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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Dec 17. 2022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는 데 걸린 시간

작년에는 일을 구하느라 1년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한 해가 끝나기 전 새로운 직장을 구했다. 이전의 직장들처럼 계약기간이 있는 곳도 아니고, 단기 아르바이트도 아니었다. 기간의 정함이 없이 근무를 할 수 있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올 해의 11월이 되어 이 회사를 다닌지도 1년이 지났다. 그리고 12월이 됐다.


나는 몇 달 전부터 학자금 대출의 남은 금액을 확인해보고 있었다. 12월이면 얼마 남지 않은 금액을 전부 상환하리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전 남아 있던 학자금 대출을 모두 상환했다.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농협에 대출을 받으러 갔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어딜 간 적이 손에 꼽을 만큼 없었기 때문에 농협까지 가는 길도, 은행에서의 긴 기다림의 시간도 모두 어색했다. 이미 은행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도 번호표를 뽑고 무기력하게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가게를 잠시 맡겨두고 나왔던 아버지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 같다. 벌떡 일어나 앞에 있는 창구로 걸어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자신의 순서를 새치기당했다는 생각에선지 중년의 여성이 창구로 달려와서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아버지는 순서를 가로챈 게 아니라 뭘 물어보려고 했던 거라고 설명했지만 물어보는 것도 순서대로 해야지 왜 차례를 안 지키냐고 그 사람은 악을 썼다. 아버지는 그때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민망하고 무안한 마음에 제대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뒤로 물러났다. 그 사람은 아버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렇게 초라하게 뒤로 물러나는 아버지를 애써 모른 척했다. 함께 온 일행이 아닌 것처럼. 우리 차례가 왔을 때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몇 개의 서류에 이름을 적고 사인을 했고, 아버지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입학금마저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도, 새치기를 하려던 것도 아닌데 불같이 화를 낸 그 사람에게도, 무기력하고 초라했던 아버지에게도 모두 화가 났다. 그렇게 나의 학자금 대출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리고 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한 학기를 제외하고 매 학기마다 학비를 대출받았다. 어림잡아한 학기 당 3백만원이 넘는 학비를 7번 대출받았으니 2천만 원이 훌쩍 넘는 큰 빚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생긴 것이다. 내 앞으로는 몇 개의 통장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갚아야 할 돈이 큰 산처럼 찍혀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이직을 하고, 다시 취직을 하는 동안에도, 일을 하지 못하는 기간에도 어김없이 매달 대출금과 이자를 갚는 날짜는 돌아왔고, 그 돈은 정확하게 통장에서 빠져나갔다. 그렇게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야 나는 2천만원 상당의 돈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인생에서 돈이 필요했던 순간들은 꽤 많았고, 모아뒀던 돈들은 그런 곳에 먼저 썼다. 밀리고 밀리고. 학자금 대출의 순위는 늘 나중이었다. 고맙게도 이렇게 긴 시간 상환하지 못하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 매달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돈만 가져가 줬다. 

그리고 몇 주 전 드디어 학자금 대출이 1순위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돌아온 것이다. 모든 금액을 상환하고, 승인이 되자 한국 장학 재단에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한국장학재단에서 고객님께 축하와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고객님께서는 22.12.09 기준으로 보유하신 대출을 완제하셨습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상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살면서 몇 번 대출을 받았다. 돈을 빌릴 때마다 늘 불안과 걱정, 부끄러움 같은 감정들이 동반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은행 직원이 늘 너무 커 보였고, 이 사람이 나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유독 그 사람 앞에서 공손하고 소심해졌다. 어떤 대출은 시간을 재촉하며, 나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의 대출을 받았고, 몇 개의 대출을 상환했다. 어떤 대출이든 모든 금액을 상환하고 나면 큰 안도감과 후련함이 든다. 그런데 학자금 대출은 안도감보다는 뿌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학자금 대출은 나의 첫 번째 빚이었다. 가장 오래된 빚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이 대출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어려운 시기에 나를 도와준 고마운 친구에게 성공하면 꼭 은혜를 갚아야지라는 마음이 드는 것처럼 학자금 대출을 대했다. 그 성공이 대단한 성공이 필요한 것도 아님에도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는 2천만원밖에 안 되는 돈을 갚는데 20년이 걸린 거면 너무 게으르고 무신경했던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경각심을 가졌다면 진작에 돈을 갚고 더 홀가분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쩔 수 없이 이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고, 이 시간이 걸려서라도 모든 돈을 상환했다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기쁜 마음에 엄마에게 드디어 학자금 대출을 다 갚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엄마는 그 빚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그렇게 큰 금액이었냐고 놀랐다. 고생했고, 잘했다고 답장이 왔다. 

아버지한테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미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딸과 함께 돈을 빌리러 가야 하는 춥고 민망한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더 몰아세웠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꼬인 마음에서 시작한 대출을 갚아나가면서 그 사이 나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성인 2명이 자기 몫을 해내고, 한 달, 한 달 나가야 하는 돈을 맞춰 사는 일도 꽤 녹록지 않다. 우리 몸만 건사하면서 살면 되는데도 형편이 크게 나아지진 않는다. 그런데 나의 부모는 자식 셋까지 챙겨야 했으니 생활의 팍팍함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때도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그때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뿌듯한 마음은 2023년의 좋은 원동력이 될 것 같다. 제로가 되었으니 다시 뭐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든다. 아니, 뭐든 해보자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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