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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어엄마 Nov 01. 2024

초심이 뭐였는지 기억나질 않는데

조기치매의 발견일 수도

난 인도에 2번을 다녀왔다. 파란만장 인생사로 따지면 내 지인들 중 넘사벽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의 오랜 친구 덕분이다. 그 녀석이 인도 남자랑 결혼을 해서 친구가 첫 아이를 가졌을 때 한 번, 두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또 한 번 다녀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애 엄마네 집에 배낭 하나 들고 놀러 간 무지하게 철없는 친구였다. 근데 내가 어떻게 다시 인도에서 독일로 돌아왔더라?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다시 친구네 집에서 공항으로 어떻게 갔지? 



인도여행 2010 : 사진이 남아있는게 용하다


2008년에 처음 인도에 가보고, 이 나라의 강렬한 색깔과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핏줄을 꼬드겨 또 한 번 떠났다. 이번엔 무려 카우치서핑을 했다. 선진국이 아닌 인도에서의 카우치서핑이라니, 위험할 것 같으면서도 뭔가 재밌을 것 같았다. 결과는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IT 강국이라고는 하지만, 지금도 인도는 인터넷 사용자가 50% 정도라고 한다. 2010년,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 카우치 서핑 웹사이트에 들어가 회원 가입을 했다는 건 집에 인터넷 연결이 되어 있는 최소 중산층 이상 가정이란 뜻이었다. 한국 배낭여행객을 대가 없이 자기 집에서 자라고 초대하는 사람들은 해외 경험이 풍부하고 개방적인 사람들이었다. 별난 누나 따라 인도 북부에서 남부를 훑는 미친 여행을 동참한 만만치 않은 역마살의 남동생, 우리는 진짜 지금 생각해도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했다.

2010년, 한국 배낭여행객들이 인도대학에 초대를 받았다

대학 재단 이사장이던 호스트 덕분에 경영학 수업에 게스트 강의를 하기도 했고, 외환파생상품을 거래하는 프로그램을 짜던 호스트는 절대로 컴퓨터를 만지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우리 남매에게 집열쇠만 주고 가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기억들이 생생하지가 않다. 그냥 조각조각 생각난다. 우리가 방문했던 대학에서 호텔 경영학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3 코스를 대접받았다. 프로그래머는 그 유명한 인도공대 출신이었고, 히피들의 천국이라는 고아(GOA)에서 컴퓨터가 열심히 돈을 버는 동안 해변에서 축구를 했다. 그게 다다. 이름도 생각이 안 나고 그 집에 우리가 어떻게 찾아갔는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10개가 넘는 도시를 방문했고 결혼식을 포함해 정말 많은 곳에 초대받았다. 하지만 여행기, 일기, 블로그, 아무것도 없다. 사진이 있긴 있는데, 별로 열심히 찍는 스타일이 아니라 이야기가 연결이 안 된다. 기록 같은 걸 하는 부지런한 사람도 아니다. 동생이랑 그때 여행 얘기를 해도 자세하지가 못하다. 그때 진짜 재밌었는데. 이게 다다.



난 기억력이 좋지 않다. 가사 끝까지 외우는 노래가 없다. 숫자가 4자리 수가 넘어가면 내 뇌는 곧 멈춰버린다. 이러니 아무리 좋은 경험을 해도 자꾸 잊힌다. 셀카 같은 건 원래 안 찍었고, 예쁘고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밥부터 먹는다. 문득 나란 인간은 장난감을 사주면 딱 이틀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풀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복을 주면 뭐 하나.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까먹었는데. 브런치 시작도 가끔씩 이렇게 수필을 쓰면서 조각난 기억들을 모아보자는 취지였던 거 같다. 그런데 정확한 초심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난다. 무슨 주제를 쓸려고 했더라. 맨날 똑같은 독일에서 육아 하는 얘기 말고 다른 거 쓰려고 하지 않았나?


나의 나쁜 기억력에 치를 떨때면 이 생각이 난다. 치매 걸린 부부가 매일 아침에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자고 일어나면 또 처음 만난 사람처럼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를 들은 거 같다. 붕어 기억력도 장점이 있을 수 있는 듯? 근데 어디서 들었더라? 영화 대사였나? 





(사족) 답을 찾는 것은 너무 간단한 문제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있다! 

인공지능의 명료한 답변을 읽자, 갑자기 흐리멍텅한 기억력의 소유자는 이상한 반발심이 들었으며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고 말았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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