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복경>
황정은의 <복경>은 읽기 괴로운 소설이다. 주인공 ‘나’에게 들이닥치는 불행은 ‘나’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그렇고, 그래서 찾아 온 가난이 그렇고, 가난해서 얻게 된 납작한 머리통이 그렇다. 가난은 가난을 몰고 온다. 가난하면 아프고, 아픈 사람은 돈이 없고, 돈이 없는 사람은 보험에 들 수 없으니 아픔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살려내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진통조차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마음은 뭐가 되겠습니까. 짐승 아니겠습니까. 짐승이 되어버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 그 짐승이 되지 않으려고 돈을 법니다.
‘나’는 백화점 침구류 매장에서 일하는 판매원이다. 서비스업이라는 직종이 그러하듯, 고객에게 시달리고 같은 층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며, 웃을 일이 없지만 항상 을의 입장에서 웃음을 강요받는다.
고객은 스쳐가지만 나와 이들은 한 개의 주머니에 담긴 채 뒤섞이는 존재들입니다. 특히나 판매원들끼리는 말입니다. (중략)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로의 성과를 목격하고 탐내고 그런데 그 서로 간에는 조금의 벽도 없어서, 이 굶주림과 질시와 멸시가 경계도 없이 왔다갔다…
‘나’는 ‘고객과의 관계는 괜찮다’고 말한다. ‘인격적인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괜찮’은 게 아니라 ‘인격’에 대한 포기이다. 바뀔 수 없는 절대적인 갑과 을의 세계에서 ‘인격’을 소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랫배의 ‘스위치’를 누르고 한없이 공손해진다. <복경>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지만, 혹은 겪고 있지만 꾸역꾸역 참아가는 더러운 서비스업의 민낯의 아주 일부분을 적나라하고 직설적으로 서술해 나간다.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웃음 뒤에 가려진 뒤틀린 감정들을 계속 내보인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주인공인 ‘나’가 아니라 ‘나’의 선임인 매니저이다.
게다가 자기야, 나는 무시당하는 쪽도 나쁘다고 생각해. 자존감을 가지고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지.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이나 진정으로 당하는 거야 무시를.
존귀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그 의미를 아래처럼 자조한다.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 내가 존귀합니까. 나는 그냥 있었는데요 언제나 여기저기에 있었는데요. 이렇게 그냥 있어도 존귀할 수 있습니까.
신자유주의 하에서 ‘존귀’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스스로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고객의 요구에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무릎을 꿇고 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웃어야 하는 위치에서 존귀란 생겨나기 어렵다.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dignity)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을 수단이 갖춰지지 않는 한 존귀하기란 쉽지 않다. 물건이 아니라 서비스를 팔고, 실은 서비스가 아니라 인격을 팔며, 나에게 남아 있는 한 줌의 자존감으로 어떻게 존귀해 질 수 있을까.
그 가죽소파가 진짜 송아지나 돼지였다면…… 피를 흘렸겠죠.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는 피를 흘리게 할 수 없다. ‘나’는 ‘저기 딱 한 번 앉았을 뿐, 잠시 머물렀을 뿐이고, 한 손으로 소파를 쓰다듬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파는 난도질이 되었고 ‘나’는 그 사건에 대해 추궁 받는다. ‘나’가 말로 받았던 수많은 ‘난도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자존감에 대한 책이 서점에 즐비하다는 것은 모두가 자존감이 낮은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존감에 대한 얘기를 나누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감을 낮다고 말한다. 밝고 잘 웃고 쾌활해 보이는 사람들조차 자존감이 높다고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낮은 평균치의 자존감으로 만들어진 사회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그 수단은 이제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 찾아나서야 할 때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