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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Nov 01. 2016

우리들의 다섯 번째 계절

2016년 봄, 체코 체스케 부데요비체České Budějovice

- 이 계절은 과연 몇 번째 계절일까요.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를 지나 체코를 여행하던 우리는 다섯 번째 계절을 살고 있었다. 나는 지금이 다섯 번째 계절임을 체스케 부데요비체에 머물다 들렀던 검은 탑 전망대에서 만난 비둘기를 통해 깨달았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프라하로 가는 길에 위치한 보헤미안 도시 체스케 부데요비체는 13세기부터 맥주를 만든 도시로 유명한 데다가, 원조라 주장하는 동명의 미국 맥주회사Budweiser와 법정다툼 중인 부드바르Budvar 양조장이 있었다. 놓칠 수 없는 볼거리라 서둘러 걸어갔는데 하루 단 한 번 있을 뿐인 공장 견학 타임에 아슬아슬하게 늦었다. 해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견학 모임에 합류할 테니 입장시켜 달라고 데스크 직원에게 사정했지만 안 된다는 답만 돌아왔다. 그냥 나오기 아쉬워 할 수 없이 대신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간 본사 건물 내의 버드와이저 박물관은 양조 과정이나 역사를 알기에는 정보가 형편없이 부족하고 조잡해 더 우울해졌다. 버드와이저 외의 다른 맥주가 진하게 마시고 싶던 시간낭비.

공장견학 시간을 놓쳐 아쉬웠던 버드와이저 본사. 건물 내에 볼품 없는 버드와이저 박물관이 있고, 건물 왼쪽으로 맥주 공장이 있다.

 아깝게 맥주 공장 견학을 놓친 것과 볼 것 없는 맥주 박물관에 돈과 시간을 낭비한 것에 기분이 상해 구시렁거리며 돌아와 구시가 광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필수 관광포인트 검은 탑에 올랐다. 구도시 한가운데 광장과 높은 성당이 위치하는 유럽 도시들의 특성 덕에 구시가를 조망하기 좋은 성당 탑은 층계가 가파르거나 낡아 오르기 힘들어도 항상 들르는 스팟이다.

 탑 위 전망대에는 불만 가득한 관광객의 감정쯤은 아랑곳없이 찬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옷을 여미고 전경을 둘러보며 사진을 몇 장 찍는데 난간에 앉아 바람에 휘청이던 비둘기가 말을 건다.

- 날이 나쁘지 않은데 춥나 봐. 잔뜩 껴 입으셨네.

- 네, 제가 살던 나라보다 추워서요. 이 위는 저 아래보다 바람이 더 차네요. 체코에서는 봄이 늦게 오나 봐요.

- 이제 곧 5월이라고. 봄이라는 게 있다면 벌써 왔겠지.

체스케 부데요비체의 구시가를 조망할 수 있는 검은 탑. 탑 앞에 달팽이처럼 붙은 둥글고 지붕이 뾰족한 귀여운 보조탑에 입구가 있다. 오른쪽 건물은 성 니콜라스 성당.

 전망대는 전체가 주먹이 통과할 정도로 성긴 철조망으로 둘러져 비둘기와는 철조망 너머로 대화해야 했다. 비둘기가 앉은 철조망 밖 난간 주위로 새똥이 두어 개 굳어 있었다. 청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비둘기가 앉아 쉬기에는 좋지 않은 곳인지도 몰랐다.

- 부다페스트에서도 찬 바람이 어찌나 강하게 불던지 다니는 내내 추워서 혼났어요. 여기는 내륙이라서인지 봄에도 춥나 봐요.

- 글쎄, 느끼는 그대로야. 당신은 이 계절을 봄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

- 어떤 날이 봄인지는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달月로 나누기도 애매하고, 날씨로 나누기는 더 애매하거든요. 나라나 기상청 같은 곳에서 확실히 '내일부터 봄입니다'라고 정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 그러게 말이야. 계절을 봄여름가을겨울로 단정하는 건 위험해. 알다시피 계절은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규격화된 상품이 아니잖아. 사계절만으로 한 해를 나누는 건 마치 하나의 사관만을 가르치려는 국정교과서와 같지. 남북극이나 사막 같은 극한지역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네. 같은 곳에 살아도 어떤 이들에게 계절은 넷이 아니야. 셋일 수도 있고, 여섯, 여덟일 수도 있지. 어떤 계절은 너무나 모호해서 날씨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니까. 계절의 경계는 또 얼마나 모호한가 말이야. 그걸 설명하려 초여름이니 늦가을이니 하는 소분류를 만들어 냈지만, 예민한 사람들은 그게 어색하다는 걸 피부로, 냄새로 알고 있다고.

- 맞아요. 그럼 이 계절은 과연 몇 번째 무슨 계절일까요.

- 그건 자네가 느끼기에 달렸지. 응, 전적으로 자신의 오감에 의지해야 한다고. 자, 답해보게. 이 계절이 자네에게 몇 번째 계절인지.

 땅거미가 질 무렵 잠깐 부슬비가 내렸다. 밤을 구경하러 옷을 겹겹이 입고 숙소를 나섰지만 무색하게도 바람은 불지 않았다. 차라리 '바람이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았다. 바람이 퇴근한 도시에는 행인도, 소음도 없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배우와 스텝들이 촬영을 마치고 사라진 텅 빈 영화 세트 같았다.

 광장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광장 한가운데 있는 삼손의 샘Samson's Fountain에서 나오는 물소리만 정규방송이 끝난 후 흐르는 TV 화이트 노이즈처럼 지속적으로 공간을 울렸다. 광장과 주변으로 이어지는 길거리는 기이할 정도로 휑했고, 골목에는 지나는 자동차는커녕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오래된 건물의 식당이나 술집 안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얌전한 비에 젖은 거리는 조용하게 가로등 불빛을 반사해 누렇게 빛나는데, 창으로 새어 나오는 흰 빛 안에는 가득한 사람 형상들이 희뿌연 이미지로 능글맞게 출렁거렸다. 내게는 창문 너머가 움직이는 TV였고, 불이 이글이글 살아있는 벽난로였다. 이방인인 나는 저 안에 섞이지 못한 채 정규방송이 끝나 지지직 거리는 누런 도시를 정처 없이 방황했다. 6시 이후로는 지나는 사람을 보기 힘들어 어색했던 호주의 캔버라를 여행하던 때가 떠올랐다. 24시간 쉬지 않는 한국 도시들의 피곤함이나 불편함과 대척점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피곤함을 숨기기 위해 잔뜩 화장을 한 화려한 네온사인도 여기에는 없었다.

 인상파 화가 고흐의 그림 속 같던 그 밤의 체스케 부데요비체 구시가를 걸으며 나는 확신했다. 나는 지금 다섯 번째 계절을 살고 있구나. 여러모로 맥주가 당기는 날이다.

 밤마실을 마치고 마실 물을 사서 들어오는 길에 멀리 우뚝 솟은 검은 탑을 지그시 쳐다봤지만 '내가 모르는 계절을 살던' 비둘기는 보이지 않았다.

 알려주세요. 당신은 지금 몇 번째 계절을 살고 있습니까?

검은 탑에서 바라본 체스케 부데요비체의 랜드마크인 광장. 광장 주위로 시청 등의 오래된 건물이 빼곡하게 붙어 있으며, 광장 한가운데 삼손의 샘이 보인다.


티어라이너tearliner 발매일 2016.10.28.

링크 : 티어라이너 / 우리들의 다섯 번째 계절 @Ceske Budejovice (single / digital)  

이 글은 2016년 10월 28일 발매된 tearliner의 싱글 '우리들의 다섯 번째 계절 (feat.소이)'과 하나의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글을 읽으며 OST나 BGM으로 곡을 들으시거나, 혹은 반대로 음악을 감상하시며 곡을 이해하는 설명글로 읽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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