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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혜진 Mar 14. 2022

[‘책의 해’ 출판사 탐방③] 재인

“내가 읽어서 재미없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 2018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선포한 ‘책의 해’다. 북DB는 한국 출판·지식 생태계를 이끄는 주요 출판사를 만나 책에 대한 생각과 철학을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 기자 주 

박설림 대표  

신간이 나올 때마다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미스터리의 제왕 히가시노 게이고. 지난 2017년 한 해 인터파크 소설분야 판매 순위 100위권 중 10개가 그의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혈 독자라면 ‘재인’이라는 이름의 출판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재인은 2003년에 세워져 지금까지 30종 내외의 책을 출간한 1인 출판사다. 

재인에서는 디자인과 교정교열을 제외한 기획부터 편집, 원서대조, 도서 출고에 이르는 모든 일이 박설림 대표의 손으로 진행된다. 박 대표는 EBS 아나운서, PD직을 거쳐 2003년 처음 출판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설립 초창기에는 <보랏빛 소가 온다>(세스 고딘/ 2004년), <초등학생 때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김자영/ 2004년)와 같은 실용서를 출간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재인을 본격 일본소설 위주의 출판사로 이끈 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출판이 계기가 되었다. 출판사 설립 당시만 해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국내에서 지금만큼의 위상을 얻은 상태는 아니었다. 이때 재인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판권을 다수 확보했고 우리나라에 그의 작품이 본격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재인에서 출간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만해도 24종이다. 

재인은 오피스텔 한 칸을 사무실로 쓰고 있다. 일본 원서와 흥미로운 추리 소설들로 가득 찬 이 공간 안에서 정성스러운 작업을 거쳐 소설책이 탄생한다. 박설림 대표로부터 재인의 설립 배경과 출판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Q 재인이라는 출판사 이름이 궁금하다. 어떤 뜻이 있나? 

재인은 나의 딸 이름이다. 실을 재, 어질 인. 사람이 이름 따라 간다고 내 딸이지만 참 어진 성품을 가진 아이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나와는 다르다. 

Q 규모가 작은데도 지금까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 같은 소위 빅타이틀 책들을 많이 냈다. 그 비결이 있다면? 

처음에는 그 작품이 소위 빅타이틀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지명도가 있는 상태였지만 아직 한국 시장에서는 대단한 반응까지는 없었다. 한 축에서는 내가 좋아서, 다른 한 축은 해외 시장에서의 반응을 바탕으로 선택을 했다. 

Q 1인 출판사로서 기획부터 편집, 원서 대조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한다고 들었다. 조금 더 다양한 인원 구성을 취해볼 생각은 없었나? 

순수 독자이던 시절부터 편집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많은 자본을 가지고 큰 회사를 차리는 게 아닌 작은 출판사로서 좋은 편집자, 좋은 디자이너를 우리 회사로 모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프리랜서 형태로는 건마다 실력있는 디자이너 분들을 모실 수 있다. 평소 읽다가 디자인이 좋다고 생각했던 책마다 오필민 디자이너의 작품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오필민 디자이너에게 디자인 작업을 부탁하고 있다. 

Q 그동안 나온 책 중에 가장 반응이 좋았던 책은 무엇인가? 

판매부수 면에서는 <가면산장 살인사건>이 가장 잘 나갔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처음 나왔을 때는 이미 일본에서 출간된 지 상당히 오랜 기간이 흐른 뒤였다. 어떻게 보면 요즘 나오는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과는 달리 본격 추리 계열의 소설들이다. 그런 추리소설을 그리워하는 독자들이 많았기에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한 가지 에피소드가 겹쳤다. 2016년 11월 차은택 씨가 수감될 때 구치소에 반입한 5권의 책 중에 <가면산장 살인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도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스테디셀러가 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 


Q 재인이 문을 연 지 15년 정도가 되었다. 그간 출판에 대한 시각에 달라진 점이 있나?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읽어서 재미없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누구를 계도할 생각은 없지만 가능하면 선한 영향을 주는 책을 내려고 한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 않나? 정말 읽기 싫어도 좋은 책이 있는데 거기까지는 내 몫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영역은 나 말고도 더 잘 해줄 분이 많다. 

Q 출판사를 운영하며 가장 보람됐던 기억을 말해준다면? 

어떤 독자 리뷰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가령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했다가, 그 출판사가 폐업하면서 우리가 판권을 구입해서 다시 책을 낸 경우다. 당시 이 책을 출간할 때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거나 소위 대박을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다. 

나는 <백야행>이 <용의자 X의 헌신>과 투톱이라고 할 정도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고전이라고 생각했다.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사랑과 이면에 드리운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절묘한 문장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그래서 자극적이기보다는 30~40년이 지나도 이 모양 그대로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고전으로 남았으면 했다. 이를 위해 담담한 느낌을 지향했고 표지도 은은하게 구성했다. 

그런데 한 독자가 남긴 장문의 독자 리뷰에 ‘편집자는 아마도 이 책이 스테디한 느낌으로 자리하길 바라서 힘주지 않으려 한 것 같다’는 대목이 있었다. 독자들이 재미있는 책을 몰라준다고 생각되는 때가 있는 반면, 어떤 책은 독자들이 귀신같다고 생각될 만큼 다 안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될 때 참 좋더라.  


Q 방송국에서 일하다가 출판업에 뛰어들었다. 어떤 준비를 했나?


대학을 나오고 그 이상 공부를 많이 한 소위 ‘먹물’이라는 사람들이 공부가 아닌 다른 일에 뛰어들려 할 때 가장 쉽게 생각하는 것이 출판이다. 나도 처음 출판업에 뛰어들 땐 약간의 안이함이 있었던 것 같다. 막상 실제로 시작을 하니까 두려웠다. 말 하나, 글 한 자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좋은 작가의 책을 함부로 망쳐놓을 순 없었다. 그래서 출판인회의에서 하는 편집자 과정, 디자인 과정 수업을 들으며 나름대로 공부하고 다른 출판사를 찾아다니며 벤치마킹도 했다. 그럴 때 도움을 준 출판사들이 있었다. 당시에 출판인들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 본인의 마케팅 기획서, 출간 기획서, 발주서 양식까지 다 공유를 해주었다. 참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이를 통해서 피상적으로 봤던 것에서 현실 감각을 많이 일깨우게 되었다.


Q 원서대조도 직접 한다고 들었다. 원래 일본어 실력이 수준급이었나? 

원래는 대학교 교양 수업 수준에서 시작을 했다. 일본 가면 생활하는데 불편 없는 기초 일본어 수준이었다. 일본 소설 출간을 시작하면서 출판 에이전시에서 하는 출판인들을 위한 무료 일본어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도 했다. 초창기에 일본 소설 원서 대조를 할 때 책 몇 권은 전권을 거의 필사하다시피 했다. 이렇게 시작한 계기가 모르는 단어를 인터넷 사이트에서 필기 기능을 이용해서 직접 써보면서 하니까 훨씬 빨리 들어왔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엔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웬만한 것은 술술 읽을 수 있는 단계까지 온 것 같다. 

Q 엄청난 노력파다.(웃음) 

사실, 무모하다. 나는 능력은 없지만 독하게 열심히 하는 것만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 

Q 책 한 권을 작업하는데 얼마나 걸리나? 

대중 없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할 때까지 붙들고 있는다. 어떤 해에는 일 년에 세 권 나오는 해도 있고, 어떤 해에는 부지런히 해서 일 년에 대여섯 권 나오는 해도 있다. 출판 계획이 따로 없다는 게 문제가 되기도 한다. 저작권자에게 조금 늦어진다고 양해를 구하는 경우가 있다. 나 혼자 하는 작업이니까 너무 몰아쳐서 작업하면 판단력도 흐려지고 집중이 안 되어 원고가 이상하게 나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 자신의 컨디션도 조절하면서 하려고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건 마케팅 측면에서 좋지 않을 수도 있다. 


Q 올해 재인에서는 어떤 책이 나오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양대 시리즈로 ‘탐정 갈리레오 시리즈’, ‘가가 시리즈’가 있다. 올해 중에 가가 시리즈 <기도의 막이 내릴 때>와 갈릴레오 시리즈 <인어가 잠든 집>은 반드시 낼 생각이다. 

Q 더 보태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책은 좋은 출판사가 아닌 좋은 독자가 만든다고 생각한다. 출판사는 영업을 하는 입장이라 시장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전적으로 책임을 독자에게만 돌리는 것도 출판사 입장에선 무책임하지만 결국은 독자가 시장이다. 지금 다수의 힘, 다수의 목소리가 강력하게 나오고 있다. 여기에 긍정적 측면이 많은데 이것들이 한 단계 도약하여 조금 더 좋은 에너지로 집약이 된다면 책 만드는 입장에서도 힘이 날 것 같다. 

▲ 재인 대표 도서 

<보랏빛 소가 온다>(세스 고딘)
지구인 누구나 읽으면 힘이 되는 책. 마케팅에 관한 책이지만 인생에 관한 책이기도. 

<백야행>(히가시노 게이고)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고 치명적으로 불길한 사랑에 관한 소설. 단점은 읽고 나서 한동안 이 분위기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 

<용의자 X의 헌신>(히가시노 게이고)
자타 공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완전범죄를 꿈꾸는 천재 수학자와 그를 막으려는 천재 물리학자의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 그리고 사랑에 인생 전부를 건 한 남자의 이야기. 백 퍼센트의 사랑과 백 퍼센트의 헌신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가면산장 살인 사건>(히가시노 게이고)
‘밀실’과 ‘트릭’으로 대표되는 본격 추리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설. 잘 짜인 무대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은 이야기의 전개를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다 보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반전과 맞닥뜨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인다. 

▲ 재인이 추천하는 도서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을유문화사)
이 세상을, 그중에서도 생물이라는 존재를 다시 보게 만드는 책. 읽고 나면 세계관이 바뀔 가능성이 상당함.


<먼 북소리>(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하루키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얼 느끼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 이 작가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 한겨레출판)
강렬하게 웃기며 ‘이불 킥’하게 만드는 오글거림과 가슴이 확 뚫리는 통쾌함을 동시에 안겨 주는 소설. 때로는 처연하고 때로는 유쾌해서 정신 못 차리게 만든다. 

<사피엔스>(유발하라리/ 김영사)
오늘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가 아는 우리, 우리 자신도 모르는 우리에 대해 깊고도 폭넓은 통찰을 제시한다.

사진 : 임준형(원파인데이스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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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DB 2018.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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