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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생사는 오타쿠 Jan 28. 2024

마이크로매니징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믿고 맡기는 순간 새되는 사람들

마이크로매니징은 양면의 속성이 있다. 내가 싸이코와 함께 일할 때 그녀는 굉장한 마이크로매니저였는데 내가 본인만큼이나 스스로를 마이크로매니징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난 후 나에게 만큼은 마이크로매니징을 관두었다. 내버려둬도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줬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속으로 욕이 절로 나오던 엑셀의 깔끔함이나 PPT 스타일에 대한 잔소리도 그쳤다. 그제야 나는 싸이코는 정말 엑셀이나 PPT 글자 하나하나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테스트 했다는 걸 알게되었다. (사실 사람을 테스트 하는게 싸이코, 쏘패의 자질이긴 함)


그녀를 진짜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던 건 외국계에서 한 번도 일해본 적 없는 국내 대기업 출신 부장님들이었다. 그들은 이름만 들으면 내로라 하는 대기업에서 임원을 달지 못하고 나와 외국계로 알음알음 이직한 사람들이었는데, 정말 뭔짓을 해도 그들을 일하게 만들 순 없었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손으로 해본 것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협력사가 무슨 말을 해도 믿고 고(GO), 500만원이라면 500만원인줄 알고 1억이라면 1억인줄 알았다.


일단 신사업 부서가 탄생하고 나면 임원들이 가시적인 성과 창출을 위해 하는 것이 시스템 구축이다. 원래는 내 위에 모가지가 잘린 앞선 3명의 부장님들이 그 시스템 구축을 했어야 했다. 다행히 최종적으로 선정된 업체는 성실하고 나름 진실된 업체였는데, 업체가 선정되기 전까지 부장님들은 그대-로 믿었다. 업체가 하는 말, 제시하는 금액,"다 할 수 있다는 말" 등등. 금액을 breakdown 한 표를 받아보지도 않았고, 문서를 하나하나 읽어보지도 않았으며, RFP도 다른 회사 것을 짜깁기 해서 대충 작성했다. 그러다가 위에서 금액이 이게 뭐냐 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깎으라고 업체에 통보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부장님이 진행하는 동안 나는 RFP 를 제대로 쓰고 명확하게 요건을 소통해야 괜찮은 업체가 뽑히지 않을까, 금액 적정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금액을 breakdown 해야하지 않을까, 나는 싸이코의 의도가 명확하게 들리는데 왜 부장님은 자꾸 이상하게 업체랑 소통할까를 속으로 고민하고 자료들을 만들고 회의에서 한두마디씩 말을 얹다가 결국 내가 그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요건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업계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금액을 breakdown 하거나 아키텍처를 검토해야 한다"고 사고할 줄 아는 사람이,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있는 회사는 대기업 제조사고,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그러하듯 그룹사 안에 SI 계열사가 있다. 그리고 나는 SI 계열사가 있기 때문에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내가 전전긍긍 하던 저런 부분들을 전문적으로 케어해줄거라고 믿었으나... 똑같았다. 기업이 전통적이고, 업계가 보수적이고, 삼성/LG/현대/SK 등등 앞글자에 붙이고 있는 모든 그룹사들은 하나같이 안일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이 용인되었고, 엄격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대충대충 흘러갔다. 그 과정에서 세세하게 챙기고 할 말을 하는 사람만 점점 바보가 되는 구조였다.


메일로 소통하는 걸 싫어했다. 전화로 소통하면 발뺌하면 그만이지만, 이메일로 소통할 경우 증거가 남아버리니까. 그리고 그들은 본인이 수신자로 되어있는 메일조차 읽지 않는데, cc로 온 메일을 읽을 리가 만무했다. 그런 사람들과 일하면서 나는 싸이코가 제 화에 못 이겨 성질을 내던 것이 이해가 갔다.


싸이코는 젊은 나이에 임원을 달았고, 아이비 나온데다가 월스트리트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지금 보니 그 정도만 해도 양반이다. 나를 포함해 다른 직원들은 "그래도 50대 아저씨.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인데 어떻게 저렇게 하나하나 마이크로매니징 하고 의심하고 혼낼 수가 있나라고 말을 했지만, 그럴 수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일이 진행이 되었다.


대기업에서 오래 머무른 고인물들은 지금 이 시대에서 성과를 이루는데 너무너무너무 많은 방해가 된다. 마이크로매니징 하지 않으면 일이 진행되지 않고, 마이크로매니징 하면 나이/짬으로 무시하며 기분 나빠 하니까. 회의 중엔 지속적으로 안건과 관계없는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을 늘어놓기에 바쁘고 말을 끊으면 또 기분 나빠한다. 그러면서 성과를 만들려는 사람만 바보로,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데 그것이 그들의 30년 회사생활 동안 배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적은 이 모든 것 똑똑하고 부모님들이 대기업 들어가라 해서 들어갔는데, 막상 마주친 현실이 시궁창이라 당황한 젊은 세대가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그냥 우리 방식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성과를 내기 위해 필요하면 마이크로매니징을 하자(특히 본인 직무가 PM 등 이라면). 대신 고인물들이 하는 다음과 같은 말들은 무시할 필요가 있다.

어휴, 그렇게 대쪽같으면 부러져.

빡빡하게 군다.

사회생활 한지 얼마 안돼서 그래

그렇게까지 일해서 뭐하게? 재테크나 공부해 (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재테크 잘하는 사람 한명도 못봤습니다)

아주 FM이야

일은 그렇게 진행하는게 아니야

그러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싫어해


결론은 마이크로매니징이 부작용을 불러오는 건 똑똑하고 스스로 잘 챙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때다. 저런 업무 습관이 잘못된 고인물들은 마이크로매니징 하지 않고 믿고 맡기는 순간, 본인만 새되는 것이다. 고인물들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지속적으로 메일을 보내고 마이크로매니징 지시라도 해야 나중에 할말이 생긴다는 점을 젊은 성과주의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래도 그들은 일을 안하지만 믿고 맡기면 0할 것을 마이크로매니징을 통해 10 정도는 하게 만든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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