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dy Mar 06. 2022

고란사 고양이에게

2022.03.03

갑자기 난처해진 기분이야. 고마움을 꼭 전하고 싶었거든. 네가 함께여서 새벽 산책길이 너무 행복했다고. 근데 네 이름을 모르는 거야. 알 수도 없는 거지만. 그래도 ‘고양아, 고마웠다!’라고만 하면 너무 성의 없잖아. 또 이름이 없어 넌 이 글이 너를 위한 글이란 걸 영영 모를 테고. 그렇다고 니 이름을 내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어. 이미 네 엄마가, 아빠가, 친구들이 불러주는 이름이 있을 거니까. 그렇담 이건 어떨까? 너를 ‘고란사 고양이’라고 부르는 거야. 우린 고란사 가는 길에서 만났으니까. 그리고 아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네가 그 ‘고란사 고양이’라는 걸 바로 알아챌 거라고 확신해. 우리 둘만 아는 이야기니까.


겨울이 마지막 애를 쓰고 있었어. 온도를 확인했더니, 세상에 영하 4도야. 인적이 없는 새벽 어스름에 부소산성 낮은 능선이를 따라 돌며 낙화함에 올랐어. 바람에 밀려 잔물결과 함께 어딘가로 향해가는 안개를 바라보는 새벽이 이렇게 감동일 수가 있다니. 그래 이 적막이 좋아서 부여를 다시 찾았지. 북적이는 종로에서 조선을 떠올리는 것보다는, 부여에서 천사백 년 전 백제 사비성을 떠올리는 게 좀 더 마음이 가니까. “버려진 기왓장 한쪽에도 천년 전 문화꽃 향기롭다.” 이곳 부여에 오면 늘 덩그러니 떠오르는 문장이야. 언젠가 부여에 다녀왔다 하니 아버지가 일제 치하 국민학교 시절에 배운 거라며 읊어 주셨던 시지. 왜 자꾸 부여를 찾는지 이유를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 구절을 듣고서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

서서히 밝아오는 세상 위로 소리가 함께 깨어나고 있어. 백마강 차가운 강물 위로 물오리 몇 마리가 날아오르다 소리만 남기고 다시 뿌연 안갯속으로 사라졌어. 그때 넌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게 왔었지. 낙화함에서 고란사로 내려서는 계단에 들어서려는데, 저기 위 산 정상에서부터 낙엽이 잔뜩 쌓인 수풀을 헤치며 가파른 산길을 내달리면서 말이야. 내가 혹시 싶어 ‘야옹’하니까, 너는 몇 번이나 ‘야옹’하며 어느덧 내 옆자리까지 다가와 있더라.


근데 넌 왜 자꾸 계단을 앞서서 가는 거야? 그렇게 자꾸 뒤돌아보면서 반 걸음 앞서 걷는 이유가 뭐냐고? 살이 통통한 엉덩이 자랑을 하려는 건 아닐 텐데. 설마? 길 잃어버릴까 봐서 그러는 거야? 나도 이미 10번 넘게 고란사에 다녀간 사람이라고. 근데 고양이는 모르는 사람에게 등이나 배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던데, 너는 어디서 그런 믿음이 나온 걸까? 고작 본 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신발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다, 다리 이쪽저쪽에 몸을 비비다, 배를 드러내고 뒹굴 거리다가, 꼬리를 하늘로 뻗대고 앞 발을 쭉 내밀며 기지개를 켜곤 했었지. 리액션 맛집이란 말 알아? ㅎㅎㅎ 아무튼 참 많은 걸 보여준 아침이었어.

근데 너랑은 이제 그만 같이 걷고 싶어 졌어.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는데 만져지는 게 하나 없었으니까. 네게 줄 게 없는데 자꾸 친한 척하면 더 미안하잖아. 다행히 곧 계단을 다 내려서니 고란사가 이미 익숙한 듯 넌 너의 방향으로 길을 잡고 어디론가 사라졌었지. 멀어지는 네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대웅전 뒤쪽으로 향했어. 고란사에 왔으면 약수 한 잔 해야 하니까. 예전에는 바위틈에 모인 물을 마셨던 거 같은데 이제는 PVC관으로 연결된 거북이 입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고 있더라. 옆에 놓인 플라스틱 바가지에 물을 담아 두 번 벌컥거리고 돌아서려는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약수터에서 흘러나와 처마 밑 어디쯤에 고여 있는 물을 할짝이고 있었지. 난 얼른 약수터로 다시 가서 바가지에 물을 한가득 담아 네게 갔어. 시멘트 위에 고인 물 말고 이거 마셔. 넌 잠깐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바가지에 담긴 물을 열심히 할짝여. 미안한 마음마저 덜어주려는 듯 참 열심히도.


줄 게 없어 미안한 마음만 가득 찬 아침이야. 생각지도 못한 연말 성과급을 받아도 이렇게 마음이 부풀어 오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짧은 동행 오래 기억할게. 혹시 이 글이 네게 닿는다면 너에게 나도 추운 겨울 새벽 든든한 길동무였기를 바래.


안녕! 친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