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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Mar 11. 2023

영광은 넣어두세요. 선생님


구글 검색창에 내가 나온 초등학교와 그 선생님의 이름을 함께 검색했다. 맨 위에 뜨는 블로그를 클릭하고 깜짝 놀랐다. 나의 사진이 몇 장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단독 사진은 아니었고 어딘가로 놀러 가서 단체로, 몇 명씩 서서 찍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전체 공개 상태로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올라와 있다니.

그 글을 작성한 사람은 내가 검색한 그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글의 작성자는 분명 나와 같은 반이었던 사람일 것이다. 나는 몇 개의 글을 더 넘겨 봤고, 그 글의 작성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친구는 1번이었다. 김 씨였으니까.


내가 그 선생님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 본 건 그 친구의 추억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요즘 뜨거운 이슈인 그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면서 나는 몇 명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렸는데 그중에 그 선생님도 있었다.

그 선생님은 학교에서 유명했다. 학교에서 유일한 미혼의 남자 선생님이었고 가장 젊었다. 학교에서 시키는 일이 많아 그 선생님은 늘 바빴다. 그는 크고 덩치가 있는 편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보였지만 다시 사진을 보니 그는 그렇게 큰 키가 아니었다.) 그 선생님이 화를 내를 모습을 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른 반이었을 때도 익히 그 선생님의 명성을 알고 있었으니까. 유독 남자가 소리 지르는 모습에 경기에 가까운 공포를 느꼈던 나는 6학년 반 배정을 받고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6학년을 보내면서 내가 걱정하고 무서워했던 폭력의 현장을 꽤 많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어떤 날은 격의 없이 우리와 어울렸지만, 심사가 뒤틀리면  급식차를 뒤엎었다. 그렇게 국통과 반찬통이 교실 바닥을 뒹굴면 우리는 익숙한 얼굴로 걸레를 들고 와 그것들을 치웠다. 

한 번은 소풍날이었는데 모두 운동장에 서서 한 남자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는 또래보다도 한참 작은 아이였다. 차례차례 다 온 순서대로 대절한 버스를 타고 떠났고 결국 우리 반만 남았다. 그때 작은 남자아이는 헐레벌떡 교문을 뛰어들어왔다. 선생님은 그 남자아이가 가까이 오자마자 바로 발길질을 했다. 그 남자아이는 선생님의 허리를 겨우 넘길 정도의 키였다. 그 아이는 순식간에 고꾸러졌지만 선생님의 발길질과 욕설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다른 선생님이 달려와 담임을 말리기 전까진 그 작은 아이를 향한 발길질은 계속 됐다. 

 

그런데 그 블로그의 작성자인 친구는 왜 그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그 친구도 1년 동안 그 숱한 폭력을 마주 했을 텐데. 

선생님은 그 당시에 우리를 데리고 참 많이 놀러 다녔다. 주말이면 서울랜드를 갔고, 여름방학에는 대천 해수욕장으로 캠핑을 갔다. 겨울이면 스키장을 갔다. 당연히 공식적인 학교 행사가 아니었다. 선생님이 원해서 행사를 자주 기획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정말 신나게 놀았다. 

그전까지 나는 놀이동산을 가 본 일이 없었다. 선생님을 통해 처음 하는 경험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될 때마다 신나고 설렜다. 그때 나에게는 이런 것들을 보여줄 어른이 없었다. 먹고살기에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극도로 내성적이었던 나는 6학년 때 많이 밝아졌다. 내 성격을 알아봤던 건지 선생님은 나를 잘 챙겨줬다. 자주 칭찬을 해주고, 말을 자주 걸어줬다. 투명인간 같았던 학교 생활에서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불렸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너무 좋고, 너무 무서운 사람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어느 포인트에 화가 날지, 받아줄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린 어렸기에 그런 폭력의 시간들을 쉽게 잊고 놀러 가서 또 깔깔거렸다. 그러니까 1번이었던 그 친구는 아마 그 추억 때문에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 글로리'를 보면서 나는 그 선생님에게 주목받지 못했던, 발길질을 당했던, 날아가던 국통 세례를 받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13살의 무력한 아이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던 사람. 그 발길질의 대상이 내가 아님을 안도하며 애써 맞은 친구들을 외면했다. 그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는 거라고, 말을 안 들었으니까, 고집을 부렸으니까 맞을만했다고 타협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당했던 친구들에게 나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준 적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쯤에 소식을 들었다.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 아이가 학교를 그만뒀다고.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고, 급식차 앞에서 차례차례 급식을 받고 있었다. 새치기를 해서 반찬을 더 가져가려는 선생님을 향해 그 여자아이는 짓궂은 농담을 했다. 그 순간 담임은 지체 없이 급식차를 엎어버렸다. 그 아이에게 뜨거운 국물도 튀고, 반찬도 튀었다. 선생님은 그 여자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점심시간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당연히 그 점심시간의 일 때문에 몇 년이 지나 학교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그런 폭력의 시간, 열외의 시간, 무자비한 냉대의 시간들이 그 이후로 차곡차곡 쌓여서 그런 결과를 만든 거라면 과연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선생님은 6학년이 끝날 무렵 10년 후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10년 후에 다시 만날 날짜와 시간, 장소를 정했다. 그때 나는 그 약속을 당연히 지키리라고 생각했다. 좋은 기억이 많다고 생각했으니까. 신기하게도 10년의 세월이 지날 동안 한 번도 그 약속을 잊어버려본 적이 없다. 하지만 23살이 됐을 때 나는 그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그날 선생님을 비롯해서 그 장소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그곳에 모인 제자들이 본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까? 



사람한테는 다양한 면이 있다. 누군가의 지평을 넓혀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악마 같은 사람일 수 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나를 짓밟고 망가뜨린 사람일 수도 있다. 그 사실이 어른이 된 나를 많이 괴롭게 한다. 적어도 나는 그에게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그 시절이 좋았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른이었고, 우리는 고작 13살이었다. 그는 어른이었고, 선생님이었기에 미성숙한 우리를 훈육할 수도 있었지만 보호할 의무도 있었다. 훈육의 방식은 폭력의 방식이 아닌 정당하고 납득가능한 방식이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숱한 발길질을 하면서 한 번이라도 학생에게 사과한 적이 있을까? 과연 그는 언제까지 발길질로 반 아이들을 훈육했을까?


결국 구글링을 통해 그 선생님에 대한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선생님을 하지 않을 수도, 이제는 체벌로 아이들을 훈육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근근이 교직생활을 버텨나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 선생님은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선생님의 폭력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분명 나 외에도 그 발길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대천해수욕장에서의 즐거웠던 추억과 운동장에서 맞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는 것은 꽤 고통스럽다. 그저 즐거운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던 그 시절에 소외됐던 그 친구들에게 지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도저히 전달되지 않겠지만.


그리고 선생님이 알고 있다면 좋겠다. 수십 년이 지나도 그 폭력의 순간들을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젊은 시절의 교사 생활을 아름다운 추억과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은 넣어두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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