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Anatomy of a Fal), 2024
영화 <추락의 해부>는 제목과 포스터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추락’한 것을 ‘해부’하는 행위만으로는 추락 이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이미 추락한 무언가는 망가져 버렸고 우리는 그 이전의 형태를 짐작할 뿐이다. 영화는 물리적인 추락뿐만 아니라 개인의 존엄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추락도 함께 보여준다.
영화는 유명한 작가 산드라의 남편 사무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시에 사무엘은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집에서 무언가 작업중이었으며 산드라는 잠을 자고 있었고 시각 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은 강아지 스눕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었다. 그사이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단순한 사고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산드라가 용의자로 기소되며 혼란스럽게 흘러간다.
<추락의 해부> 중반부에 사무엘의 녹음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로에 대한 증오의 최정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부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산드라는 프랑스인 남편을 위해 기꺼이 그르노블로 이사와 불편한 생활을 감수했고 사무엘은 바쁜 산드라를 대신해 다니엘을 케어하고 그녀를 위해 영어를 사용한다. 이 모든 행위는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희생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그들만의 합의가 있었을 테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녹음본에서는 그 일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된다.
산드라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모든 일들을 해명해야 했다. 남편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이 모국어가 아닌 낯선 언어로 부부의 관계를 법정에서 증명해야 하는 일은 그 자체로 형벌 같다. 거기다가 아들 다니엘에게까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말해야 한다. 사실을 말할수록 진실과 멀어지고 산드라는 유일한 목격자인 아들과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다니엘은 재판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다. 판사는 진술의 신뢰성을 위해 다니엘에게 더 이상 재판의 참관을 하지 않도록 권유하지만 다니엘은 진실을 알고자 한다. 그동안 보지 않았던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자 한다. 그것이 진실의 파편일 뿐이라도 다니엘은 혼자서 사건을 다시 재구성해 본다.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그리고 듣지 못한 사무엘의 목소리를 기억해 낸다. 스눕을 병원에서 데리고 오던 날 죽음을 암시했던 그 목소리를.
다니엘은 스스로 선택한다. 자신의 증언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다니엘은 자신이 목격하고야 말았던 ‘진실’에 가까운 그날에 대해서 말한다. 마치 유언과도 같았던 그 말은 재판에 이기기 위해 필요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진실’은 산드라에게도 다니엘에게도 깊은 상처로 자리 잡았다.
산드라는 재판에서 이기고 변호인단과 술잔을 기울이지만 그 축배 속에서 자신은 웃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아들과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일상과 관계는 망가져 버렸고 해부의 끝으로 너덜너덜해진 잔해들만이 남았다.
이 영화를 보며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와 샬롯 웰스 감독의 <애프터썬>이 떠올랐다. 한 영화는 더 가까이 들어가고 한 영화는 더 멀리서 바라본다. 어김없이 슬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