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반년만에 돌아온 '와인 헤는 밤'의 주인공은 '샤토 레이몽 라퐁(Chateau Laymond-Lafon)'이다.
와인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는 다양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겐 스위트 와인일 수 있다.
필자 역시 십수 년 전에 우연히 '빌라 M'을 마시고 와인에 입문했다(밀레니얼 세대가 김경호를 통해 락에 입문하듯이..). 주머니가 가벼운 초보들은 대체로 킹성비인 이탈리아 '모스카토 다 스티'로 입문해서 프랑스 소테른으로 넘어오는 것 같다. 물론 그 뒤에는 독일 리슬링 TBA 세계가 있지만, 너무 비싸서 쉽게 엄두가 안 난다.
이번에 마신 소테른 와인은 '샤토 레이몽 라퐁'(Chateau Raymond-Lafon) 2003년이다. 간단한 제원은 아래와 같다.
점수는 A0
# 제원
국가 : 프랑스
지역 : 보르도-소테른(AOC)
품종 : 세미용 80%, 쇼비뇽블랑 20%
알코올 :13.5%
빈티지 : 2003년
구매처 : 새마을구판장
구매가 : 90,000만 원
레이몽 라퐁 2003
# 초보자를 위한 스위트 와인 설명
세계 3대 스위트 와인은 프랑스의 소테른, 헝가리의 토카이 그리고 독일의 TBA(트로켄 베렌 아우스레제)를 꼽는다. 이번에 마신 레이몽 라퐁은 소테른 지방의 와인이다. 소테른은 지역적으로는 보르도에 속해 있다.
스위트 와인은 크게 3가지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첫 번째는 모스카토 다스티 같은 와인이다. 이 와인은 발효를 중단해서 당분을 남기는 방식으로 만든다. 그래서 알코올도 보통 5~10%이고 가격도 낮다.
두 번째는 레이트 하비스트(Late-harvest) 와인이다. 늦게 수확해서 농익은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대표적으로 아이스와인이 있다. 아래 설명한 귀부와인도 레이트 하비스트이지만, 수분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다르다. 아이스와인은 포도가 얼고 녹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수분을 증발시킨다.
세 번째가 바로 '보트리티스 시네리아'라는 곰팡이를 통해 만든 '귀부와인'이다. '귀하게 부패'되었다고 해서 '귀부 와인'라고 한다. 앞서 말한 세계 3대 스위트 와인은 전부 귀부와인이다. 스위트 와인 제조 방법 중 가장 클래식하고 고급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귀부와인은 자연적 환경이 필수다. 아침에는 짙은 안개가 있어야 하며, 오후에는 강한 햇빛이 내리쬐어야 하는 환경을 갖추어야만 한다. 극강의 습함과 건조함이 반복되어야 비로소 곰팡이가 포도알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곰팡이가 붙은 것이면 버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다. 포도알에 붙은 곰팡이는 포도껍질에 미세한 구멍을 내어 수분을 빼냄과 동시에 맛과 성분은 농축시키며 마법의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귀부와인은 샴페인처럼 기본 가격이 비싸다. 인건비와 생산비가 일반 와인에 비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귀부와인은 대체로 잎이 모두 떨어진 후인 늦가을에 수확한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이 직접 관찰하면서 손으로 따야 한다. 여기서 인건비가 많이 발생한다.
이뿐만 아니라 수분이 날아가서 쪼그라든 포도알로 포도즙을 짜기 때문에 그 양이 몹시 적다. 소테른 최고봉인 샤토 디켐은 한그루에 한잔만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면적당 생산량이 무척 낮다.
그래서 귀부와인은 기본가격이 비싼 것이다.
# 레이몽 라퐁 설명
레이몽 라퐁은 보르도의 '샤토 샤스 스플린' 와인처럼 그랑크뤼 등급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웬만한 그랑크뤼 와인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레이몽 라퐁은 1850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은 1855년도 파리 국제박람회를 위해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당연히 당시 레이몽 라퐁은 그랑크뤼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레이몽 라퐁과 샤스 스플린
유명 평론가들은 보르도 등급이 재조정이 된다면 그랑크뤼로 바로 승격될 와인이 위 레이몽 라퐁과 샤스 스플린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심지어 레이몽 라퐁은 소테른 1등급의 와인 정도라고 하는 경우도 많다(물론 소테른은 특 1등급 - 디켐 1개, 1등급, 2등급만 있다).
색깔을 봐보자.
레이몽라퐁 2003년은 20년 정도 되어서 그런지 색은 호박색을 띄고 있다. 빛과 따른 양에 따라서 살짝 붉은빛이 도는 호박색으로 보이기도 하고 진한 노랑, 황금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빈티지가 어린 소테른 와인의 경우에는 레몬색 또는 보통 노란색이다. 호박색이 정도가 나오려면 못해도 10년 이상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30년 이상 되는 귀부와인은 갈색 수준으로 변하기도 한다.
호박석이랑 색이 정말 비슷
향기와 맛을 보면,
숙성이 된 소테른 와인의 전형적인 살구향이 지배적이다. 농축된 흰 과일 향이 나며 그 뒤로는 아카시아, 꿀 향기가 난다. 그리고 기다렸던 휘발유 향이 스치고 지나간다.
맛은 농밀한 꿀 그 자체이다. 그런데 달기만 하지 않다. 적당한 드라이함과 산도가 받쳐준다.
달기만 한 모스카토 다스티는 금방 질린다. 차갑게 먹지 않으면 먹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런데 잘 만들어진 소테른 와인은 질리지 않고 여러 잔을 마실 수 있다.
이번 레이몽 라퐁은 3일에 걸쳐서 마셨는데, 질려서라기 보단 아까워서 중간에 스톱한 것이다.
참고로 잘 만들어진 스위트 와인은 일반 드라이 와인에 비해 보관력도 좋다. 일주일정도는 거뜬하게 버티며 최상의 맛을 유지해 준다.
# 자! 그래서 서민의 샤토 디켐이 될 상인가?
필자 생각으로는 될 상이다. 10만 원 내외 금액으로 이 정도 깊고 다양한 맛을 보여줄 수 있는 소테른 와인이라면 서민의 디켐이 될 만하다.
물론 10만 원짜리 와인을 두고 '서민'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좀 그렇지만, 디켐이 비해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폭스바겐 골프GTI도 서민의 포르쉐라고는 하지만, 골프 GTI도 가격은 4천만원이 넘는 그랜저 값이다. 그랜저가 서민 차는 아니니깐.
필자가 작년에 일본 오카사에 있는 다카무라 와인샵에 가서 1983년 샤토 디켐을 탭바로 마신적이 있다.
25ML에 5000엔(5만원 좀 안 되는?) 었다. 10ML도 있었지만, 침 뱉는 수준이라고 하길래 욕심을 내서 25ML를 선택했다.
잔에 담기자마자 밀려오는 디켐의 향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10분 정도는 향만 맡다가 무려 7번은 걸쳐서 마신 것 같다. 엄청난 페트롤 향과 농밀한 과일과 꿀 향기만으로 한잔은 족히 마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에 마신 레이몽 라퐁은? 당연히 그때의 디켐 1983 이랑 비슷하다고는 못하겠다. 숙성연도도 무려 20년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공정한 비교는 아니다. 그래도 적게는 1/5~1/10 정도 되는 가격차이를 생각하면 평소에는 레이몽 라퐁으로 어느 정도 디켐 욕구를 달래줄만 하다. 필자가 최근에 마셨던 샤토 기로(소테른 1등급)보다 가격은 낮았지만, 맛은 더 좋았다.
단, 필수 요건은 숙성이다. 빈티지가 어린 고급 소테른 와인은 그냥 마시긴 너무 아깝다. 범죄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최소 10년 이상, 권장은 20년 이상은 되어야 제 맛을 보여준다. 충분히 숙성된 농밀한 레이몽 라퐁은 '어리기만 한 디켐'보다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