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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망 May 09. 2024

백일장 대회

고등학교 1학년 백일장 대회. 시, 소설, 수필, 희곡 중 택 1 하여 쓰고 1500자 이상 작성해 보는 글쓰기. 두 시간 동안 진행되지만 시작하자마자 이름만 쓰고 엎드리는 학생들이 있다. 대회 감독을 하다가 심심해서 같이 백일장에 참여해 보았다.


주제: 비, 골목, 버스, 냄새, 흉터, 


비가 내렸다. 아주 많이.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는 지면을 뚫을 기세로 쏟아졌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밤이었다.

나는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기사님께 인사를 건넸지만 아저씨는 무응답으로 답했다. 비가 많이 내려서일까. 버스에 사람이 없다. 앞쪽에 아주머니 한 명. 뒤쪽에 아저씨 한 명.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제일 뒷자리로 이동해 털썩 주저앉았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은 이제 고단하지도 뿌듯하지도 않다. 그냥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듯 버스의자에 털썩 몸을 던진다.

수많은 빗줄기들이 버스 창문을 때리고 내 귓가에는 무거운 베이스 소리가 울린다. 요즘 내 최애곡은 바스터즈의 롤링 썬더. 심장을 울리는 무거운 베이스 리듬에 내 몸도 같이 울리는 듯하다.

언제나처럼 피어오른 버스 곰팡이냄새 속에 비가 내리면 나타나는 흙냄새가 섞여 있다.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려 할 때 두 냄새를 비집고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다. 평소에는 잘 맡지 못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이 철맛. 피냄새다. 역 할 정도로 많이 나지는 않지만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를 사이에서 우위를 점할 정도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어디서 나는 냄새지? 두리번거리며 냄새의 근원을 찾고 있을 때 두 자리 앞에 계신 아저씨의 손을 발견했다. 어딘가 불편한지 연신 손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아저씨. 오른손을 얼굴 근처에 가져가 손에 있는 상처를 확인한다. 까맣고 커다란 오른손 바닥에 손바닥 전체를 덮을만한 밴드가 붙어있다. 왼손으로 천천히 밴드를 벗기며 상처를 확인하는 아저씨. 나도 같이 그 현장에 참여한다. 많이 아픈진 상처에 바람을 불어 보지만 멀리서 봐도 병원에 가야 할 만큼 큰 상처로 보인다. 어디에 베이셨을까. 자세히 살펴보니 아저씨 손에는 수많은 흉터들이 있다. 왼쪽 엄지와 검지. 왼쪽 손등. 오른쪽 엄지와 중지. 멀리서도 보일만큼 크게 꿰맨 자국들이다. 오른손에 난 상처에 바람을 불던 아저씨는 이내 만족하셨는지 다시 밴드를 조심스럽게 덮기 시작했다. 얼마나 쓰라릴까 내 미간에 주름이 생겼을 때 갑자기 고개를 돌려 아저씨가 날 쳐다보았다.

이웃집 담장을 넘어 훔쳐보다 들킨 것 같이 나도 모르게 반대편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 비친 아저씨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다. 아무런 표정도 없던 그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번진다. 미소인가? 창문을 여전히 두드리는 빗줄기. 계속해서 귓가에 울려대는 롤링스톤. 그 박자에 맞추어 내 심장도 쿵쿵 뛰기 시작했다. 여전히 창문에 비친 그는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다. 이걸 미소라고 해야 하나? 혹시나 나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내가 착각하고 있나 싶은 마음에 기지개를 켜며 반대쪽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이 힐끔 아저씨는 분명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여전히.

다른 친구들이라면 아저씨에게 물어보냐고 대들어 볼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럴만한 용기나 배짱이 없다. 그냥 무시하는 수밖에. 잘 몰랐지만 아저씨는 무섭지 않은, 그냥 조금 얼굴이 까맣고 머리가 짧은, 평범한 인상의 아저씨였다. 그런데 왜 무섭지.

아저씨가 먼저 내리길 바랐지만 아저씨는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던 마음이 점차 짜증으로 바뀌어갔다. 내가 뭘 했다고 날 계속 쳐다보는 거야란 생각이 뭘 쳐다보는 거야라는 아저씨에 대한 짜증으로, 그리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나 자신에 대한 한심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 짜증 나는 상황은 내릴 때가 되어 해소되었다. 

여전히 퍼붓고 있는 빗줄기에 잠시 버스 문 앞에서 머뭇거렸지만 우산을 펼치며 보도로 탈출하듯 뛰어내렸다. 왜 아저씨는 나를 쳐다봤을까. 나는 왜 말을 하지 못했을까 생각이 생각을 물 때쯤 버스가 출발하다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저씨가 따라 내리는 게 보인다.

내 안에 모든 생각들은 사라지고 다시 우산을 때리는 빗줄기. 바스터즈의 헥토파스칼에 맞추어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내 걸음에 맞추어 따라오는 인기척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제 골목으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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