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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 Oct 18. 2023

가짜뉴스와 잃어버린 명예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이 소설을 설명하는 두 가지 헤드라인이 있다고 하자.


1. 젊은 가정부의 위험한 사랑과 돌이킬 수 없는 살인

2. 황색 언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한 개인의 명예에 관한 보고서


같은 소설을 설명하고 있지만 1과 2는 각기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1은 소설 속 <차이퉁>의 화법을 빌려 새로 만든 헤드라인이고 2는 책 뒤표지에 쓰여 있는 카피를 가져온 것이다. 무엇이 더 흥미로운가? 낚시라는 걸 알면서도 1의 내용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진다. 소설이라면 이런 식의 낚시도 판매전략이라고 넘어갈 수는 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사라면 어떠한가.


1975년에 발표된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선정적인 허위 보도를 일삼아 개인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언론의 행태를 비판한 작품이다. 이미 50여 년 전부터 이 이야기는 계속되어 왔지만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소수가 독점하던 미디어 매체는 이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언론은 정확하게 듣고 정직하게 옮겨야 한다. 하지만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도 그 말을 옮기는 (<차이퉁>으로 대표되는) 언론도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해 내지 못한다. 주인공 카타리나는 ‘놀랄 정도로 꼼꼼하게 모든 표현을 일일이 검토(30p)’하며 정확하게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카타리나의 발화는 조서에서부터 자꾸만 가로막힌다.


카타리나는 남자들이 자신에게 치근거렸다고 말 하지만 조서에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했다고 기록된다. 이는 매우 다른 말이다. 그녀에게 다정하게 대했다는 해석은 치근거리는 남자의 시선이다. 카타리나는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31p)’라고 다시 한번 둘의 차이를 설명한다. 블로르나 부부를 가리킨 ‘선량한’이라는 단어를 놓고도 ‘친절’이라는 단어와 구분하고자 한다.


카타리나가 고집하는 개념 정의는 자신에게 체화된 의미이다. 하지만 결말을 정해 놓고 짜맞추기 하려는 수사 기관이나 대중이 원하는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바라는 <차이퉁>에게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카타리나가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더 집중한다. 카타리나는 ‘신사들의 방문’에 관한 악의적인 유도신문에는 진술하기를 거부하는데 자신이 어떻게 설명하든 수사과장이 기관에 유리한 방향으로 결론 내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사들의 방문을 받는 정숙하지 못한 여성이라는 프레임은 카타리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평생 남성들의 성적인 치근거림에 시달려 온 카타리나는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카타리나는 밤낮과 휴일을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며 검소하게 생활해 비로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자신의 아파트를 장만하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부끄러움 없이 경제적인 자립에 성공했지만 <차이퉁>은 그런 사실관계는 생략한 채 그녀가 ‘은행에서 강탈한 돈의 분배에 관여(38p)’했기 때문에 비싼 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는 의문을 제기한다.


살인범의 정부라는 폄하는 카타리나가 이때까지 일궈온 모든 결실을 무너뜨리게 한다. 대중에게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각인된 ‘여성’이 미디어에서 어떻게 다뤄지는 지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카타리나의 이혼과 가족들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는 수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에도 의뭉스러운 기사에 덧대어진다. 카타리나는 심문에 거론된 세세한 사항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고 또한 왜곡된 것인지 항의한다. 이에 하흐 검사는 카타리나가 괴텐과의 친분 관계 때문에 ‘시대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언론은 이로써 당연히 관심을 가질 권리가 생겼다(63p)고 말한다.


시대사적인 인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말은 오늘날에도 ‘공인’이라는 이름으로 과도한 사생활 침해를 정당화하는 단어이다. 관심을 가질 권리라는 애매한 표현은 카타리나를 더욱 위축되게 만든다. 카타리나는 범죄의 실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그녀는 이제 그녀의 사생활과 관련한 모든 것을 해명해야만 하는 위치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사건의 당사자인 괴텐에 대한 보도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기자들은 돈이 되는 기사를 싣는다. 카타리나는 시대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가설에 따라 움직이는 사냥감일 뿐이었다. 카타리나가 해명해야만 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이 아니라 대중의 호기심이었다. <차이퉁>은 언론이 아니라 그 욕망을 실현시키려는 대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카타리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살기 위해 애써왔지만 이제 시대사라는 이름 속에서 수동적인 인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가 성실하게 살아온 지난한 삶은 언론의 손에서 저속하게 날조되었다. 카타리나의 목소리는 소거된 채 ‘살인범의 정부’라는 객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차이퉁>에서 쏟아내는 카타리나에 관한 음해는 카타리나를 돕는 주변인들에게까지 옮아간다. 대중들의 호기심은 이제 명백한 적의로 돌아서고 카타리나는 이제 평범했던 삶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차이퉁> 소속 기자 퇴르게스의 만행과 보도는 역겹지만 놀랍지 않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많은 채널이 <차이퉁>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도 없이 ‘카더라’ 식의 루머를 양산해 내는 사이버 렉카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만에 육박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는 영상을 퍼다 나른다. 이들이 이토록 당당한 이유는 법적인 처벌이 사후처방에 불과한 데다 ‘언론의 자유’라는 방패 뒤로 숨고 있기 때문이다. ‘모욕적이고 어쩌면 중상일 수 있는 언론 보도의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 그녀가 개인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63p)’다는 하흐 검사의 첨언은 국가가 카타리나를 보호해 줄 의무가 없음을 시사한다.


카타리나는 결국 기자를 살해하고 잃어버린 명예를 스스로 되찾고자 한다. 카타리나는 비로소 사건의 주체가 된다. 기자를 죽이고 나서야 ‘살인범의 정부’가 아닌 ‘살인범’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결코 통쾌하지 않다. <차이퉁>은 자사 기자들에게 일어난 살인 사건에 ‘광적인 흥분’을 하며 대서특필한다. <차이퉁>뿐만 아니라 다른 신문사들까지도 저널리스트의 피살 사건을 특별하게(또는 흥미롭게) 다룬다. 카타리나가 겨눈 총구는 겨우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총구는 어디를 겨눠야 마땅했을까. 우리나라 신문윤리강령 제4조(보도와 평론)는 사실을 전달할 때 사실의 전모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할 것을 다짐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다짐’과 같은 말로는 객관성과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차이퉁>과 같이 대표되는 매체가 있을 경우 오히려 잘못을 따지기 쉽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무분별한 보도로 인해 이제 잘못된 보도의 시작점조차 찾기 어려워 진다. 오늘날 총구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비극적인 이유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부제는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폭력은 무엇인가? 폭력의 사전적 정의는 물리적 강제력이 동반된 공격 행위를 말한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폭력이라는 단어를 확장해서 정의해야만 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을 무너뜨리는 폭력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저자 신형철은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라고 말한다. 폭력을 물리적으로만 본다면 그 반경과 깊이는 너무나도 좁고 얕다. 한 사람의 인격을 무너뜨리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은 섬세하지 못한 단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단면만 보고 비난하기는 너무나 쉽다. 부도덕한 개인을 비난하고 신상을 폭로하고 응징하는 이야기에 눈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 안에 어떤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추측과 심증만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한다. 카타리나를 괴롭힌 건 <차이퉁>의 음해와 날조였지만 그녀를 무너뜨린 건 익명의 편지와 전화, 조롱하고 경계하는 주위의 시선이었다.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그 도덕성을 판단하고자 하는 그릇된 욕망이 나 자신에게도 분명히 존재한다. 나쁜 수요는 필연적으로 나쁜 공급을 견인한다.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한 인물로서 분노하고 절망하지만 책을 덮을 때 현실의 나는 안전하게 그 위협으로부터 빠져나온다. 하지만 정말 ‘나’는 이 세계에서 안전한가. 어떤 소설은 현실 세계가 더 서늘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카타리나가 될 수 있다. 이 자명한 사실만이 공급을 막는 낮은 방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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