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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둥두 Apr 06. 2024

한계

아무래도 올해 가장 잘 한 일은 "휴학계를 낸 것" 이라 본다. 지금 당장도 해야할 일이 쏟아지는데 수업까지 들었다면 어땠을지...정말 끔찍하다. 작년 기말고사 기간까지만 해도 올해는 여유로울 줄 알았다. 점수나 과제에 대한 압박 없이 느긋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아마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정신 없는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근 몇 주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아무 것도 안 하던 연초에는 바쁨을 동경했고 그리워했는데, 정작 시간표가 꽉꽉 채워지고 나니 벗어나고 싶어하는 걸 보면 우리가 움켜쥐고자 하는 건 자기한텐 없는 무언가인가보다. 월화수목금 5일간 휘몰아치는 동아리활동이 지나고 잠시 숨을 고르자면 어느새 출근할 시간이 다가와있다. 일요일 저녁, 해가 다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는 끝이 나는데.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 나는 어느새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쫌 잘 하고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한 달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산산히 부서졌다. 뭐랄까, '나 정도면 열심히 사는 편이지' 라는 믿음이라든가 '나 정도면 대단히 열린 사람이지' 따위의 말은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다들 봐주고 있었던거다.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진행되어 온 일들은 내가 입 뗄 것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서 그런거라기보다도 그냥 다른 사람들이 가만 있어줬기 때문에 이날 이때까지 굴러갈 수 있었던거라 생각한다. 얼마나 좁고 얕은 세상에 갇혀 있었는지 새삼 실감하는 요즘이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고 그 다음엔 부정했다. 화도 내봤고, 미친사람처럼 너털웃음도 지어봤지만 결국엔 인정하는 수 밖에, 나는 고집스러운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게 가장 꼴불견이라고 여겼는데 회장으로서의 나는 내가 가장 혐오하던 그 시절 어른들을 닮아있었다. 무서웠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가는 건 아닐까하고. 나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고 일축해오던 사람들과 나는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알맹이 없는 인사치레가 너무 싫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만 번지르르해서는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느새 나는 그 소용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새로 알게된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생경하고 반가웠었는데. 만남의 설렘보다도 정체 모를 의무감이 점차 커지는 느낌이었다.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과 그냥 다 놓아버리고 싶다는 무력감 사이에서 허덕이기를 몇 주, 굵직한 일정은 아직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내 한계인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중인 줄 알았는데 사실 난 한계를 넘어 수렴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어른으로 끝없이끝없이 가까워지며 점차 성숙한 인간으로서 구색을 맞춰가는 중이라고.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당연히 맡은 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좋은 회장이 되어야 하고,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 마지막 목표는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 무던히 참고 계속해서 벼려내야 한다. 책임이란 그런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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