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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Jan 25. 2021

선의에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클라우스 (Klaus)








불과 한 달 전이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만 지나면 그 이후부터는 쾌속선이라도 탄 듯 빠르게 새해로 진입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1월도 한참 지나 있다. 12월에 크리스마스를 느낄 수 없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길거리에서 캐럴이 사라진 순간이었을까? 평소와 같은 고요함일 텐데 12월의 고요함은 확실히 김이 빠진다. 작년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진행 중인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조용해진 12월이 스산하게 느껴질 만큼 미동도 없게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그 자체를 느끼게 해 준 영화가 한 편 있었다. [클라우스]거의 올 해의 영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좋았다. 




재스퍼는 왕립 우편 사관학교 귀족의 아들이다. 그는 특권층의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산다. 아버지는 아들이 자립하길 원하지만, 우편 사관학교에 보낸 아들은 번번이 낙제점을 맞는다. 결국 재스퍼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게 되고, 멀고 먼 섬 스미어렌스버그에서 우편배달 업무를 지시받는다. 1년 동안 6 천통의 편지를 배달하지 못하면 모든 상속권을 박탈하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지원을 중단할 것이라는 엄포에 재스퍼는 할 수 없이 스미어렌스버그로 향한다. 

도무지 사람이라고는 살지 않을 것 같은 오싹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을은 크럼 가문과 엘링보 가문의 싸움으로 긴긴 시간 동안 대대로 내려온 증오로 얼룩져 있다. 그 증오는 본인들이 왜 싸우는지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까지 전해져 있다.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서로에게 편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재스퍼는 절망한다. 

어느 날 재스퍼는 한 아이가 그린 그림 한 통을 줍게 되고 이 그림을 들고 주민들이 사는 마을과 한참 떨어진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클라우스의 집에 갔다가 그 그림을 떨어트리고 도망치게 된다. 클라우스는 그 그림을 보고 마을에 사는 아이에게 자신이 만든 장난감을 배달한다. 그 이후로 마을의 아이들에게 소문이 퍼진다. 클라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면 장난감을 받을 수 있다고. 재스퍼는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포섭하여 편지를 쓰도록 유도한다. 얼른 6 천통을 채워서 춥고 아무것도 없는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 




분명히 선의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재스퍼는 이 마을을 떠나기 위해서였고, 클라우스는 슬픈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장난감을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매일매일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배달하면서 서서히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어른들이 쉽게 바뀔 수 없는 건 경험이 많이 때문이다. 그 경험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 세계에 자신을 가두기도 한다. 그 세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진다. 어른이 될수록 겁이 많아지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실이다.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경험이 많지 않기에 수시로 아주 얕은 담을 거침없이 넘어 다닌다. 슬픈 기억이 없기에 누구에게나 손을 쉽게 내밀고, 빨리 친해진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친구가 될 수 있다. 

클라우스의 슬픈 과거, 재스퍼의 나태하고 의욕 없던 삶의 태도, 앨바의 잃어버린 꿈까지 클라우스에 모인 어른들의 모습에서 쉽게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을 골탕 먹인 아이를 혼내주기 위해 재스퍼가 둘러댄 착한 아이만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말 한마디는 놀랍게도 아이들을 변화시켰다. 선의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 그저 장난감을 받고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고 해도 선한 행동은 또 다른 선한 행동을 낳았다. 그 덕분에 재스퍼에게는 삶의 목표가 생겼고, 클라우스에게는 전에는 없던 미래가 열렸다. 엘바에게는 가르칠 수 있는 학생들이 생겼다. 그다음은 우리도 충분히 아는 이야기다. 


클라우스는 이야기 자체로도 탄탄하고 짜임새 있지만 애니메이션이 갖고 있는 한계 없는 표현도 잘 이용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 공들여 만든 것이 느껴진다. 얼음과 눈의 질감, 낮과 밤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흰 눈이 가득 쌓인 회색빛 마을에 따뜻한 오렌지색 불빛이 퍼져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져 오고 그런 감정이 반가워 눈물이 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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