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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Jul 02. 2024

한 끗의 세계

어쩌면 0.001이 아닌 유와 무의 영역일지도

올해 세 번째 책을 마감하기까지 이제 3주라는 시간이 남았다. 마감할 때마다 느끼는 건 생각보다 책은 역동적인 매체라는 거다. 책의 꼴은 거의 마감 몇 주 전에서야 형태를 갖춘다.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담당하는 책들은 앞표지 디자인은 2주 전, 표지 전체 디자인은 1주 전쯤 완성된다. 전체 페이지가 확정되는 건 마감 며칠 전일 때도 있고 아니, 마감 전날 새로운 요소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지금 만들고 있는 책은 아직 차례 순서도 확정되지 않았다.

고요하게 정지해 있는 활자 안에는 누군가 버둥거린 순간이 담겨 있다. 지금 담당하는 책은 3주 동안 내가 얼마나 더 시간을 쏟는지, 열심을 다할지에 따라서 분명 다른 모습을 띨 테다. 누군가 읽는 한 페이지가 조금은 수월해질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빛나는 한 문장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다. 감동을 주는 디테일 하나가 새롭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내 손끝에 달려 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아닌 우리들의 일

지난주 팀 선배가 심혈을 기울인 책을 마감하기 직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선배가 얼마나 그 책을 진심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알기에, 나 또한 옆에서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일하며 응원만 보탰다. 선배가 밥을 먹으며 담담히 말했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몰입이 깨질 거 같아 다른 책을 읽을 수 없었다며, 지금 준비하는 책이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얻을지 두렵고 설레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부러웠다. 두려운 건 당연한데, 설레는 건 쉽지 않으니까. 최선을 다했기에 설렘도 있는 거니까.

그렇게 보고 또 보며 온 힘을 다해왔으면서도 혹시 하나라도 잘못된 건 없을까 마감 전날 한 번 더 꼼꼼히 살펴보려고 한다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데 경건해졌다. 우리 직업이 대단히 많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명예를 위한 것도 아니고 책 만드는 과정의 즐거움으로 모인 사람들이니까, 이 한 끗을 놓치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이야기를 선배와 나누었다. 시간을 쓴 만큼 보상을 얻어야 하는 게 당연한 시대에 멋없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든든했다.  


비록 나만 알더라도 한 끗을 만들자

나를 아끼는 분으로부터 일의 안배를 잘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힘을 쓸 땐 쓰고 뺄 땐 빼라는 이야기였다. 여전히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기에 잘 안된다. 하지만 적절히 적용해보려고 한다. 백 퍼센트 완벽한 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에선 타협도 필요하다는 걸 배우고 있다. 대신 분명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은 더 좋게 만들자고 다짐했다. 비록 나만 아는 한 끗일지라도 더 나아지는 방향이라면 외면하지 않고 실행하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지점에서 설렘을 느끼게 될 거 같다. 이후 누군가 그 한 끗을 발견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한 끗으로 영역을 넓힌다

지난번 사진 수업 시간엔 인물 사진에 대해 배웠다. 사진 기자님이셨던 선생님께선 과거 담당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위에서 간단한 사진을 찍어오라고 시키면, 선생님은 공식 사진 외에도 인물의 공개된 적 없던 모습까지 담아낸다고 하셨다. 그러면 편집 회의가 열려 사진이 좋으니 다른 지면을 줄여서라도 해당 지면의 크기를 키우자는 논의가 오가고, 자료 사진에 불과했던 사진의 영역이 훨씬 더 커지는 방향으로 늘 그렇게 일해오셨다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예시로 올림픽 사진을 보여주셨다. 늘 역도 선수의 사진은 정면에서 찍어왔는데, 누군가 측면에서 찍기를 시도했고, 이제 올림픽 사진은 다양한 앵글의 미개척 사진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한 끗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고 그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되는 한 끗의 법칙

아침에 줄넘기하다가 내 곁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비둘기를 유심히 보았다. 비둘기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 입에 물고 날아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곤 다시 내려와 또 뒤뚱거리며 신중하게 나뭇가지를 골랐다. 그렇게 반복 반복 반복했다. 녀석은 집을 짓고 있었다. 내가 줄넘기를 마치는 동안 족히 10번 이상 같은 행동을 했다. 그 작은 부리로 집고 또 집어 나뭇가지를 나른다. 힘에 부치는지 나무 중간에 앉아 숨을 고르다가 다시 꼭대기로 향한다. 나무 위에서도 한 층 한 층 집을 쌓고 있겠지. 그 한 끗들이 견고해서 부디 이번 장마에 온전했으면 하고 마음 깊이 바랐다.

한 끗 한 끗은 0.001 + 0.001 + 0.001…처럼 작은 요소가 쌓아지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0 아니면 1, 유 아니면 무의 세계일 수도 있다는 걸, 하나를 포기하면 전부를 포기하게 된다는 걸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수록 깨닫게 된다. 한 끗의 세계는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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