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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May 23. 2023

흑형이라는 말은 왜 쓰면 안 될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과학에서 ‘다정’이라는 말은 얼마나 생경한 단어인가. 손으로 만질 수도, 관찰할 수도 없는 그 따뜻한 단어에 먼저 손길이 간다. 예전에 김상욱 작가님의 <떨림과 울림> 서문에 감동받아 구매부터 한 적이 있는데 ‘양자역학’ 대목까지 와서는 약간은 사기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매우 인문학적이고 좋은 책이었으나 나에게 남아 있는 건 다정한 서문뿐이었다. 될 수 있으면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려고 시도하지만 아직도 ‘과학’은 쉽게 써도 어렵고 형식을 파괴한 시만큼이나 모호한 개념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니.


대학에 입학하고 읽었던 과학 교양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도킨스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돕는 이타적 행동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라고 본다. 이타적인 행동은 오직 이기적인 유전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친화력이 가축화된 종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며 협력할 줄 아는 종이 최종적으로 살아남고 진화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논쟁처럼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은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적자생존’의 사회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가장 생산적인 하드자족 수렵채집인은 현장에서 일용할 열량을 채운 뒤 남은 양식을 들고 천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은 식량을 나누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남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음식은 식량이 부족할 때의 완충장치가 되어 유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눔은 모두에게 더 많은 식량이 돌아간다는 뜻이었으므로 협력의 동기가 되었다. 유대감 돈독한 이들 부족은, 수백 세대에 걸쳐서 협동심이 약하거나 믿고 의지할 사회보험이 미미한 폭압적 집단을 앞설 경쟁 우위를 키워왔다. (p157)


다정한 호모 사피엔스는 남은 양식을 혼자서 먹지 않고 다른 친구와 함께 나눴다. 누가 자기  것을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경계하고 지킨다면 마음 놓고 수렵 활동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서로가 함께 음식을 나누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믿음은 그들을 결속하게 만든다. 공격성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아닌 이상 평등한 집단생활에서 불리하다. 공격성과 연관해 위험을 무릅쓸 때 기대할 수 있는 보상은 더 우수하거나 더 많은 후손을 얻는 것뿐이다(92p). 이기적인 유전자는 여기서 실패한다. 와해된 공동체에서 홀로 살아 남을 방법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에 헌신하는 이 다정한 사람들이 타 집단과 충돌하게 되면 무자비하게 돌변한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p32)


이제는 낡은 말이 되어 버린 ‘지구촌’이란 단어는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같이 서로 소통하는 사회를 말한다. 1945년 공상 과학 소설에서 제시한 그 단어는 탄생한 지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소통은커녕 아직도 각국의 정상회담에선 국가 간 불신하는 대화가 오가고 있다. 그 이유는 내집단 사이의 친화력 상승이 외집단을 철저히 배제하는 부작용을 낳았기 때문이다.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외집단을 적대적으로 대하며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자신들이 누리던 자원이나 특권 혹은 어떤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집단이 나왔다면,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정치적 이념 대결이나 혹은 한 사회 내 다른 집단의 상대적 지위가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레일리가 이 연구에서 얻은 결론은,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Reciprocal Dehumanizaion)라고 한다. (p193)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내집단과 외집단 서로가 자신의 공동체를 인간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보복성 비인간화’로 인해 편견을 더욱더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외집단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식의 자기 최면은 외집단을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이나 괴물로 묘사하게 된다. 특히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비인간화, 즉 유인원화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유인원으로 부르거나 유인원에 비유하다 보면 사람들의 심리에 도덕적 배제가 발생하며, 이렇게 유인원화된 표적이 된 개인이나 집단은 기본 인권을 지켜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p218)이다.


오늘날 유인원 비유의 사례를 찾아보기란 결코 어렵지 않다. 미국의 유명하고 힘 있는 대부분의 흑인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흑인 운동선수들에 대해 “호전적”이라느니, “육중한” “괴물”이라느니, “거대하다”느니 “폭발적”이라느니 하면서 유인원 같이 묘사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반면에 백인 운동선수들에게는 “지적인” “헌신적인” “야무진” 같은 어휘가 쓰인다. (p219)


다른 인종과 남다른 피지컬을 찬양하는 의미를 함축했던 ‘흑형’이라는 단어도 사실은 한 인종을 유인원같이 묘사하는 표현이 될 수 있다. 흑인 운동선수와 백인 운동선수를 묘사하는 미묘한 어휘의 차이는 단순히 실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칭찬이라고 하더라도 인종 전체가 획일적인 특성이 있는 것처럼 편견을 줄 있는 표현은 조심해야 한다. 책에서는 이러한 유인원화가 현재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인종 간 격차를 더 잘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 쉽게 자신이 속한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월하다고 믿으며 상대를 폄하하고 배제하는 데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이데올로기,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은 우리 모두가 같은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효과적이고 보편적인 방법이다. (p264)


타인을 비인간화해 내집단을 결속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더 많은 표를 받기 위해 정치인들은 쉽게 편 가르기를 한다. 소통을 막고 이해를 거부하며 같이 힘을 합쳐 해결해야 하는 사안에도 서로 비난하기 바쁘다. 그럴수록 스피커로 대표된 말이 아니라 그 안을 살펴야 한다. 잦은 교류와 소통을 통해 서로가 같은 유대감을 형성해야 한다. 결론이 너무나도 이상적인가. 이 책은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다정한 것이 외집단을 향한 편견을 만들었지만 또 그것은 다시 ‘다정’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머나먼 미래에도 우리가 다정한 조상으로 남기 위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p300)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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