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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끔 Oct 05. 2022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나는 지금 신경주에서 영등포로 가는 KTX 안이다. 몸뚱이는 피로한데 정신은 이상하리만치 상쾌하다. 작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에 이틀 치의 일기를 빠짐없이 남기고 싶어졌다. 큰 깨달음은 아니지만 무용하게 흘려보낼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서다.


며칠 전 넋이 나간 채로 일을 하다 돌연 떠나고 싶어졌다. 보통은 순간 들이닥치는 즉흥은 그대로 휘발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응해야 할 것 같았다. 해서 목적지는 경주,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막힘 없이 계획을 세웠다. 기차를 예약하고 맛집도 검색하며 이른 설렘에 취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올까 싶었으나 제법 흥분했는지 주변 몇몇에게 벌써 입방정을 떨어 버린 후였다.


9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주 전부터 일기예보를 챙겼지만 비 소식이 내리 잡혔다. 곧바로 숙소 측에 문의를 넣었지만 예약 취소는 어렵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내 그럴 줄 알았다며 내심 속으로는 좋아라 했던 것도 같다. 배짱인지 낭만인지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해볼까 싶었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터였으니.


꼬박 잠을 자고 오는 여행은 처음이었던지라 이른 출발에도 확실히 들떠있었다. 새벽녘을 뚫고 도착한 신경주역은 약간의 기대가 무색하게 먹구름이 뿐이었다. 시무룩할 때가 아니다. 일단 꾸륵대는 뱃사정을 살펴야 했으니까. 황리단길에 위치한 생선구이집으로 향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고등어, 옆으로는 정갈한 오찬과 미역국이 놓였다. 혼밥은 능하지만 가시를 바르는 일은 서툴다. 한 숟갈 푸면 자연스럽게 고기가 올라오던 집밥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휴일의 황리단길은 예상대로 북적였다. 이제야 경주에 당도했다는 묘한 즐거움이 샘솟았다. 순조로운 체크인을 마치고 방 한편에 달린 거울 앞에서 호흡을 정리했다. 다음은 역사적인 기록들과 조우할 차례. 대릉원의 잔디들은 윤이 나고 있었고, 첨성대의 돌들도 앞으로 수년은 더 끄떡없을 듯 보였다. 밤에 찾은 안압지는 소나무와 못이 다했더랬다. 자연과 문화가 나란히 선사하는 기운에 홀랑 넘어가고만 나는 헐거운 샌들과 퉁퉁 부은 다리는 모른 체할 수밖에.


비 온 뒤라 습기로 땀은 평소보다 찐득했고 목도 말라왔다. 사전에 카페 다섯 곳을 봐뒀지만 길목 한 가게의 고소한 커피 향이 나를 잡았다. 습관처럼 시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삼키고 멋쩍게 빵과 아포가토를 주문했다. 맛은 그런대로. 처음으로 필름카메라를 꺼내 여기저기 담았다. 그러고는 아까 마주친 책방에서 뜻밖에 건진 고레에다 에세이집으로 시간을 죽였다. 영화 밖에서의 그는 보기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유쾌한 성미며, 문체도 잔잔하고 친근했다.


가을이 코앞이라 해가 떨어지는 속도도 빨랐다. 서둘러 귀가해 땀방울을 제거했다. 샤워를 하고 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맞은편 선술집에 들러 맥주라도 들이켤까 싶었지만 내일마저 망치지 않으려면 재정비는 몹시 중요했다. 무거운 눈꺼풀과 아늑한 침대에 당하고 말았지만. 알람을 미처 맞추지 못해 빗소리에 깼다. 토스트 네 조각과 오렌지 주스를 먹으며 궂은 날씨로 도배된 창밖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생쥐꼴을 면하려면 미술관과 국밥집을 삭제해야 했다. 아무 한정식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어제 미처 가지 못한 월정교로 발을 돌렸다. 평일 낮은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다리를 건너 박물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경주에서 믿을 것은 오로지 두 다리뿐. 황당한 거리에 구시렁대기 무섭게 정문에 다다랐다. 최근에 동생이 공부한다고 같이 딴 한국사를 실제로 대하는 건 판타지한 경험이었다. 유구한 사물이 아직 존재하며, 그것을 당장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비바람이 매서웠다. 주저 없이 택시를 불렀지만 기대하던 찻집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로 환승해야 했다. 생경한 동네 풍경에 한 정거장 일찍 내려버렸다. 엉망이 된 몰골에 심술이 붙었지만 사근사근한 사장님 덕에 웃음이 났다. 손님은 나 하나. 독채에서 오색찬란한 궁중 다식을 즐겼다. 다도를 배우던 유년기를 떠올리며 깊숙한 목 넘김과 함께 달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신경도 엄마의 걱정이 묻은 연락으로 옮겨갔다. 심심하지 않은지, 말동무가 되어주겠다며. 그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동안 젖은 머리도 서서히 말라갔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니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반추하려 들었다. 첫 여행은 낙담할 정도는 아니었다. 축축한 돌담길, 가볍지 않은 경주의 멋, 다시 방문할 게하, 배불리 채운 눈요기, 알 수 없는 콧노래, 갑자기의 미학, 당연한 근육통, 반가운 내리사랑들이 남았으니. 당분간은 이 기억들을 고집스럽게 잡아둘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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