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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May 21. 2024

네가 내내 행복하길 바라는 내가 있어

어떤 순간에도 기댈 수 있는 마법의 주문

저녁 9시 반 퇴근하고 집에 오는데 할까 말까 고민하던 일이 있었다. 대학 시절 친한 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에 생일 표시가 떠 있었다.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아기를 키우는 친구에게 연락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지 않을까 망설였다.

하지만 늘 생일을 핑계로 안부 인사를 나누었기에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친구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곧 친구에게서 고맙다는 답변이 왔다. 아기가 벌써 내년에 유치원생이 된다고 했다. 몇 차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메시지가 오갔고 대화를 끝마칠 쯤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친구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건넸다.


“네가 내내 행복하길 멀리서 응원하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줘”라고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에게서 귀여운 답장이 왔다.

“미튜”라고.


모험의 시작점

친구를 처음 만나던 날이 떠올랐다. 딱 스무 살이었을 때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날이었다. 이날 집결을 앞두고 얼마나 떨었는지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첫 모험이 시작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무해한 모범생’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렇다고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뭐든 적당한 아이. 평소처럼 수능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내내 받았던 점수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고, 서울 안에 갈 수 있는 곳은 한 대학교의 기계공학과 그것도 야간반뿐이었다. 이곳 아니면 재수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데 똑같은 공부를 일 년 더하며 같은 삶을 반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혼자서 학사편입이라는 답안지를 찾았고 지하철을 타고 서울의 한 직업전문학교에 면접을 보러 갔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원하는 걸 배워보자 싶었고 마음속에 막연히 품어왔던 패션 디자인학과에 지원했다. 당시 나를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거릴 만한 엉뚱한 선택지였는데, 다른 사람의 의견이 하나도 개입되지 않은, 오직 내 판단으로 내린 인생의 첫 중대한 결정이었다.      


너로 인해 계속할 수 있었던 모험

오리엔테이션을 앞두고 고민이 컸다. 아마도 내가 만나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예상했던 대로 그간의 내 친구들과는 무척 다른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쭈뼛대고 있었는데 너무나 반듯하고 예쁜 친구가 내 앞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친해졌다.

학교 공부만 하던 내게 디자인 수업은 흥미로웠지만 낯설었다. 헤매며 좌절하던 나를 친구는 늘 든든히 이끌어주었다.

편입시험을 준비하느라, 2학년의 2학기에는 거의 학교에 다니지 못했고 졸업 패션쇼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친구가 내 작품의 모델분이 신을 신발에 나 대신 락카도 칠해주고 꼼꼼히 챙겨줬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다.

당시 내가 다닌 대학교는 직업전문학교라는 특성처럼 늦은 나이에도 꿈을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다. 탈북한 분도 처음으로 뵈었다.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사람들과 정을 쌓고 든든한 우정을 나눴던 포근한 기억이 종종 무너지고 싶을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 이후 중요한 선택을 내려야 할 때마다, 힘이 빠질 때마다 이분들과의 추억이 담긴 공간을 습관처럼 찾는다. 기분 좋은 응원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또 기운을 내 다시 살아가기 위해서.


오직 직감에 의한 선택으로

6시에 학교 수업을 마치면 바로 편입학원에 가서 공부했다. 1년간 티비를 한 번도 보지 않고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은 치열한 시간이었지만, 힘듦보다는 충만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패션쇼에 작품을 올렸고, 선배들의 패션쇼에서 사회를 본 적도 있고, 편입한 뒤 후배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얼마 전 기계공학과에 다닐 뻔 했던 대학교 근처에서 버스를 탔다. 만약 10여 년 전의 내가 이 학교에 다닌다는 선택을 내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아마 대학 시절 내내 아니면 지금까지도 적성을 찾지 못한 채 악몽의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을 거 같다. 적어도 지금의 이 모습대로 살고 있지는 않을 거 같다.

‘이성적이지 않아도, 오직 직감에 의해서, 마음이 끌리는 대로 결정하면 적어도 후회는 남지 않는구나. 아니 더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라는 걸 이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 이후 방송작가가 된 것도 학교 앞에 붙어 있던 방송아카데미 벽보를 보고 ‘해보고 싶다’라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작한 거였고, 출판편집자 역시 아파트 게시판에 붙어 있던 ‘출판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접하고 마음이 동요해 시작한 거였다. 이런 직감에 의한 결정들이 지금의 나로 이끌어주었다. 언제나 마음 한 편엔 모험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네가 내내 행복하기를, 당신과 나도      

시간이 훌쩍 흘러 친구의 결혼식 날이 생각난다. 코트가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밥을 먹고 있었는데 예쁜 드레스를 입고 친구가 그 코트를 묵묵히 주어 주웠다. 당시에도 손이 많이 가는 내 자신이, 결혼식 당일에도 의연한 친구의 듬직한 모습이 웃기고 좋았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친구는 남편분의 회사를 따라 지금은 청주에 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외로워하던 친구는 이제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청주로 한번 여행 가겠다고 말하자, 친구는 여행할 만한 게 없다고 걱정했다. 나야 너만 있으면 된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올해 바쁜 마음이 해결되면 친구 아이의 장난감을 들고 친구를 보러 가고 싶다. 그래서 너로 인해 지금의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고,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너의 나날이 매일 따스하고 향기롭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답변을 받았을 때 깨달았다. “네가 내내 행복하길 멀리서 응원하는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줘”라고 친구에게 건네준 말은 실은 내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기도 했다는 걸. 내가 행복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는 사람이 나 외에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거, 이 하나의 온기에 기대 누군가는 또 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수 있다.


너와 나를 살리는 마법의 주문. 곧 만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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