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과도기적 상황은 조악한 현실을 타계하기 위해 더 큰 의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적으로 그러한 의지의 필요와 더불어 의존성도 과도해진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있던 니체의 반대편 손에는 더 단단하고 견고한 쇠사슬을 들고 있다.




    여기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내용을 참조점으로 삼아 두 번째 추론에 대해 이어나가도록 하자.


    소설 속 주인공인 라스콜니노프는 의협심이 넘치고 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소설의 도입부에서 자신이 도움을 주고서도 고맙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냉담한 시선만 돌아왔다. 또한 자신이 대학에서 갈고닦은 지식들은 쓸 모가 없다. 세상이 그를 미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딱히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점점 모욕조차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무뎌지고 있을 때, 운명처럼 "의미"란 것이 찾아왔다. 공교롭게도 엿듣게 된 술집에서의 담화에 자신의 "존재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악덕 업주인 전장포 노파를 살해함으로써 가련한 서사가 전개된다.

    라스콜니노프는 굉장히 흥분한 상태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이 형식과 주제만 다를 뿐, 아주 평범하고 이미 수차례나 들어온, 아주 흔한 젊은이들 특유의 대화와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지금 이런 대화와 이런 생각을 듣게 된 것일까, 그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막 생겨난 지금.....? 왜 하필이면 노파에게서 그런 생각의 맹아를 막 얻어 온 지금, 때마침 노파에 관한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일까......?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항상 이상하게 여겨졌다. 이 하찮은 술집의 대화가 앞으로 일이 진척됨에 따라 그에게 굉장한 영향을 미쳤다. 정말로 여기에는 어떤 숙명이, 계시가 있는 것 같았다...

- <죄와 벌 1> 124p,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다음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라스콜니노브의 말에서는 자기 자신의 '영웅화'를 욕망한다. 그러니까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누군가에게 - 불특정 다수일지언정 -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한 발로가 노파를 살해한 실질적 동기이다. 그전에 노파가 악덕 업주이며 그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하다는 논조는 명시적일 따름일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에 의해 죽은 노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악마화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좌우지간, 거듭되는 퇴행과 콤플렉스의 축적은 해방의 순간을 목놓아 기다린다. 마치 안 쪽으로 말려 있던 무언가가 탄성에 의해 펼쳐지듯이,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던 블랙홀이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를 견디다 못해 폭발하듯이, 그리고 사회 전방위적으로 퍼진 서로에 대한 불신이 유대를 끊음으로써 공공 영역이 와해되듯이,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심리에서조차 케케묵고 낡은 목표를 오랫동안 부여잡다 놓을 수 있게 되었을 때 - 그것이 성취를 통해서든 체념을 통해서든 - 일종의 쾌적한 느낌이 해방의 일종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한들 인간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지는 여러 관점이나 개념을 통해 그것이 확연히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뿐이다. 게다가 굳이 진부한 설명에 기대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누군가에게 호의를 받거나, 대중에게 동경을 넘어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 더불어 사랑받고 존중받음으로써 몹시 기분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보편적 현상은 확실히 실재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성에 말미암아 항상 하는 얘기를 또 하자면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립한다. 마치 옛 성인들이 의식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들이 하나이며 만물은 변화하는 현상에 국한된 것'이라는 말에 견주어 본다면, 타인조차도 나 자신의 부분일 따름이다. 즉 타자 또한 자아의 구성 요소이기에 우리가 타인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교의적 측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서 라캉의 관점을 견지한다면 그 의미는 좀 더 명확해질지도 모르겠다. 라캉의 말대로 "무의식이 열릴 때는 타자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응시점 속에서의 타자는 주체가 욕망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일축하면 "정체성"이 아닐까. 즉 '나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자, '타자'란 주체성과 주체의 욕망을 판단하는 선험적 지표로 작용한다.


    "정체성"은 현재 생각을 정립할 계기가 된 개념이다. 첨언하자면 <데미안>이나 <죄와 벌>, 그리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정체성>과 같은 소설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데미안>에서 "자기들이 준비되어 있고, 쓸모 있다고, 그들에게서 미래가 형성되리라고"라고 싱클레어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쓸 모 있는" 존재이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니노프가 '숙명'이나 '계시' 따위의 현학적이고도 거창한 수사를 통해 따분하고 비루하고 무의미한 삶을 포장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타자와 유대하지만 관계의 불만성을 내세우며 자신의 뿌리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을 내포한 파편화된 인간을 보여주며, <정체성>에서는 타자성이 소실된 개인의 심리 상태를 적나라케 보여준다. (참고로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파리에서 전반적인 인생을 보냈다.) 이런 측면에서 소설은 개념서보다 훨씬 더 탁월한 점이 있다. 복잡한 감정에 의한 행동 묘사와 상황 묘사는 개념을 나열한 서적보다 내면에 대한 더 깊은 몰입이 가능해야만 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개념서를 더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일련의 예시들에서 보이는 감탄할 만한 통찰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여 고작 3줄에 담아낸다.

    젊은이들을 움직인 것은 이런 요인들이나 어떤 독실한 신앙심이 아니라 바로 정체성과 의미, 그리고 자부심에 대한 필요성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내면의 자아가 있음을, 외부 세계에 억압받는 자아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 <존중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124p, 프랜시스 후쿠야마

  

    인정에 대한 욕구는 보편적이다. 즉 만인에게 적용된다.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며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개개인의 징후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개인마다 기질과 성향에 따라 다른 행동 양상을 보인다. 이런 측면에서 징후란 일반적이다. 반면 현인이나 지성인의 일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기묘한 언행은 몹시 한정적으로 보이며 심지어 특권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이 욕구 자체에 대한 거부는 몹시 어렵다. 간혹 자기 개발서나 동기부여 영상에서 여러 징후들을 자제하는 것을 넘어 거부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이나 고양된 인격 따위와 연결지어 설명하는데, 대다수의 태도는 대체적 심급을 찾거나 아니면 의지 자체를 소급 적용 시키는 것으로 방도를 마련한다. 니체의 잠언 형식의 글귀도 의지적 규율에 대해 피력하지만 정신 병동에 내원하고 죽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글, 특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짐작했던 기억이 있다.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이 세계가 모순적인 탓일까? 굳이 변론을 찾자면 '인간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너무나도 혐오한다.' 정도로 일축해도 좋을까? 잘 모르겠다. 이쯤 되니 정녕 니체가 망치로 무언가를 부수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교착 상태를 정리해 볼 의향이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인간의 이러한 본연적 욕망은 현행적 사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작금은 해체주의적 사조가 대단한 위세를 펼치는 것 같다. 또한 도덕적 우월감에 기초해 있다는 인식은 통념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문제는 사상에 경도된 사람들을 비판하고 적대시하는 태도가 일시적 방편은 될지라도 모범답안이 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을 때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례가 있다. 사례에서는 감옥에 갇힌 광인은 자신을 '예수'라 믿었다. 그는 양팔이 쇠사슬에 묶여 태형을 받는 형벌에 처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를 치료한 의사-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의 처방은 그를 쇠사슬에서 풀어주고 태형을 멈추고 다친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 사람은 며칠 동안은 잠잠히 있었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사례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건, 특정 사상에 경도된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을 비판 내지 비난하는 반대 세력의 존재는 되레 자신의 가치를 반증하는 초석이 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일련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문제시되는 것은 자아의 빈곤성이다. 모든 집단성을 와해시킴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에 도달해 잠재력을 펼치긴커녕 그러한 명령을 고집하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 가능성이 열어 젖혀지는가? 이는 그저 "깨달은 자"의 지위가 주는 일시적 도취감을 즐기는 것이며 이를 영속시키는 방편을 마련하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 존재가 될 수 있었기에, 소속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 무가치함에 전도되지 않게 됨으로써 정신적 무기력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재차 언급하자면 니체의 이상향은 삶을 대하는 "방식"이나 "태도"이다. 이것이 잠재되어 있는 인간성을 일깨우는 방법론이라면 옳다. 이러한 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세상이 혼란스러웠으며 기질적으로 아주 뛰어난 지성을 겸비한 덕택이다. 니체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그리고 플라톤과 같은 위대한 지성들의 의심은 불멸의 관념을 낳았다. 그러나 이는 세상이 난세인 것과는 별개인 기질적인 문제로서, 재차 언급하자면 '없던 것'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그냥 없는 것이다. 이로 밀마임아 오히려 지독한 공회전이란 자신에게 아무런 잠재성도 없다는 반증으로의 귀결이다. 그리고 이는 곧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며, 어느새 자신에 대한 혐오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광적인 집착으로 이어질 따름이다. 집착? 의존의 가장 극단적인 양태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측면에서 좌파 정치권의 의뭉스러운 욕망인 '권력에 대한 솔직함'이야말로 가식이 없는 가장 진정성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스스로 결코 인정하지 못하는 문제가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은폐 자체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점, 그리고 은폐하지 않고서는 결코 해소할 수 없는 내재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러한 행위를 정당하게 만든다. 욕망은 주체의 의식에서의 합리화된 부분이며, 합리화적 행태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죄의식을 갖길 거부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고독이나 잠재력 그리고 자존과 같은 개념에 몰두한 이유는 인정욕 자체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인정욕의 대체항에 관심이 있었던 탓이다. 고독 또는 인정욕에 따른 수많은 징후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믿었다. 이로 인한 야만성을 최대한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몹시 중요했다. 하지만 이를 완전하게 해소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기대감 속에서 '상상적으로 유희하는 존재'라는 수식에 매달리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즉 제한적인 인간에게 헌정된다는 것은 이 세계와 신의 가혹함이었다. 그 후에 차안으로 자신의 내면의 상태와 징후를 파악한다면 어느 정도의 절제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인정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착 상태를 완전히 해소하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작금의 현실은 내면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적 여유가 너무 사치라는 것이다. 솔직하게 더 큰 문제는 여유를 차치하고 그 정도의 직관력이 존재하는 지도 의문이기 때문에 또다시 의지에 기대야만이 해결될 문제였다. 하지만 차안의 차안 또한 존재한다.


    참조점으로 삼을 수 있는 저서는 조지 오웰의 <1984>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권력적 욕망 내지 상징 자체가 갖는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대중을 규합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빅브라더'라는 이념 자체를 의미하는 상징적이고 비-실재적인 믿음을 설정하여 흥미로운 서사를 전개한 것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지식인이 몰락하는 과정 그리고 지식 자체가 죽는 과정을 그려냈다고 생각하는데, 아주 인상적인 통찰을 보여주는 소설적 설정은 소설 상의 사회가 성욕이 통제된 사회라는 점이다. 즉 섹스를 금지시켰다. 그래서 소설 속의 대중은 항상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주인공도 섹스를 하다 걸리는 바람에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섹스와 분노의 해소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섹스의 효용을 찾아보니 그 효과는 대단했다.


옥시토신 분비 증가 및 코티솔 분비 억제로 스트레스 감소

활성 산소 및 항체 증가로 인한 면역력 증진

성적 쾌감을 통한 관계 개선

혈압 감소 및 혈액 순환의 원활함으로 인한 심혈관 건강 증진

자기 존중감 증진


    이러한 효과들을 보았을 때 건강한 성관계의 효용에 대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론 간과하지 말아야 할 수식어는 '건강한'이다. 쾌락에 빠진 채 방탕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도한 성욕은 결핍의 실재성을 구체화할 따름이다. 성욕을 해소하는 행위가 모범 답안은 아닐지라도 분명 대안 정도는 되지 않을까? 적어도 "분개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명확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분개하는 자들은 왜 분개하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은 어떨까?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이런 식이다. "분개하는 자들이 은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또한 명확한 답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이다. 그리고 이는 성충동과 다를 바가 없으며 내재된 이유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지금까지의 의견들을 최대한 종합하면서 세 번째 추론을 이어가면 좋을 것 같다. 그전에 헤세의 일화에 대해 소개하겠다.


    이 일화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몹시 흥미로다. 헤세는 1919년도 즈음, 그러니까 독일이 패망한 후 시대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헤세 자신도 정신적으로 몹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했던 시기이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멕베스>에서 멕베스가 '세 마녀'의 말이 권력찬탈이라는 불순한(?) 생각의 시발점이 된 것처럼, 그 당시 독일 사회 전방위적으로 미지의 압력이라도 있었을까? 알 수 없다. 어쨌든, 그때 융을 만나 정신 감정을 받았으며 자기 내면으로의 침잠과 성찰을 통해 쓰인 책이 <데미안>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확실하게 예술이란 부정성의 승화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가가 쓴 내용은 "내가 되지 못한 것들", 프로이트적으로는 '실현되지 못한 과거의 소산'이다.


    처음에 <데미안>을 읽었을 때 하이데거에게 붙은 의혹처럼 해세가 나치에 복무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는데, 실상은 헤세가 나치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추방까지 됐다고 한다. 한 번 게워낸 상태라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헤세가 보여준 언행과는 별개로 그의 저서 <데미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 속에서 생을 마감한 독일 병사들의 품에서 2번째로 많이 발견된 책이라고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참고로 첫 번째는 명불허전, 영원한 베스트셀러이자 스티디셀러인 성경이다. 아이러니함은 차치하고서 단언컨대, 헤세의 책은 수많은 독일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데미안>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구름 속에서 커다란 도시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 수백만의 사람이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떼를 지어 넓은 풍경 위로 퍼져갔다. 그들 한가운데서 힘찬 신의 모습 하나가 나왔다. 머리에는 빛을 뿜는 별을 달고, 산처럼 크고, 에바 부인의 표정을 가지고. 그 모습 속으로 인간의 대열들이 거대한 동굴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러고는 사라졌다. 여신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 이마에서 표지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꿈 하나가 그녀를 지배하는 힘을 가진 듯 보였다. 그녀가 두 눈을 감았다. 그녀의 큰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갑자기 그녀가 맑고 높은 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이마에서 별들이 튀어나왔다. 수천 개의 빛나는 별들이. 그 별들은 찬란한 포물선을 그리며 검은 하늘 너머로 휘익 떨어졌다.

- <데미안> 219p.

    참으로 신비로우면서도 기이한 필력이다. 그리고 광적이다. 이는 싱클레어의 시선이며 포탄이 날아오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발행된 책이라 전쟁에 대한 묘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는 생생한 묘사라기보단 넘어 상상적이며 광기에 가까운 글쓰기를 보여준다. 미학적 수사들로 점철된 이 대목이 미치지 않고서 적을 수 있을까? 도대체 죽음의 순간 앞에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하나는 명확해진다. 신체를 부수고 찢기는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독일 병사들이 의존했던 것은 '신' 그리고 '데미안'이다. 즉 죽음의 공포 앞에서 그들이 기대어 있던 것은 비-실재적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구성되는 걸까?


    융은 언어적 고찰 중에서도 발화 행위에 초점을 맞춰 심리 상태를 추적해 내는 방법론을 <분석 심리학>에서 피력했다. 특히 니체의 진취적이면서도 특이한 면모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융을 전공한 피터슨의 주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명확한 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융에게 니체는 광인이었다. 이 책에 니체를 비판한 대목이 있는데 아쉽게도 필사하질 않았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적어볼 생각이다. 어쨌든, 융의 저서인 <분석 심리학>에서 발화와 언어 자체에 대한 고찰한 내용을 살펴보자. 

    연상 실험은 마찬가지로 따로 고립되어 있는 단어들의 쌍을 단순히 끌어내기만 하는 작업이 아니고 실험자와 테스트를 받는 사람 사이의 대화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연상 실험은 그 이상이다. 단어들은 정말로 응축된 행동과 상황, 사물들을 나타낸다.

- <분석심리학> 칼 구스타브 융

    이 내용에 초점을 맞춰 헤세의 글을 보면 헤세의 글이 언어의 '결집력'과 '연상력'을 잘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과도하게 의미부여가 된 결과이다. 앞서 언급했던 포탄이 날아오는 대목뿐만 아니라 싱클레어의 성찰과 독백에서조차 숭고함에 경도된 묘사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진다. 그렇다면 고작 언어 따위가 독일 병사들 그리고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걸까? 말해 무얼 하겠는가. 고작 언어라는 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현체제가 자본주의라고, 즉 돈이 많다고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시대처럼 물리적 힘이 세상을 지배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역사, 즉 기록이 시작된 이례로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했다. 언어에는 지배력이 있다. 여전히 성경이나 불교 경전의 '말씀' 그리고 수많은 지성인들의 식견은 위상을 잃었던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위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 하지만 그 위상 덕택에 가장 극단적인 파국의 가능성을 예견해야 할 판이라면, 바디우 같은 철학자의 마오주의가 완전 미친 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언어는 한 시대를 풍미하기 이전에 여러 세대를 걸쳐 전승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과 언어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사람은 소쉬르일 것이다. "매 순간 언어는 확립된 체계와 진화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시기마다 이것은 현행의 제도이자 과거의 산물이 됩니다."


    소쉬르의 다른 글을 좀 더 살펴보자.

    음성은 사고의 도구일 따름이고,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서 새로운 놀랄 만한 상응이 생겨납니다. 즉 청각, 음성의 복합 단위인 음성이 이번에는 관념과 결합해서 생리적, 심리학적인 복합 단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 <일반 언어학 강의> , 페르디낭 드 소쉬르

    언어는 분명 사회의 산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어의 담지자이다. 소시르의 언어에 대한 고찰을 초석으로 삼아 '도구적 이성'이라는 이성에 대한 이성적 비판이 출발하지 않았을까? 즉 언어의 음성 질료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를 개념화하는 수단이다. 또한 기표와 기의가 등치 된다는 것을 초석으로 삼았을 때, 많은 어휘를 뇌 속에 박아 넣었으며 그 의미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도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관망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됐든, 라캉은 인간 주체의 의식의 관점과 언어와의 관계 그리고 연상적 이미지와의 관계를 조망한다. 그리고 라캉은 소쉬르를 반박한다. 언어와 의미가 등치 되지 않으며 다른 의미와 무수한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이 해체주의를 관통하는 주장이다. 게다가 이를 넘어서 과연 음성이 사고의 도구에 불과할까? 라캉의 입장은 소쉬르를 반박한다. 시니피앙은 인간 존재에 대해 우위를 가지며 심지어 그러한 지위를 갖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하이데거 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지 않던가. 대체 어느 쪽이 도구인가? 기이하게도 언어는 스스로 존재한다. 언어는 실존을 앞선다.


    또한 페미니즘에서 성별을 남과 여라는 단순 이분법적 분류가 아닌 세세하고 다양하게 분류하는 것을 일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를 통해 성불하긴커녕 소기의 목적조차 달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공리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100가지가 훌쩍 넘는 성별을 만드는 고생이 다양성을 보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규정'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아무런 규정 없이 존재하는 인간은 공허하다.


    이를 통해 언어의 '규정성'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기능 자체에 대해 환기해 볼 수 있다. 언어는 대상을 규정한다. 일각에서 규정하는 사고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다는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고 한들, 그 입장을 탈피하기 위한 방법은 다시 언어 자체가 가진 본연의 기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무리 규정한다고한들, 엄밀하기는 커녕 의미부여의 결과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부여로 인해 가치 판단이 이뤄지고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 지에 대한 확실한 규정 속에서는 아무리 조악한 현실이 눈앞에 있다 한들, 그리고 불행이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한들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게 된다. 마치 자신의 눈앞에 떨어지는 포탄이 미학적 체험에 불과한 것처럼.




    앞의 내용은 이제 적힐 내용을 적기 위한 초석일 뿐이다. 지루하고 장황하게 적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아무렴 어떤가.


    앞서 3가지 추론은 대략 이렇다. 조악한 현실이 외부에 존재하고 이를 탈피하기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 인간은 타인에게 인정받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소원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러한 가치의 실현이 의미부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특정 성향을 곁들이면 '원형'을 통한 대중적 암시가 사회 전방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시원은 불분명하지만.


    성향에 대한 설명을 위해 융의 글을 살펴보자.

    외향적인 유형인 경우에, 대상은 주체의 성향에 마치 자석처럼 영향을 미친다. 또 대상은 주체를 상당 부분 좌우하며 심지어 주체를 그 사람 본인으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주체의 특성들이 대상과의 동화로 인해 심하게 변형된다. 그런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면 대상이 그 사람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대상이 절대적인 요소처럼 보이거나, 인생의 특별한 목표처럼 보이거나, 대상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희생시키는 것이 그 사람의 운명처럼 보일 것이다.

- <심리 유형> 9p, 칼 구스타프 융.

    이는 외향적 유형에 대한 글이다. 내향적 유형이 자기 자신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에 치중하는 반면 외향적 유형은 대상과 의존적 관계를 맺는다. 이는 MBTI와 관련된 추론 글을 적으면서 각 지표가 함축하고 있는 성향들이 극단적이게 되었을 때, 어떤 병리적 문제를 겪게 되는 지를 정리해 보려 했는데 개념이 부족해서 아직 안 하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밝히자면 '피학적 성향', 즉 마조히즘이다.


    피학적 성향에 대한 명석한 통찰을 보여준 사람은 역시나 헤겔이 아닐까. 아직까지도 헤겔의 책은 안 읽어봤으니 헤겔의 글 말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참조점으로 삼아 논의를 개진하도록 하자.


    군주는 어떤 의미에서는 노예보다 인간적인 상태이다. 그는 인정이라는 비생물학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생물학적인 특성을 자진해서 극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위험에 노출함으로써 군주는 자유를 과시한 것이다 노예 쪽은 거꾸로, 홉스의 충고에 따라 폭력적인 죽음의 공포에 굴복한다. 때문에 그는 언제까지나 가난하고 겁 많은 동물이며, 자신의 생물학적 혹은 선천적인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예가 자유가 아닌 인간으로서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군주에게 있어 딜레마의 시작이 된다. 군주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똑같은 가치와 존엄을 갖추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 <역사의 종말> 270p, 프랜시스 후쿠야마

    노예는 주인에게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예속의 상태로 던진다. 반면 주인은 자신에게 내재한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노예에게 굴종을 강요한다. 그러나 문제는 노예로부터의 인정은 언제나 불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못한 존재를 통한 인정인 탓이다. 주인의 불만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이는 종종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부를 SNS를 통해 보여주는 이유인즉슨,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을 과시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불만족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 불만족이다. 그렇다면 주인의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은 무엇일까? 이미 답은 나왔다. 이는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존재에게 인정을 받으면 된다. 만약에 이 답이 유효하다면 주인은 노예가 아님에도 여전히 노예의 속성을 간직하고 있다. 즉 주인의 딜레마는 자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한들 여전히 인정받기를 원하고 그 인정은 어느 정도의 예속을 원한다는 점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보여준 '우연한 계시'라는 암시와 개인의 영웅화에 대한 서술이 '가치적 존재'와 '인정에 대한 욕망'을 표방하는 것과 같이, 해체주의적 사조가 시스템의 시대착오적인 면을 통해 불만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처럼, 아니면 헤겔의 '아름다운 영혼의 변증법'에서 아름다운 영혼이란 자신이 적대시하는 질서를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니체라는 한 개인의 삶과 사상적 실패(?)에서도 드러난 것인즉슨, 독자적 존재의 완전무결한 자기만족이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로 인해 불균형은 불가피한 일이 되는데, 이 불균형을 이념의 극대화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시화되는 사회 현상이 해겔의 견해에서의 '혁명'이라거나 아니면 역사가 반증하는 수많은 '전쟁'이 아닌가. 이를 보여준 지성인과 저서는 앞서 언급한 조지 오웰과 <1984>이다.


    '빅 브라더'만큼 이념에 대해 적절하고 적나라케 그리고 심도 있게 묘사한 개념은 없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조지 오웰이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상징과 더불어 외부의 적 - 소설 상에서 존재하는 지도 불명확한 - 을 만들어 분노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통제된 사회까지, 이는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정치적 전략이 아니던가? 여담으로 간혹 뉴스에서 비단 우라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외부의 적 또는 혐오의 정서를 상기시키려는 시도를 보면 내부적으로 균열이 가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좌우지간, '빅 브라더'는 이념을 상정한다. 비-실재성, 불멸성, 외설성, 통제성, 허구성 등등의 속성을 내포하는 것이 조지 오웰의 소설 속의 상징이다.


    소설적 설정에서 느낀 바로써, 이는 대중의 인식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즉 대중적 무지이다. 하지만 이념은 비-실재성 그리고 허구성 따위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부족한 점이 있다. 정신분석에서 말한 것처럼 환상은 실존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탓이다. 그렇다면 이 부족한 부분을 메워 넣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환상이 실존이라면, 즉 엄연히 실존했었던 것 하지만 죽은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이는 3년 전 즈음, (백수였던 시절이라 시간관념이 없어 대략적인 시간조차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영화에서 본 대사가 드디어 이해되었다는 것이 이 글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다. 대사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지만, 아마 영화 <프로메테우스>였던 것 같다. 대사는 이렇다.


"가장 위대한 아버지는 죽은 아버지이다."


    이 대사를 뒤통수에 꼬리표처럼 매달아 놓고 다니면서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이해가 되지 않아 몹시 불편했던 기억만 있다. '죽은 아버지', 즉 '살아 있었던 아버지'라면 이념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 즉 '상징'이 될 수 있다. 이 상징 덕택에 언어는 단순한 언어 이상의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있으며, 이 상징과 연루된 한 개인은 더 이상 무가치해지지도 고독해지지도 않는다. 또한 앞서 언급한 딜레마를 겪는 주인조차도 과거에 살았던 위대한 아버지 아래에서는 자신을 예속의 상태로 던진다고 한들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징적 존재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각 개인은 연대한다. 상징은 어떤 나라에서든, 특히 어느 정도 입지를 갖는 나라라면 명확하게 존재한다. 가령 레닌이나 마오쩌둥 아니면 호찌민 같은 민족적, 국가적, 사상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시신을 남기지 말아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어김없이 방부처리되어 전시되었다. 이런 국가들은 공산국가였던 터라 자유민주주의 진영보다 훨씬 더 상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을 것이다. 더 가난했기 때문에 붕괴위기가 더 컸다. 그렇다고 자유 진영의 국가에서 그런 상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 워싱턴이나 링컨과 같은 사람을 예시로 들 수 있으며, 프랑스에 갔었을 때 나폴레옹 기념관이 그렇게 많더라. 게다가 영국과 일본은 제국주의 시절의 상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 현대사로 들어오면 '박정희'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이 아닐까? 박대통령이야 '쿠데타' 아니면 '군부 독재'라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사건 덕택에 확실히 문제 삼을 수 있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가? 개인적으로 일부 집단에서 왜 그토록 노대통령을 깎아내리는 것을 넘어 우스꽝스럽게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좌익 진영에서 상징적 존재가 될 만큼 아주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반증이다. 그래서 우익 진영은 나약한 양들을 대동하여 코알라 코스프레를 시켜가며 능욕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자발적 동참'이란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들이 얻은 심리적 효용은 자신이 '애국자'라는 규정과 자부심이다. 그들이 희화화된 노대통령을 보고 낄낄 댈 수 있었던 이유이다. 여기서 또 쇼펜하우어의 대단한 통찰력을 짚고 넘어가자면, "누군가 웃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명예스러움에 관한 열정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박대통령은 희화화되지 않는 것에 반해 왜 전두환 대통령은 왜 천사코스프레를 시키는가? 대충 감은 잡히지만 확실하진 않다.


    세련된 표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절하다 생각하는데, 요새는 '자아 의탁'이라는 표현을 하더라. '대상과의 동일화'라고 고지식하게 표현하는 것보다는 훨씬 이해하기 쉬운 것 같다. 어찌 됐든, 인간은 '절대적 우상' 내지 '신화적 존재'를 원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점이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표현을 통해 '신'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는 특정 학계의 시도는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비합리성에 대한 비판으로 꽤 합당해 보일지언정, 인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나약한 탓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신' 개념을 통해 안정적 지반을 얻는다는 프로이트의 개념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젝이 왜 인간은 어느 정도 예속의 상태를 원한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된다. 나치즘의 부흥은 히틀러와 휘하의 측근들을 통한 사회 전방위적 암시가 제대로 먹혀 들어갔기 때문일 텐데, 그의 연설을 보면 '위대한 독일'에 대해 언급하며 위대한 인물들을 낳은 곳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사건에 대해서 말해 무엇하겠는가. 적어도 '나치'가 변증법적 종합에서 최상의 상태였더라고, 그리고 그 최상이 필연이었다고 결론짓는다면 헤겔에 대한 부정이 의미가 있는가? 물론 최종 종합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이런 사건들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허영심의 결과라고 하면 너무 진부하다. 간혹 '인간의 욕심이 문제야'와 같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1차원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졌는데, 장황하게 늘어놓는다고 다를 게 무엇인가. 별반 다르지 않다.


    역사 속에 기록된 처참한 현실과 작금의 현실을 비교하면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가 적은 글을 보면 4차 산업혁명이 무색하게 인간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타인에 의한 공감과 호의, 승인 속에서 관찰과 주목을 받고 존재감이 인지되는 것은 우리가 부유함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가 부족함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것은 안락이나 기쁨이 아니라 허영심이다. 그러나 허영심이란 언제나 우리 자신이 타인과 관심과 승인의 대상이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도덕 감정론>을 직접 읽은 건 아니고 <역사의 종말>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인용한 내용을 가져왔다. 


    앞서 해체주의 사조에 대한 비판 및 언어에 대한 간략한 진술을 통해 그러한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야기했는데, 해체주의도 어느 정도의 유효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진정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 즉 배경이 중요하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비단 과학계뿐만 아니라 철학계에서도 대대적인 반성이 있었다. 과학계는 원자폭탄이라는 인류가 감당하기 힘든 기술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으며, 철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도덕'이나 '윤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회의감이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그에 대응하는 수많은 반향적 태도는 극단적인 파국을 예방하기 위한 불가피한 시도이다. 즉 제국주의를 비롯하여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라는 사상의 대항마로 등장했다. 즉 어떤 사상도 정당성을 갖기 위한 선재 조건이 존재한다. 언어의 해체는 인류 존망의 위기에서는 유효성을 갖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앞서 언급했듯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규율이 필요했던 시기가 종종 있었고 그 이후에는...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 더 과몰입하게 된 이후 모든 것들이 당위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조차도 이미 조건 지어진 현상에 의해 방향성이 결정되어 있다는 즉슨, 운명론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리고 '징후'라는 개념을 학습한 후 한 개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특정 사회 현상은 과도기적 양상의 단면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기울게 되었다. 다음 일은 역사가 이미 증명하고 있다. 뭔가 더 적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기쁘지만 안정감보다 불안감이 더 커졌다. 이 불안감 때문에 연단 위에서 현학적 표현을 써가며 의지에 대해 피력하는 명사들에게 반감을 가졌었다.


    용두사미가 어울리는 글이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사드의 <소돔 120일> 헤겔의 <정신현상학> 더해서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읽고 나서 적어야 했던 글이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히틀러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나름 변론(?) 아니면 합리화가 가능한데, 내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 안 되는 책들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항상 학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며 다음은 내가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복습보다 예습이 더 중요하다. 내가 이 책들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충분히 선행 학습이 이뤄진 상태로 읽어야만 했고 다른 책들이 더 궁금해서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물론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히틀러 책을 보니 쪽수가 만만치 않다. 적당히 정신 나간 놈은 아니었다. 너무 많아서 짜증이 치민다.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가장 처음으로 읽은 고전이 푸코의 <광기의 역사>인데 읽을거리가 많은 책인데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고 그냥 읽었었다. 문제는 다시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실 나의 과거의 불편한 기억을 일깨워 준 계기가 있었다. 아주 기이한 사람을 봤기 때문에 적은 글이기도 하다. 30대 후반의 미혼 여성으로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했는데, 하이데거의 책을 읽고 히틀러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말하는 것치고는 학구열이 부족한 것이 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하이데거의 저서 제목을 물어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어설프다.


    좀 더 청승을 떨어보자면, 이는 오래전부터 거듭되는 불안이다. 우선 개인적으로 생존의 위협으로 인해 겪게 되는 불안이며, 내가 속한 집단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며, 마지막으로는 인류 존속에 관련된 불안이다. 과도기라 표현했지만 작금의 현실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름대로의 규정일 뿐, 불명확한 규정이 불안의 원인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불안이 있다고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요즘 사회생활이란 것을 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죽기 전까지 방구석 박애주의자로 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방구석 박애주의자로 남지 않으려고 용기를 냈더니 방구석만큼 아늑한 곳이 없었다. 스피노자가 옳았다.


// 저서정보

<데미안> 민음사, 헤르만 헤세.

<죄와 벌> 민음사, 표토르 도스토옙스키.

<멕베스> 민음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1984> 민음사, 조지 오웰.

<존중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한국경제 신문,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한마음사, 프랜시스 후쿠야먀.

<분석심리학> 부글북스, 칼 구스타프 융.

<심리 유형> 부글북스, 칼 구스타프 융.

<일반 언어학 강의> 지식을 만드는 지식, 페르디낭 드 소시르.

<에크리> 새물결, 자크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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