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령이 정당했다는 너에게,
눈이 소복이 내린다. 마치 이 땅 위에 지난 한 달여간 벌어진 비극과 슬픔을 모두 가라앉히려는 듯이. 새해가 되어서도 시계는 어쩐지 2024년 12월 3일에 멈춰있는 것만 같은 기분인데,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시간을 멈춰 서게 한 너는 오늘의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의 추악함과 저열함을 하루 더 가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1980년 계엄 사태에 맞서 싸워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은 광주의 떠나고 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적어낸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탄 21세기의 어느 해에 뜬금없이 비상계엄사태가 선포되었다는 사실은 참 공교롭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나는 이 책 속의 등장인물들과 영혼이 그저 어느 허구 세계의 인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엄마 아빠의 이야기, 할머니의 이야기, 삼촌의 이야기, 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지냈을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활자 속에서 군화와 총, 칼, 손으로 짓이겨진 이들과 그 주변의 영혼은 여전히 곪은 상처를 안은 채 1980년 광주에 고립되어 있다. 어떤 이들에겐 오늘 내리는 눈송이마저 여전히 이어지는 장례식이다. 그 상처 위로 겨우 꽃 피워낸 오늘의 자유와 평화를 잔인하게 짓밟은 네가 무엇을 무너뜨렸는지 깨닫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이런 오늘의 너도 어린 새가 가슴에서 파닥거리는 소년일 때가 있었겠지. 그 생각을 하면 기이한 기분이 든다. 인간은 특별하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서 상상하지도 못한 고결한 의로움과 잔인한 폭력성을 우연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구절이 오스카 와일드가 그려낸 도리안 그레이를 떠올리게 했다. 소년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운 미모를 영원히 얻는 대가로 추악하게 일그러져가는 본인의 초상화를 다락방에 꽁꽁 숨겨놓은 도리안과는 달리 너의 내면의 추악함은 스스로 선포한 비상계엄령으로 네 얼굴 면면에 드러났을진대, 언제까지 네 초상을 들키지 않았다 자위하며 많은 이들의 시간을 흘러가지 못하게 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부디 네가 네 초상을 들여다보게 되기를, 한 때는 네 가슴에서 파닥거렸으나 이제는 형체 없이 떠나버린 어린 새를 한 번쯤은 떠올리기를. 눈 내리는 사원에 서 내가 바라는 마음은 겨우 이것뿐이다.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