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특기는 인내
찬누리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5세 무렵 교회에 가면 양반다리를 한 엄마 다리 위에 앉아 절대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교회 선생님들이 찬양과 율동을 하면 어린아이들이 흥에 겨워서 앞에 나가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하는데 찬누리는 자석처럼 붙어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무대 체질은 아닐 수 있으니 엄마 앞에서만이라도 일어서서 노래하고 율동도 해 보자고 몸을 일으키면 극구 몸에 힘을 주곤 거부하던 아이였다.
새로운 어린이 집에 적응할 때도, 교실 한가운데 가만히 앉아 친구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서 짠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찬누리가 '내성적인가 보다. 낯선 곳에 적응하기 힘든가 보다.' 싶은 모습들이 많았다.
그랬던 찬누리가, 여섯 살 일곱 살이 되니 안 가겠다던 어린이집도 일등으로 가겠다고 하고, 엄마가 일찍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태권도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기저귀를 뗄 때도 그랬다. 언젠가는 기저귀를 그만 차야 한다는 것을 얘기해 주었고, 34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기저귀를 뗐으며 그 뒤로 실수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찬누리를 키우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아이의 때를 진득하게 기다려야 된다는 사실이었다.
일곱 살 12월에도 찬누리는 한글을 깨치지 못했다. 듣고 말하기는 능숙했지만 한글 문자를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 더뎠다. 자음을 다 공부하고 나서 'ㅅ'을 써 놓고 어떤 글자인지 물었다. 찬누리는 내게 몇 번째 글자냐고 물었다. "몇 번째 글자냐고?" 의아했지만 아이의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일곱 번째 글자야" 찬누리는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입으로 기역니은 디귿 리을... 이라면서 그리곤 '시옷'이라고 답했다. 앗! 아이가 문자를 인식하는 방식이 남달라서 내심 놀랐다. 그리고 고민이 되었다. '어찌해야 하나?'
글고운은 어려서부터 책을 열심히 읽어 주었고, 그대로 한글을 깨쳐서 글자를 술술 잘 읽었다. 글고운보다는 책을 많이 못 읽어 주었지만 찬누리에게도 날마다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초등학생들이 좋아하는 깜냥 시리즈도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 달라고 했다. 글밥이 긴 책도 집중해서 듣는 찬누리였다. 그런데 일곱 살까지 한글을 못 깨친 데다가 자음도 하나 기억을 못 하니 난감했다. 일단 아이가 문자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글고운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했다. 한글의 창제 원리 그대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리 문자로 하나씩 가르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날짜는 다가오고 나는 퇴근 후에 아이랑 한글 공부를 하려니 마음이 조급했다. 문제집을 하나 사서 매일 조금씩 가르쳤다. 요즘은 초등학교에서 한글 책임 교육을 한다. 한글을 모르고 가도 충분히 배울 수는 있지만 이미 한글을 능숙하게 읽고 쓰는 친구들 틈에서 찬누리가 마음고생을 하면 어쩌나 싶어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 3월이 되기 전에 자음과 모음을 알고 소리 내는 원리도 어느 정도 깨우쳤다.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배워서 '먹었어'를 '먹, 었, 어'라고 읽는 수준으로 입학을 했다.
학교에서 한글을 못써서 힘들어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아직까지는 별일이 없이 잘 다니고 있다. 하굣길에 이런 말을 하기는 했다. "엄마, 엄마가 나한테 한글을 너무 재미없게 가르쳐줬어." "하하하하~ 그래? 엄마랑 한글 공부하는 게 재미없었구나? 와~ 역시 선생님께서 엄청 재미나게 가르쳐 주시나 보다~" "응~ 엄마가 재미없게 해 줘서 내가 잘 못했던 거야." 그랬다. 엄마가 잘못한 거다.
재미는 없었겠지만 아이를 닦달하지 않았고 1학년을 잘 다니면 한글에 익숙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만 하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찬누리는 찬누리만의 속도로 배워가고 있으니까...
담임 선생님께서 '그림책 소리 내어 읽기'를 과제로 내주셨다. 찬누리에게 읽고 싶은 책을 가져오라고 했고, 소리 내어 읽어 보자고 했다. 엄마가 읽었으면 5분도 안 걸렸을 책을, 15분에 걸쳐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냈다. 숨이 넘어 갈듯 했지만 책 한 권을 다 읽어낸 아이에게 푹푹 칭찬을 해 주었다. '먹, 었, 어~'라고 읽던 것도 이제는 '머거써'라고 읽어냈다.
입학하고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림책 한 권을 다 읽어낸 찬누리가 너무 기특했다. 자기만의 속도로 성장해 가는 찬누리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기다려 주고 응원해 주리라 다시금 마음먹는다. 3월 한 달 동안 친구들과 신나게 놀고 학교에도 잘 적응해 주니 정말 고맙다. 아이들 저마다의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찬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