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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y 03. 2023

돌봄이 곧 희생이 되지 않기 위하여

<돌봄과 인권>을 읽고

아이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고 독박육아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나는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말아야지 쉽게 생각했다. 뉴스나 매체에서 치매로 온 가족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쉽게 했다. 마치 나에게 다가올 일이 아닌 것처럼.


장애의 88퍼센트가 후천적으로 발생한다. 2020년 현재 한국 노년의 인지장애증 유병률도 10.3퍼센트에 이른다. 이런 현실이라면 ‘나는 저런 의존 상태에 놓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보다는 ‘내가 저런 의존 상태에 놓인다면 어떤 돌봄을 원할까, 어떤 돌봄이 가능할까’ 상상해 보는 쪽이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을까? 「돌봄과 인권」 p110


돌봄의 주체가 되거나 객체가 되는 일은 미리 예상하고 방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성장기에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해왔고 앞으로도 누군가의 손으로 돌봄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당장 치매나 장애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일어날 수 있는 나의 의존 상태에 대해 상상해보는 것은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일이다.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내 주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누군가 오랜 기간 동안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상상하지 않으면 누구도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오직 가족만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기엔 돌봄은 매우 광범위하고 고통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누군가의 삶을 갉아먹으며 숭고하다는 칭송과 함께 기념비만 세우는 매체는 돌봄의존자를 사회 변방에 있는 존재로 가둔다. 


‘권리화’는 자연적으로, 저절로 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선언에 머문 채로 구체적인 권리의 주체와 책임의 주체를 말하지 않을 때, 인간의 존엄은 공허한 수사에 머문다. 독립성과 자율성을 명목으로 권리의 주체에서 특정인이 배제되는가 하면 책임의 주체는 모호한 공백으로 남겨진다. 「돌봄과 인권」p46


내가 돌봄의존자가 된다고 해서 모든 자유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마땅히 요구해야 하는 존엄에 대해서 상상해 보고 목소리를 내고 합의를 거쳐야 한다. 그러한 상상 없이 돌봄의존자가 된다면 자신을 밖에서 안으로 가둘 수밖에 없어진다. 마을에서 집으로 집에서 방으로 방에서 침대로 내가 요구할 수 있는 이동의 테두리는 점점 좁아진다. 자신이 ‘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주고받는 돌봄에 ‘고맙다’고 하면 될 것을 ‘폐 끼칠 바에야 차라리…’를 반복하는 것은 문제다. 돌봄을 자꾸 궁상스러운 음지로 내몰기 때문이다. 당당함과 뻔뻔함은 다르다. 정당함과 고마움은 서로 배치되지 않는다. 돌봄 받는 사람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도 떳떳할 수 있다. 돌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고된 돌봄이라도 도울 수 있다는 사실 자체와 도움으로 가능해진 변화가 주는 기쁨은 상쇄되지 않는다. 「돌봄과 인권」p104


돌봄에 대한 인식과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재정의와 구체적인 제도가 필요하다. 책에서도 다소 모호하고 이상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누구나 돌봄에 참여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상호 돌봄에 대한 믿음이다. 오직 가족에게만 돌봄을 의무하지 않고 국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제도 또한 필수적이다. 편의에 따라 시설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존자가 원한다면 집에서 머무르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원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고 많은 예산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 규모 대비 장애인 예산의 비중이 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소외계층에 대해 무관심한지 전적으로 드러낸다.


돌봄을 둘러싼 요구에 냉소적인 사람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은 이런 말들을 대놓고 한다. ‘애들 밥 챙기는 것도 국가가 해줘야 하느냐’는 아동 돌봄 관련 흠집 내기, ‘시설로 보내면 될 걸 왜 사회화가 힘든 사람을 끼고 사느냐’는 장애인 추방 선동, ‘노인 수발하느라 청년들 허리가 휜다’는 식의 세대 전쟁 부추기기 등이 이어진다. 이런 언사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바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자원을 돌봄 같은 데 소진하지 말고 경제 발전을 위해,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특정 세력을 위해 쓰라는 것이다. 「돌봄과 인권」p264


사람이 사람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다수의 돌봄이 필요하다. 노동하지 못하는 몸이라도 함부로 정신까지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 누구도 영원히 건강하고 젊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뿌리내리는 돌봄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고 나아갈 수 있는 돌봄을 위해 상상하고 들여다봐야 한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고 누구든 돌아올 수 있는 느슨한 돌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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