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정관장부터 호반까지 농심신라면배 방식 '연승전' 인기 끌며 발족
바둑 역사를 통틀어 가장 인기 있는 대회 방식이 '연승전'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시초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중·일 슈퍼대항전'이라고 명명했던 중국과 일본 국가 대항 연승전에서 녜웨이핑이 '철의 수문장'으로 등극한 사건이 손꼽힌다.
당시 세계 바둑 최강국이었던 일본은 중국에 '한 수 가르쳐주는' 느낌으로 대회를 치르다 가토 마사오·고바야시 고이치에 이어 기성 타이틀을 손에 쥐고 "일 년에 4판만 이기면 된다"고 호언하던 후지사와 슈코까지 녜웨이핑에게 무너지며 '선수단 전원 삭발'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은 1989년 조훈현이 단기필마로 응씨배 우승을 차지한 이후부터 '동양 3국' 일원으로 정식 초대 받는다. 이전까지 한국 바둑이 당했던 수모와 멸시는 당시 유일했던 바둑 매체 월간 『바둑』에 여러 차례 기고되기도 했다.
조훈현의 선전과 유창혁·이창호 등 신진 기수 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은 세계 최초로 3개국(한국·중국·일본) 연승 대항전 '진로배'를 개최한다.
1992년 서울 힐튼호텔에서 성대하게 개막한 진로배는 서봉수가 세운 '불멸의 9연승' 신화를 비롯해 숱한 화제를 뿌렸다.
정관장배와 농심배 연이은 성공에 고무된 한국은 개인전이었던 정관장배를 2005년 3회 대회부터 진로배·농심배와 동일한 국가 대항 연승전으로 탈바꿈시킨다. 최초의 '여자 바둑 삼국지'였다.
3회 대회 우승은 중국이 차지했다. 중국 선봉 예구이가 5연승을 하며 일찌감치 밀리기 시작했고 최종국에선 한국 주장 박지은이 당시 한국에서 활동 중이던 루이나이웨이에게 패퇴하며 우승컵을 내줬다.
4회 대회도 비슷한 흐름이었다. 왕샹윈이 개막전부터 5연승을 달렸고 이번엔 예구이가 중국 선수 한 명 남은 상황에서 등판해 박지은을 꺾고 중국 2연패를 확정했다.
반전이 시작된 건 2007년 5회대회였다. 한국은 김혜민만 1승을 거뒀을 뿐, 이하진·현미진·박지은이 모두 단칼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 일본 3명, 중국 2명 남은 상황에서 딱 1명만 남아 있었다.
모두가 한국이 이번에도 우승하기 어렵겠다고 포기하고 있을 때, '정관장 여신' 이민진이 막판 '싹쓸이 5연승' 대역전 드라마를 쓰며 한국에 첫 우승컵을 안겼다.
이민진은 2008년 6회 대회에서도 탕이·가토 게이코에 이어 중국 최종 주자 루이나이웨이마저 격파하며 '싹쓸이 3연승'을 달성, 한국을 2년 연속 정상에 올렸다.
유난히 연승이 많아 더욱 화제가 됐던 정관장배. 2009년 7회 대회는 1승만 거둔 선수는 한 명도 없는 진귀한 상황이 펼쳐진다.
한·중·일 각각 5명씩, 총 15명이 출전하는 정관장배 역사상 가장 적은 단 3명의 선수만 '판맛'을 봤다. 개막전에 등판한 중국 쑹룽후이가 6연승을 내달리며 한국과 일본을 2명만 남기고 모두 떨어뜨렸고, 두 번째 주자 리허에게 끝내기 3연승을 허용하며 허무하게 우승컵을 내줬다.
2010년 10회 대회에선 그동안 부진했던 박지은이 '원조 바둑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4연승, 한국은 우승컵 탈환에 성공한다. 그리고 대망의 9회 대회. 정관장배 역사상 마지막 대회이자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7연승'이 탄생한 2011년이 다가온다.
지금은 여자바둑리그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도원이 2011년 제9회 정관장배 주인공이었다.
2008년 입단한 프로 4년차 문도원은 한국 선봉장으로 출전해 일본 백전노장 아오키 기쿠요를 꺾은 것을 시작으로 정관장배 원조 연승 사냥꾼 리허와 쑹룽후이를 연파하며 일본 4명, 중국 3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막판에는 일본은 전원 탈락, 한국 4명, 중국 1명 남은 상황에서 난적 루이나이웨이가 김미리·이하진·박지연을 연파하며 진격해 다소 위기도 있었지만 주장 박지은이 완승 내용으로 루이를 꺾고 정관장배 마지막 우승컵을 한국에 안겼다.
한편 2011년에는 중국에서 '황룡사배'가 신설됐다.
이 당시만 해도 정관장배가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초대 황룡사배는 한국과 중국·일본·대만 등 4개국에서 각각 3명씩 선수를 내보내 '3대3' 맞대결을 치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금 여자바둑리그와 동일한 방식.
초대 황룡사배는 3전 전승을 거둔 중국이 우승, 중국에만 패점을 안고 일본과 대만을 제압한 한국이 준우승한다.
▲2회 황룡사배이자 연승 대항전 방식으로 치른 첫 대회.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여자 연승 대항전 최다 연승 기록이 이때 탄생했다.
정관장배 명맥을 이은 '여자 바둑 삼국지' 황룡사배는 2012년 제2회 대회부터 시작된다.
황룡사배 첫 선봉장은 2010년 프로에 입문한 2년차 막내 최정. 이때 최정은 제13기 여류명인전 우승(1월 26일)을 차지하며 기세가 한창 올랐을 때였고, 불과 5일 후 펼쳐진 첫 판에서 일본에 패할 것으로 예측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승 징크스(바둑에서 프로 선수들이 우승 직후 슬럼프를 보이는 현상)로 볼 수도 있겠고 신구미월령에 해당할 수도 있는 시기였다. 최정이 한국 여자 바둑을 이끌 대들보가 될 거라는 사실은 자명했으나 이때 최정의 나이는 불과 16세였다. 세계 무대에서 태극 마크를 달고 승부하는 경험도 물론 처음이었다.
절치부심한 한국은 2013년 제3회 대회부터 면모를 일신한다.
이 대회는 2009년 제7회 정관장배와 똑같은 진기한 장면이 연출됐다. 이번엔 한 판 이겼다 하면 무조건 3연승 이상씩 달성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한국 선봉으로 출전한 김채영이 파죽의 4연승을 달리며 기선을 제압하자 중국에선 위즈잉이 6연승으로 맞섰다. 한국에선 2회 대회 때 아픔을 겪었던 최정이 심기일전하며 출전했고, 위즈잉의 7연승을 저지하는 귀중한 승리 이후 질풍노도 같은 3연승(위즈잉·리허·왕천싱)으로 한국에 황룡사배 첫 우승을 선사했다.
황룡사배가 본격적으로 최정-위즈잉 대결 구도로 흘러가기 시작한 건 2015년 5회 대회부터였다.
5회 황룡사배에서 한국은 개막전에 등판한 오정아가 4연승을 쓸어담으며 앞서갔고, 2차전에선 최정이 중국 쑹룽후이·차오유인·위즈잉을 차례로 격파하며 '싹쓸이 3연승'으로 한국 우승을 확정지었다.
중국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16년 6회 대회에선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오유진이 일본 주장 후지사와 리나를 제압한 시점에서 한국은 최정·오유진 2명, 중국은 위즈잉 단 1명만 남아있었다. 우승을 충분히 기대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이번엔 위즈잉이 막판 2연승을 달성하며 중국이 우승컵 탈환에 성공한다.
2018년 8회 황룡사배에선 후지사와 리나·루이나이웨이·왕천싱을 연파하며 3연승 중이던 최정이 최종국에서 위즈잉에게 패하며 또 한 번 분루를 삼켰다.
하지만 2019년 9회 대회를 끝으로 중단된 황룡사배 마지막 대회에선 오유진이 저우홍위·뉴에이코·리허·우에노 아사미를 제압하며 4연승, 바통을 이어받은 최정이 루민취안·위즈잉을 돌려세우며 한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정관장배와 황룡사배 모두 9회까지 진행된 후 중단됐고 마지막 9회 대회는 모두 한국이 우승했다는 점도 이채롭다.
3년 만에 다시 시작된 여자 바둑 삼국지. 국내대회였던 호반배가 '세계여자바둑패왕전'으로 환골탈태하며 2022년 바둑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한국은 최정·오유진·김채영 등 황룡사배에서 이미 잔뼈가 굵은 연승 경험 많은 선수들을 필두로 허서현과 이슬주 등 신예 기사까지 신-구 조화를 이룬 대표팀을 꾸렸다.
1차전에선 한국이 1승으로 다소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중국 천재 소녀 우이밍 연승 행진에 이슬주와 허서현이 모두 제물이 된 것. 한국은 3장 김채영이 첫 승을 안긴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중국에 초반 득점을 허용한 상황에서 2차전에 나서는 최정과 오유진의 어깨가 무겁다.
중국은 부동의 여자 랭킹 1위 위즈잉을 비롯해 최근 기세가 좋은 저우홍위·루민취안·리허 등 4명이 2차전 출격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 또한 센코컵을 통해 첫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 우에노 아사미와 후지사와 리나 등 만만치 않은 선수들이 남아있다.
과연 한국은 초대 호반배 우승컵을 가져올 수 있을까. 관심이 집중되는 2022 호반배 세계여자바둑패왕전 2차전은 10월 15일 일본 후지사와 리나와 중국 리허 대결로 속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