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싹쓸이 4연승'으로 막 내린 농심배 한중일 '바둑 삼국지' 리뷰
2월 26일 막을 내린 스물세번째 바둑삼국지는 모두가 기억하는 대로 신진서 ‘싹쓸이 4연승’으로 한국이 우승했다.
2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이하 농심배)에 이어 2년 연속 싹쓸이 우승 결정으로, 신진서는 농심배 도합 9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우여곡절 많았던 농심배였다. 대표 선발부터 1~3차전 주요 장면을 돌아봤다.
#드림팀 결성
먼저, 대표 선발 면에선 ‘역대 최고’라는 평을 받았던 초호화 군단이었다.
부동의 랭킹 1위 신진서가 시드를 받은 것을 필두로, ‘지옥 관문’으로 여겨지는 농심배 선발전에서 한국 랭킹 2~4위에 랭크된 박정환‧변상일‧신민준이 차례로 각조 우승을 차지했다. 23년 농심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관심이 집중된 와일드카드는 당시 ‘바둑리그 17전 전승’ 신화를 쓰며 랭킹 역주행 정점을 찍고 있던 한국 5위 원성진에게 돌아갔다. 그야말로 신구 조화를 이룬 대표팀, 한국 랭킹 1위부터 5위까지 5명이 모두 포진한 역대 최초, 최강의 드림팀이었다.
#박정환 깜짝 등판이 화제였던 1차전
2021년 10월 11일 열린 제23회 농심배 개막전은 한국 선봉 원성진과 일본 시바노 도라마루가 맞붙은 한일전이었다.
와일드카드를 받은 ‘맏형’ 원성진은 특유의 펀치력으로 전투에 일가견이 있는 시바노를 한 방에 KO시키며 155수 만에 흑 불계승, 한국에 개막전 승리를 안겼다.
이어진 1차전 경기는 중국과 일본이 차례차례 승리하는 시소게임 양상이 펼쳐졌다. 원성진이 중국 선봉 리웨이칭에게 패했으나, 일본 두 번째 주자 쉬자위안이 등판해 중‧일전 승리를 따냈다.
여기까지는 여느 농심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흐름이었지만 그 다음이 놀랠 노자였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던 한국 두 번째 주자는, 바로 박정환이었다.
오랜 시간 한국 수문장 역할을 맡아온 박정환이 1차전에서 등판할 걸로 예상한 사람은 단언컨대 아무도 없었다. 과거 이세돌이 서봉수가 세운 진로배 9연승 신화에 도전이라도 하듯 1차전에 출격한 적이 있긴 했지만, 당시 셰허에게 일찌감치 막히며 ‘초강수’는 자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게 사실.
예상을 깬 박정환 등판에 팬들은 환호했다. 쉬자위안을 가볍게 꺾은 박정환은 2차전에서 숙적 판팅위와 만났다.
#악몽이었던 2차전
한국에겐 악몽 같았던 2차전을 돌아본다. 시작부터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던 건 조기 등판한 박정환이 2차전 첫 경기(2021년 11월 26일)에서 중국이 자랑하는 농심배 스타 판팅위에게 완패를 당하며 탈락했기 때문.
최상급 카드 하나를 속절없이 잃어버린 한국은 변상일과 신민준에게 큰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는데, 상황은 처음엔 호재인 듯 했다. 까다롭다고 생각했던 판팅위가 바로 다음 판에서 이야마 유타에게 덜미를 잡힌 것.
하지만 쉽게 생각했던 이야마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1차전 박정환 등판을 예견한 사람이 아무도 없듯, 이야마가 2차전부터 등판한 것 또한 손꼽는 일이었는데 이게 곧 ‘일본 준우승’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 될 거라는 사실 또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판팅위를 제압한 이야마는 기세 좋던 변상일마저 완파했다. 노림수 한 방으로 대마를 몰살한 완승국이었다. 중국 리친청마저 제압한 이야마 유타와 한국 부주장 신민준이 마주 앉았다. 뒤에 신진서밖에 없는 상황. 이 바둑을 패하면 한국은 3차전에 신진서만 홀로 출전해야 한다.
배수진을 치고 경기에 임한 신민준은 시작부터 오랜 시간 줄곧 리드를 점했다. ‘그럼 그렇지’ 하는 목소리가 검토실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야마 유타가 달성한 3연승도 일본 농심배 최다 연승 기록과 타이였다.
역시 여기까지, 하는 분위기에서 갑자기 국면이 요동쳤다. 갑자기 상대 집 모양이 커 보인 게 화근이었다. 엉뚱한 곳에서 수를 내려고 하다가, 뜻밖에 대마가 잡히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모든 수를 잘 두고 있다가 딱 한 번 실수했을 뿐인데, 신민준은 망연자실 돌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2차전이 ‘이야마 유타 4연승’으로 끝나자 위기감이 고조됐다. 역대 최강이라던 대표팀 위용은 온데간데 없었다. 22회 때는 신진서 뒤에 든든한 박정환이 남아 있었고, 설혹 신진서가 끝내지 못했더라도 박정환이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아무도 없는 고독한 싸움을 펼쳐야 하는 신진서에게 중‧일 초고수들을 상대로 4연승을 기대하는 게 무리는 아닐지 걱정하는 시각이 팽배했다.
#끝판왕 신진서 등판
운명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신진서는 이야마 유타와 중국 부주장 미위팅은 승리 확률을 사실상 반반으로 봤다. 둘 모두와 대국할 수 있다고 보고 양쪽을 동시에 연구했다. 역시 가장 비중을 크게 두고 대비한 상대는 중국 주장 커제였다.
2022년 2월 23일 3차전이 시작됐다. “2차전에 이어서 계속 뒀으면 이야마 유타가 우세했지만 지금은 5대5”라고 분석한 신진서 예상이 들어맞았다. 미위팅이 이야마의 5연승을 저지했다. 이로써 남은 인원은 중국 2명(커제‧미위팅), 일본 2명(이치리키 료‧위정치), 그리고 한국은 신진서 단 한 명 구도가 됐다.
주장 신진서가 출격했지만 우려했던 대로 승부는 쉽지 않았다. 초반부터 실점한 신진서는 미위팅 완력에 밀리며 줄곧 끌려갔다.
이대로 이번 농심배가 끝나는가 싶던 순간, 기적이 시작됐다. 물오른 기량을 뽐내고 있는 신진서가 야금야금 추격에 성공하더니 어느 순간 미위팅 턱밑까지 도달했다. 마치 세계 최강 한국 쇼트트랙 특유의 막판 스퍼트를 보는 듯했다. 검토실에선 ‘신진서 매직’이라는 얘기가 터져나왔다.
개전 후 처음으로 승률 그래프가 역전됐다. 기나긴 인고의 시간 끝에 비로소 뒤집었다고 생각된 바로 그 순간, 미위팅이 뜻밖에 ‘시간패’를 당했다. 2년 전 박정환(對 판팅위) 때와 똑같은 해프닝이었다.
#또 터진 '시간패-재대국' 사태
대국장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참을 기다린 신진서는 결과가 나오지 않자 귀가했다. 재대국이든 승리든 어느 쪽으로 결정이 나더라도 다음 날 대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3시간을 넘긴 마라톤 회의 끝 결론은 결국 재대국이었다. 승리를 날린 것 같은 기분이 된 신진서였지만, 오히려 이때부턴 걱정하는 시각보단 기대가 더 커졌다. 신진서와 대국을 해본 정상급 프로기사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앵그리 진서’는 매우 무섭다고 전했다. 분노한 신진서를 상대할 수 있는 기사는 현 시점에 아무도 없다는 얘기였다.
반면 한국 바둑 팬들은 우려가 컸다. 승기를 잡은 장면에서 상대가 시간패 당한 판국인데 재대국이라니.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결론은, 프로기사 예측이 맞았다. 이후엔 딱히 특이점을 언급할 것도 없을만큼 신진서 독무대였다. 미위팅‧위정치‧커제‧이치리키 료가 한 줄로 가볍게 정리가 될 만큼 아무 긴장감도 별다른 내용도 없이 완패의 내용으로 신진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중국 주장 커제는 신진서에게 패한 날, 대국 직후 곧바로 SNS에 접속해 “알파고보다 더 강하다”는 뜬금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다.
신진서를 새로운 수문장으로 등극시킨 23회 농심배는 한국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대표 선발 때 초호화 군단을 구성해 우승이 기대됐던 것에 비하면 예상외로 힘든 우승이었다.
바야흐로 세계 일인자 반열에 오른 신진서는 “누구에게도지지 않겠다”는 당당한 포부를 밝혔다. 12년 만에 개최되는 아시안게임 바둑 종목과 결승에 올라 있는 응씨배, 그리고 올해 개최되는 수많은 세계대회에서 새로운 바둑황제가 탄생할지 전 세계 바둑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