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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레짱 Jun 07. 2020

변화된 역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

부모로서, 부부로서, 나로서

 

토요일


토요일 아침 선선히 덮은 이불을 개키고 의식하지 않고 거실로 나가니 아이가 보인다. 조용히 책을 읽고 노래를 웅얼거리다 엄마를 발견하고는 장난기 가득 찬 웃음을 띄고 오며 말한다"엄마~! 놀자~!" 게 공들이지 않고 어제 하다만 호비 그림 놀이를 가져온다. 안에 물을 채우고 닫는 붓.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구성된 스펀지 도장. 롤러까지. 물을 흠뻑 담가 쓱쓱 밀고 쿡쿡 찍고 드륵드륵 밀면서 그림놀이를 한다. 여기저기 물이 튀면서. 롤러로 밀어 채우지 못한 부분은 붓으로 채워 넣는다. 가지런히 놓으려고도 이쁘게 색칠하려고도 의식하지 않는다. 엄마와 딸이 토요일 아침 아빠와 동생이 자는 사이 오붓히 노는 시간을 보내었다. 이 자연스럽고 자극적이지 않은 그림놀이시간. 엄마는 나시원피스, 하늘이는 나시와 팬티 차림으로. 편안하게 보내고 있다.

 


점심 먹고 청소를 시작한 아빠를 보며 하늘이도 한몫하고 싶은 모양이다. 바닥에 누워있는 동생 몸 위로 자기 이불 한 겹 올린다. 그위로 낮 잠 베개를 올린다.  "짜잔~집이다~킥킥킥 킥" 누나가 만들어준 답답하지만 폭신한 집이 마음에 든 걸까? 같이 논다고 생각한 걸까? 누나 바라기인 마음이는 설레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끼야~"소리를 지르고 웃어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지... 이불속의 마음이 표정을 보곤 미소가 떠오르고, 옮기느라 바쁜 하늘이를 보고 폭소가 나온다. 자연관찰 책을 뺑 둘러 동그랗게 만들고는"아기 집이야~ 차란~" 하고는 만족했는지 주방놀이 장난감으로 이동한다. 마음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걱정도 불안도 있지만 어느새 둘이 노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게 꿈이 됐다. 이런 게 설레고 꿈이 될 수고 있구나. 아이들의 노는 장면이. 가족의 추억이.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사랑이 이런 걸까?



킥보드가 아직은 어려운 하늘이와 세발자전거를 끌고 단지 내 공원 산책을 나갔다. 아빠와 노는 것도 잠시 놀이터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언니와 눈이 맞았다. 어느새 둘이 머리를 맞대고 개미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슬며시 뒤로 빠져 웹서핑을 즐기는 아빠.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마음이와 단지를 한 바퀴 돌았다. 고양를 보기도 하고 나뭇잎을 사진 찍기도 하면서. 한 바퀴 돌고 오니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언니에게 흥미를 조금 잃은걸까?  살짝이 물러나 기구를 타고 놀고 싶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역시 애들은 잠깐이라니까. 이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가 자연스레 멀어지는 모습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마음...... 흐뭇하고, 애틋하다.  시간이 하이퍼 랩스 촬영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햇살이 비치고 시원한 바람이 팔 위로 스치면서. 이것도 엄마의 마음이겠지?


 jk블라썸 호텔에서 커피를 사들고 다시 단지 내 공원. 신랑과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벤치에 앉아 멍 때리고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 저녁 메뉴 얘기, 유모차 위에서 세상 모르고 자는 마음이. 바닥의 개미를 쫒았다니며 으면 안 된다고 외치고 다니는 하늘이. 아...... 집으로 들어가기 싫다. 월요일이 영영 안 왔으면 좋겠다.


잠자리 저녁. 위대한 쇼맨 영화를 틀어놓은 채 슬링으로 마음이를 품에 꼭 안았다. 토닥토닥하며 산책하듯 거실을 걷고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흔들어댄다. 본격적으로 아빠와 몸놀이 시동 거는 하늘이. 매트 시공을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양옆으로 우다다 뛰어다니는 하늘이.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빠. 빠르게 등 위로 올라타서 ' 한번 더, 한번 더~'를 끓임 없이 외친다. 이불 위로 구르고 베개를 짚어 던지고. 이거지~ 이거야~ 이게 텔레비전에서나 나오는, 홈드라마에서나 나올까 말까 한 나의 꿈이었다. 어렸을 적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가족의 울타리에 감싸져 있던 기억. 이걸 보려고, 가족을 만드려고 그렇게나 아팠다보다.   


잠자던 아빠를 마음이가 올라타서 깨웠다. 피곤에 절은 아빠에게 세상 깨끗한 웃음을 지어 보이니 아빠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얼마만인지. 아니 본 적이 없나? 신랑의 행복한 진심 어린 미소를 바라보는 나의 행복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이제는 알아서 놀겠거니. 닭튀김을 만드는 등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먹이는 아이를 보며 당황해 울상이 되어버린 아빠의 얼굴. "아빠 보고 이렇게 울면 어떻게 해~ 그래도 아빤데~" 점점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가족의 일상이 만들어지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바낀 역할을 두 팔 벌려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영화 Before Sunset



ocn에서 비포선셋이 나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 부부의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떻게 된 걸까? 잃어가는 걸까?? 사그라드는 걸까? 숨겨야 하는 걸까? 열정적인 사랑이 아님은 분명했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얘기를 듣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른다. 알 수가 없다. 신랑의 육아 살림 참여를 바라고 전투적인 페미니즘처럼 뒤집어 갈아엎어갈 때, 미처 신랑의 어둠과 상처는 보지 못했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사그라져가는 나에 대한 연민으로 흔들리고 있는 신랑은 미처 보지 못했다. 권한과 마음은 주지 않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헤매는 신랑에게 나는 얼마나 매몰찬 배우자이자 여자였는지.    


부부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일 말고, 육아 살림 말고, 갑옷을 내려놓은 채 부부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필요하면서 어려운 일인지. 자연스러운 시간은 언제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같은 시간을 쓰고 한 공간에 있으면서 남과 여, 개인 대 개인으로 존재하는 순간은 몇 분도 채 되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함께 한 우리 부부도 문득 민망하고 어색한 순간을 맡이 할 수 있었다. 마주 볼 시간이 필요한 듯 싶었다. 어느 날 새벽. <골목식당> 방송 프로그램에서 대성리 MT추억 이야기를 소환하고 있었다.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고 아이들 없이 어깨를 포개고 기대어 그저 방송을 보았다. 이화여대 쇼핑거리를 구석구석 찾아다니던 대학시절 추억. 일부러 미화시키지 않고 각자의 기억을 떠올리기만 하면 됐다. 말을 최대한 아끼고 그저 둘이 생각하고 함께할 때 느낄 수 있는 몇 분간의 부부 시간.

       


책꾸러미, 파바 데이, 재난 카드 그리고... 컴포트 랩 여신 브라렛세트   


수요일, 큰맘 먹고 외출을 시도하는 날. 곱게 입고 깨끗이 씻기고 아이와 함께. 사전에 신청한 북스타트 사업의 책꾸러미를 받으러 가양 도사관을 향해 간다. 따가운 햇살. 넘치는 기운. 산책로를 가면서 빨간 장비를 바라보며 올라오는 생동감. 한강 강변 산책로에 서서 몇몇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

파바 데이 마지막 날. 마음이의 분까지 반영하느라 조금 늦게 얻는 선불 재난 카드로 처음 결제를 했다. 할인쿠폰을 사용을 위해 마카롱 4개, 허니 카스텔라, 초코 페스트리, 몇 개의 신상 빵, 과자, 쿠키를 골라 담아 행사 가격인 13000원을 맞췄다. 유모차 보관함 가득히 책꾸러미와 빵 봉투를 담아 집에 도착했을 땐 한바탕 계획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선물까지 득템 해서 온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달성 감. 이 뿌듯함. 이 시원함.                                                                                                                                                                                               


그 날 저녘. 그 마음 가득히 안고 잠들기 위해 옷장 앞에 섰다. 밋밋한 수유브라와 펑퍼짐한 면팬티를 벗었다. 오늘 도착한 얇고 섬세한 레이스로 짜인 컴포트 랩 브라 을 손에 들었다. 핑크빛 고운 옷감색에 꽃무늬가 겹겹이 놓여있는 속옷을 살갛에 걸쳐 았다. 잃어버린 여자를. 나를 찾은 것 같은 희열이 들었다. 누구도 봐주지 않아도 된다. 유혹하고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 살에 걸쳐져 있는 보드랍고 얇은 시스루 레이스 속옷 세트는 나를 위한 아이이다. 얼굴에 열감이 올라온다. 이유 모를 미소가 지어진다. 나를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철학의 세계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내가 돌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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