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울지 않았는데 어떤 아침은 간 밤에 펑펑 운것같다
코가 찡하게 맵더니 눈물이 고였다. 엄마를 떠올렸을 뿐인데 영화의 클리셰처럼 슬픔이 밀려왔다. 늘 그렇지는 않다.
내가 요즘 다니는 유럽빵 학원의 수강생 중 두 명이 60대 여성이다. 내 엄마보단 조금 위의 연배이고 나의 일상에서 학원이 아니라면 그 나이대의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4시간 동안 있을 일은 없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불편했다. 그들이 하는 자식 자랑이라던지 은근한 재력자랑 같은 이야기는 별 관심 없었다. 오히려 반감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30대로서 내 인생의 스케치는 되었고 좀 더 명확한 선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 풍성한 채색을 하기 위해 벌이를 늘릴 방법과 현실을 직시해서 가질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한계를 인정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좀 속이 쓰리달까?
그들과 나의 소소한 일상 속 행복은 좀 다르다. 그들은 자식 건사하며 살아가려고 아등바등 애써서 나름으로 누릴 거 누려보고 이제는 내려놓았다며 텃밭의 채소를 키우고 뛰노는 손주를 보며 소소한 행복과 현재의 시간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한다. 반면 나는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채 선택한 '일부분'에만 행복을 느낀다. 예를 들면 지금의 노동이 젊음을 바탕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는 몰아치듯 일을 마치고 겨우 예약에 성공한 캠핑장에 있을 때 여유로움에 기반한 행복을 느낀다. 그들은 말한다. 젊으니까 가능한 거라고 자신들도 젊을 땐 몰랐다고.
'아, 네~ 그렇군요~'
물 흐르듯 흘려보내던 그들의 이야기에 내가 조금 더 머무르게 된 건 다름 아님 엄마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한 그들이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묘했다. 그리고 연결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건 자식들은 슬프지만 어머니는 편하셨을 거야'
그들의 부모나 시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떠했는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신기한 건 어쩌다 흘러나온 화제가 그런 말까지 이끌었다는 것이다. 무시무시하지만 너무 일상적인 일이라 놀라움이 아닌 서늘함. 그들 대화의 특징은 주제가 의식의 흐름으로 가볍게 흘러가다 갑자기 진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 가뿐히 벗어난다. 그들은 건강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가 그렇지 않을 거면 애써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여생에 대한 의지가 무척 있어 보인다. 운동과 요리와 건강보조제와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알 수 있다.
'엄마가 세상에 없다는 건 이 세상의 내편이 영영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야, 그건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
그런 뻔한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에 무겁게 떨어진다. 엄마가 없다는 건 무척 슬프고 그 슬픔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 잘 살겠지. 현재에 몰입해서 희로애락까지 골고루 느끼며 살다가 어느 날 그리움에 사무치겠지. 엄마는 가끔 '나 죽으면 어떡할래?' 이런 말을 한다. 그런 말은 전혀 나의 동요를 얻지 못하는 말이다.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이나 반찬통을 5단은 넘게 쌓아놓고 뿌듯해진 마음네 하는 엄마의 말이다. 나는 동요되고 싶지 않은 뿐더러 상상도 하기 싫다. '나는 엄마가 죽으면 따라 죽을 거야 헤헤'라고 바보 같고 생각 없는 척 말해버린다. 엄마에게 하는 은근한 협박이다.
수분이 많은 빵 반죽의 발효 확인할 때마다 나는 할머니가 떠오른다. 잔주름이 많지만 부드럽고 찰랑한 느낌의 할머니의 팔이 생각난다. 지금은 할머니도 엄마도 건강하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