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잔
어디선가 그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것은 어둠 속의 불빛이고,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그 불빛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일이라고. 그 구절을 다시 떠올린 것은 삶이란 어쩌면 설 자리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는 과정에 붙여진 이름 아닐까 생각했을 때였다.
‘헤맨다’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쉬지 않고 움직이지만 정작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왜 그곳에 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가 빠진 어디는 불안의 냄새를 풍기고 그걸 감지할 때마다 우리는 핸들이 고장 난 자전거처럼 기우뚱거린다.
세상은 넓고 다들 어딘가에 속해 있는데 나만 혼자 텅 빈 거리를 배회하는 기분. 자꾸만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건 그래서다. 급한 대로 눈에 보이는 아무 곳이나 비집고 들어가 본대도 오히려 더 헛헛해질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여전히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새로운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생각하려면 우선 멈춰서야 한다. 안소현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진다. 그곳은 어지러운 소음이 완벽하게 걸러진 곳, 햇살이 의자 위로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고 선인장 마디마디 사이에 머무르는 곳이다. 한 번쯤 와 본 것도 같다고 착각할 만큼 일상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지만 아무데서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특별한 곳이다. 이를테면 온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앉아있거나 멍하니 저 너머를 응시하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이곳에서라면 마구 뒤섞였던 어제와 오늘을 가지런히 널어놓고 오롯이 내게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널찍한 선베드나 견고한 의자가 이렇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자, 이리 와서 편안하게 앉아. 네가 여기에 있는 동안 너의 자리가 되어줄게.
물론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 있는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안소현의 세계 역시 영원한 종착지는 될 수 없지만, 힐링이라는 단어가 하나의 키워드였을 만큼 한 박자 쉬어갈 곳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우리에게 쉼표를 선물한다. 그녀의 작품이 유난히 포근하고 든든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문득 그런 느낌을 받는다. 이곳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는 듯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거라고,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지든 상관없이 묵묵히 우리를 기다려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세상이지만 이 느낌은 왠지 믿어도 좋을 것만 같다. 자주 지치고 길을 잃는 우리들에게 그런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되니까. 그리고 이를 통해 깨닫는다. 다시 돌아올 곳이 있기에 잠시 동안 떠나있는 것이 그리 슬프지만은 않다는 것을. 쉼표가 가지는 미학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그렇게 오늘도 안소현의 그림에서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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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그림 한 잔>, 첫 번째 잔은 한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안소현 작가와 함께 마셔볼까 합니다.
이 글은 네이버 디자인프레스 블로그에 기고한 글이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