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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깃은 하나다

트레바리 GD-셋토 2020년 5월 모임 독후감

지난 2월 23일, 미국 남동부 조지아주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 25살 흑인 청년 아무드 아버리가 집 근처 교외 주택가에서 조깅을 하던 중, 트럭을 몰고 가던 백인 부자(父子)로부터 총격을 당해 사망한 것이다. 사건 발생 73일 동안, 이 살인마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채 훈방조치 돼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백인 중 아버지쪽에서 수사기관에 "강도로 의심돼 자기방어를 했을 뿐이다"라고 말한 의견이 채택됐기 때문이다. 믿기 어렵지만 1920년이 아니라 2020년, 코로나로 인해 온 세상이 바뀌기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 미국에선 앞서 언급한 아무드 아버리의 죽음을 애도하며 수많은 흑인들이 그와 똑같은 추리닝을 입고 속속 시위의 물결에 합류하고 있다.


한편 11년 전(2009년) 한국에선, 수도인 서울 한복판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특공대를 투입해 사람을 무려 5명이나 불태워 죽인 사건이 있었다. 특공대를 지휘해 민간인을 화형시킨 경찰 간부들은 전부 특진하거나 영전했고 당시 그저 살기 위해 맞섰던 사람들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을 엄정하게 응징당해 전부 감옥에 갇혔다. 작년 이맘때쯤, 간신히 석방돼 나온 사람들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장문의 글을 한 번에 끝까지 읽어내려가지 못하고 중간중간 자꾸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성범죄 사건의 장본인, 법무부 차관 출신의 김학의는 '무혐의' 처분을 받고 당당하게 걸어나왔다. 견(犬)찰과 썪을대로 썪은 법조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도운 결과였다.


권김현영 선생님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를 출간했을 때, 북토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100명일 때 가해자도 100명인 경우는 없다. 보통 가해자는 약 30명 정도, 즉 30%의 사람이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한 명의 가해자가 여러 명의 피해자를 만드는 구조다."


이건 70명의 다른 남성들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30이 아니라 70쪽에 포함돼 있으니까 괜찮아'라고 위안 삼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말하자면 전략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권력형 범죄의 양상 또한 위와 비슷하다. 말 그대로 권력이 있어야 저지를 수 있는 범죄니까, 권력이 있는 사람의 수는 30이 아니라 10, 어쩌면 그보다 더 적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이 범죄자들은 한 계통에서만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성범죄자가 뇌물도 수수하고 공금도 횡령하는 것이지, 성범죄만 저지르거나 뇌물만 수수하는 권력형 범죄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이건 순서와 관계된 일도 아니고 경중과 관계가 있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건 단지 타깃의 문제다. 미국에서 분노에 차 모이고 있는 흑인들 사이에 반드시 흑인 여성 페미니스트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고, 용산 참사 때 한국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N번방 사건 때처럼 분노했어야 하는 이유다(같은 이유로, 남성들 역시 N번방 사건에 분노하고 함께 연대해 싸워야 함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다). 용산 참사를 묵인하고 넘어가면, 그 권력형 범죄자들은 제2, 제3의 김학의가 된다. 그들을 보고 자란 사람은 N번방 범죄자가 되고, 법은 이들에게 터무니없이 관대하다. 이른바 '판결을 먹고 자란' N번방이란 건, 사실 따지고 보면 국민들의 무관심을 먹고 자랐다. 생업이 너무 바빠 정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면, 적어도 권력을 감시하고 눈을 부릎 뜬 채 세상을 살펴보는 정도의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으로서 자격이 있고 그래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호소할 명분이 생긴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녀를 잃은 단원고 학부모 중 한 분의 인터뷰를 먹먹하게 읽었던 적이 있다. 50대 여성 분이었는데, 그분은 평소 '데모' 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만 끼치는 인간, 이라는 인상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힘으로 뭔가 노(오)력해서 바꿔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는 식으로 깽판을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뼈저린 아픔을 겪고 어딘가 호소할 곳도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보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것밖에 없어서 시위에 나서다보니 이제야 비로소 생각이 달라졌다고 한다. 지난 날, 자신과 결은 다르지만 정도의 차이가 크지 않았을 아픔들을 겪고 할 수 없이 거리로 나왔던 수많은 사람들을 손가락질 했던 자신을 그제서야 반성하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우리는 과연 자격이 있을까. 우리에게 어떤 불합리한 일이 생겼을 때, 국가가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큰 힘이 우리를 괴롭혔을 때 도와달라고 호소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을까. 모두 자문해봤으면 좋겠다. 타인의 아픔에 대해 우리 모두가 더 이상 무관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타깃은 어차피 모두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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