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 단팥 인생 이야기〉
하루아침에 기온이 10도 이상 뚝 떨어졌다.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긴팔을 꺼내 입었다. 이렇게나 가을이 예고 없이 ‘툭’ 비현실적으로 찾아올 줄 몰랐다.
서늘하게 바뀐 날씨 때문일까. 서정적인 일본 영화가 보고 싶었다. 넷플릭스에서 볼 만한 목록을 찾다가 〈앙: 단팥 인생 이야기〉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앞 장면을 보니 분명 언젠가 봤던 기억이 있는데 뒤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걸로 봐서 이 영화를 끝까지 제대로 본 적은 없는 거 같다.
(아래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에는 도라에몽이 좋아하는 그 빵, 도라야키가 등장한다. 도라야키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센타로’는 일을 도와줄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는데,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도쿠에’ 할머니가 찾아온다. 처음에 센타로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도쿠에가 만든 단팥 맛을 보고 허락한다.
단팥을 만드는 게 쉽지 않기에 센타로는 그동안 시제품 팥을 사용했는데, 도쿠에 덕분에 진짜 단팥을 만들게 된다. 센타로는 도쿠에와 함께 해가 뜨기도 전에 가게에 나와 팥을 고르고 삶으며 바쁘지만 어느 때보다 충만한 시간을 보낸다. 손님도 북적인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쿠에가 숨겨왔던 나병이 손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고 도쿠에는 자연스레 일을 그만둔다. 사장으로 모시는 센타로가 언젠가는 자신만의 도라야키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마음 깊이 응원하면서.
그 후 센타로는 단골 학생과 함께 도쿠에의 집에 찾아가고 도쿠에의 부고를 듣는다. 센타로는 친구분께 도쿠에가 남긴 녹음테이프를 건네받는다.
영화에서 도쿠에가 남긴 메시지를 듣는데, 얼어붙은 센타로의 표정처럼 나 역시 깜짝 놀랐다.
처음에 도쿠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찾아온 이유는 당연히 원하던 걸 해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장인 센타로 때문이었다.
“슬픈 눈을 하고 있었지. 그것은 예전의 내 눈이었어.
평생 담장 밖으로 못 나간다고 인정했을 때의 내 눈이었지.
그래서 난 이끌리듯 가게 앞까지 갔던 거 같아.”
뒤이어 나오는 대사는 도쿠에를 연기하는 고(故) 키키 키린 배우가 마치 우리에게 해주는 말 같았다.
“우리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영화의 장면 장면에서 도쿠에는 그 누구보다 세상을 보고 듣는 데 충실한 사람이었다. 팥을 고르고 삶을 때면, 얼굴을 가까이 대고 팥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만큼.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를 듣는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그래서일까? 지난밤에 울타리를 넘어 불어오는 바람이 사장님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속삭이는 게 느껴졌어.
사장님,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데도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 세상에 짓밟힐 때가 있어.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
“그날 보름달은 나에게 이렇게 속삭였어.
‘네가 봐주길 바랐단다. 그래서 빛나고 있었던 거야.’”
‘종종 나는 왜 태어났을까, 무엇을 하라고 조물주는 이곳으로 나를 보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알게 됐다.
봄에 꽃이 피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레 세상에 존재하는 것임을.
키키 키린 배우의 대사처럼, 단지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난” 거다. 그러니 특별한 무언가가 되려고 무거운 짐을 올려놓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의미 있는 존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센타로는 도쿠에의 도구를 사용해 자신만의 도라야키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도라야키 사세요”라고 외친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센타로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이야기를 기쁘게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